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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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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끓는 남포동에서 영화보다 쓰러지리

등록 2005-10-21 00:00 수정 2020-05-03 04:24

고행자 자처하고 에너지 과잉의 현장에 동참한 한 영화평론가의 부산영화제 관람기…노숙하는 시네필의 비장함과 인파 거니는 허우샤오시엔, 어디가서 만나랴

▣ 남다은/ 영화평론가

사람들. 영화제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73개국 307편의 작품의 위력을 압도할 만한 사람들의 물결. 10주년을 맞이한 부산영화제의 잊을 수 없는 풍경은 단연코 수많은 사람들이다. 폐막을 이틀 앞두고 집계한 영화제 관객 수는 이미 지난해 총 관객 수를 넘어섰다. 영화제의 성공을 관객 참여율로 환산한다면, 이번 영화제는 분명 기적 같은 업적을 이루어냈다, 라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이만큼 키운 건, 영화제쪽에서도 누누이 언급하듯, 관객들의 들끓는 열정 덕분이니까. 영화 하나 보기 위해, 밤새 노숙하며 줄을 선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피곤함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영화 앞에서 쓰러지겠다는 그 의지들. 실제로 수많은 영화들이 관객들의 이러한 마음가짐 덕택에 매진 행렬에 이르렀을 것이다. 사람들은 마치 육신의 무거움을 인내하며 영화를 보는 고행자처럼, 남포동과 해운대와 극장을 순례했다.

진지한 감독들의 수다, 이 곳은 활화산

영화 상영 뒤 이루어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도 그들은 열심히 듣고 열심히 찍고 열심히 질문했다. 폴란드의 거장 크시슈토프 자누시가 넌지시 말했듯, 제작비에만 줄곧 관심을 표하는 미국 관객들에 비해 이곳의 관객들은 이 진지한 감독들에게 어떤 빛줄기를 선사했을지도 모른다. 이 감독들은, 적어도 내가 목격한 바로는, 진중한 대화의 기회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예컨대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소피숄의 마지막 날들>(Sophie Scholl-The Final Days)의 감독은 마치 영화 전체를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듯, 혹은 관객들의 열렬한 반응에 도취된 듯, 영화 상영 뒤에도 지나치게 말이 많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분명 성실한 감독의 자세임이 틀림없었으나, 일종의 안쓰러운 연민을 자아냈다. 그건 하루 네편의 영화를 관람하는 열정으로 핏기가 사라진 관객들의 얼굴과 초점 없는 눈동자 앞에서, 이 유명한 감독들의 존재가 오히려 초라하게 느껴진 순간이기도 했다.

드넓은 바다를 앞에 둔 해운대쪽은 그나마 한산한 편이었다. 사람들은 모래사장으로, 극장으로, 파도가 바라다보이는 횟집으로, 그리고 몇년 전에 비해 월등히 높게 솟은 수많은 호텔과 모텔들로 흩어질 수 있었을 테니. 그러나 남포동은 언제나 인산인해였다. 대영시네마와 부산극장 사이에 설치된 야외무대는 마치 모두가 우러러보는 천국처럼 그 위에 아름다운 배우들을 세우고 관객들을 굽어보았다. 소녀들의 환호성과 노인들의 신기해하는 눈빛과 아빠 어깨 위에 올라탄 아이들의 호기심이 뒤섞여, 남포동은 종종 시장통이 되었다. 영화를 보기 위해 인파를 뚫을라치면, 압사의 공포와 전경들의 불쾌한 손길과 함께 장장 5분 이상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사람들의 무리를 마침내 무사히 통과한 뒤 전쟁통 피난민 같은 몰골로 정신을 차리니, 영화는 간발의 차이로 이미 시작한 뒤. 때가 때였던 만큼, 그 압사의 공포와 영화를 놓친 서러움이 밀려오는데, 다음 영화까지 남은 긴 시간, 남포동 어디서도 쉴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 결코 알 수 없는 사람들의 긴 줄과 고막을 찢을 듯한 자원봉사자들의 확성기 소리, 그리고 아무짝에도 필요 없을 듯한 수천장의 광고지 쓰레기들. 영화제를 향한 관객들의 뜨거운 숨결과 화려한 스타들과 스타를 향한 일시적인 선망이 충돌하고 혼란하게 뒤섞였다. 남포동은 열정의 활화산처럼, 카오스 그 자체, 과잉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잉의 에너지가 영화제를 감싸안지 않았던들, 동네 극장에서 홀로 영화를 보는 것과 뭐가 달랐겠는가. 인파 속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걸어가던 허우샤오셴, 산소호흡기를 끼고 낄낄거리던 스즈키 세이준을 발견했을 때의 충만한 감동을 어디 느낄 수나 있었겠는가. 이 반짝이는 거장들과 영화 마니아들 틈새에서 강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중년 남녀들이 영화 스케줄표와 씨름하다 결국, “(영화제와 무관하게 개봉한) <너는 내 운명> 주이소”라며 슬쩍 웃는다. 그들은 영화제의 산만한 분위기, 축제의 현장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이 엉뚱한 순간에, 부산영화제와 함께, 영화와 함께 살아나가는 법을 터득한 사람들을 보았다. 택시 운전사도, 횟집 주인도, 부산 시민들도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은 모두 영화제를 자신의 일부로 체화하고 있었다. 1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영화제는 전통이 되었고 일상이 되었고 자부심이 되었고 생존 수단이 되었다. 이 자연스러운 변화를 진지하게 관찰하다 보면, 수많은 영화들을 만나는 기쁨으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나의 감수성을 건드리는 저 광장의 무례한 인파는 이해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자부심, 생존, 부산시민… 찬란한 PPP여!

무엇보다 남포동의 시끄러움을 상쇄해줄 순간들이 있었으니, 그건 낯선 이름들의 발견이 가져다준 예상치 못한 행복의 순간들이다. 거장들의 귀환, 혹은 세계 영화제에서 이미 인정받은 영화들의 방문보다 감동적이었던 건, 약간 과장을 덧붙이자면, 거장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분명 ‘무언가’가 되어 돌아온 새로운 감독들의 영화였다. 이를테면 현실을 지우고 관념의 지루함으로 승부하려는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신작 <섹스와 철학>(Sex and Philosophy>보다, ‘새로운 물결’에 초청된 시에동의 푸릇푸릇한 <그대와 함께한 여름>(One summer with you)을 보는 경험이 훨씬 행복했다는 사실. 2001년 부산영화제 PPP 프로젝트였던 이 작품이 4년 만에 완성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부산영화제에는 자신이 발견한 영화가 찬란한 모습으로 재탄생한 순간의 기쁨을 누릴 자격이 충분히 있어 보였다. 그리하여 10년째를 맞이한 이 영화제에서 가장 흥미롭고 감동적인 순간은 바로 이것. 새로운 상상력에 대한 탐구와 발견과 지원. 거장들에 대한 예우와 더불어, 바로 이러한 도전정신과 소통의 의지가 부산영화제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으며, 영원한 샘물이 될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가슴을 울렸다.

10주년이라고 별다를 게 있나, 영화제란 자고로 훌륭한 작품들만 있으면 그만이지, 라는 생각을 하며 서울을 떠났다. 그런데 부산을 떠난 지금, 자꾸 떠오르는 건, 목에 ‘시네필’이라는 아이디 카드를 하나씩 걸고(기자들이나 평론가들의 도도한 아이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하나같이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던 젊은이들이다. ‘시네필’이라는 모호한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약간은 오버하던 이들. 나는 이들에게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거창한 10주년 부산영화제를 다녀오며, 수많은 인파를 견뎌내며 내게 남은 이미지, 혹은 미래의 어떤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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