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타이·베트남 여성들의 한국 결혼생활을 담은 추석 특집물 두 편
쇼가 감추고 드라마가 까발린 전근대적 가족상과 그녀들의 슬픈 고립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농촌뿐 아니라 웬만한 도시 거리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수막이다. 밑의 글들도 대동소이하다. ‘초혼, 재혼, 장애인도 가능. 연령 제한 없이 누구나 가능. 만남에서 결혼까지 7일.’ 현수막만이 아니다. 보이는 대로 현실이다. 통계청 발표(2005년 6월27일)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혼인 건수 31만944건 중 한국 남자가 외국인 여자와 국제결혼을 한 건수는 2만5594건으로 8.2% 비율이다. 이 중 농어업에 종사하는 남자의 혼인 건수는 6629건인데 이 가운데 외국 여성과 결혼한 건수는 1814건이었다. 27.4%의 비율이다. 농어촌 결혼의 4건 중 1건이 넘게 국제결혼인 셈이다. 농촌으로 시집온 외국 여성은 국적별로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이 각각 879명과 560명, 195명으로 전체의 90.0%를 차지했다. 지역별로는 전남이 269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은 경북, 충남, 경기, 전북, 경남… 제일 끝이 서울 33명 순이다.
10년동안 친정에 못간 필리핀 며느리
광고
몇년 사이 급격하게 변한 풍속도를 TV 또한 비켜갈 수 없다. 그것도 10년 전에 한번 등장한 아주 예외적인 ‘외국인 며느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1996년 한국방송에서 방영한 <며느리 삼국지>는 한·중·일 3국 며느리의 문화 풍습을 보여주고 그 차이에서 비롯되는 상황을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트콤이었다. 2005년 한국 TV에서 외국인 며느리는 ‘코미디’로 승화하기 어려운, 극화마저도 어려워 보이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 외국인 며느리를 대상으로 ‘주부가요왕’을 뽑은 <도전! 주부가요스타>(9월2, 10일)도 있었지만 추석 연휴에는 본격적으로 외국인 며느리가 등장했다.
추석날 저녁 7시에 방송된 <친정길 프로젝트 다녀오겠습니다>(한국방송1TV)는 농촌으로 시집온 며느리를 고향 ‘나라’(그 먼 마을)에 보내주었다. 두명의 며느리 가족을 초대해서는 그들이 겨뤄서 우승하는 팀이 고향으로 가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나온 필리핀과 타이 며느리는 한국에 온 지 각각 만 10년, 7년 됐다. 영덕에 시집온 필리핀 여성은 5명의 아이를 낳았다. 이게 경북 최대 출산이었다. 그래서 지역신문에는 ‘대문짝만 하게’ 나기도 했다. 시어머니가 아들을 바라서라고 한다. 타이 여성의 남편은 장애 5급 판정을 받아서 그가 오랫동안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한국말은 ‘외국어’다. 그런데 그들의 삶과 비애를 함께 안고 가려는 이 프로그램이 정작 묻지 않은 게 있었다. 상품으로 내걸렸지만 직접 그 이유를 타박하지 못했다. 며느리들은 왜 긴 세월 동안 한번도 친정길을 밟아보지 못했을까. 어머니 세대보다도 더 심한 시집살이가 아닌가. 시집간 농촌 집의 생활도 어려웠겠지만, 한국에서 며느리로 살기 또한 아주 어려웠을 것 같은 속내를 짐작게 한다.
베트남 종전 30주년 기념 드라마 <하노이 신부>(SBS, 9월19일 오전 10시25분 연속 방송, 박언희 극본, 박경렬 연출)는 베트남 처녀와의 결혼을 다뤘다. 베트남 병원에 파견 나간 박은우(이동욱)는 환자와의 통역을 돕는 베트남 여성 티브(김옥빈)와 사랑에 빠진다. 티브의 언니는 아이만 남기고 베트남을 떠나버린 한국 남자를 겪었다. 언니는 한국 남자들은 다 그렇다며 티브와 은우의 만남을 방해한다. 오해 속에서 1년이 흐른다. 은우에게는 이제 40살이 된 농촌에 사는 형 박석우(이원종)가 있다. 형은 군에서 주선한 베트남 여성과의 맞선 자리에 나간다. 맞선 자리가 영 어색한 석우는 맞선 자리 통역을 맡은 티브의 대담한 제안을 받는다. “한국에 가서 마을도 보고 부모님도 만나고 결혼을 결정하는 거라면 자신도 그 결혼 후보에 끼워달라”는 것. 석우는 티브를 한국에 데려온다.
광고
우연적 만남 등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를 남발하기는 하지만 드라마는 농촌 총각과 외국 처녀의 결혼 실태를 충실하게 재연한다. 40살이 넘도록 결혼을 못한 여러 명의 농촌 총각들, 군에서 주선하는 베트남 처녀와의 맞선 자리, “그날 만나 그날 첫날밤을 치른다”는 속전속결형 맞선 형태 등.
베트남 대졸여성과 <하노이의 신부>
무엇보다 이 드라마에서 베트남 처녀 구하는 현수막처럼 노골적인 것은 이 사회의 계급과 계층이다. 결혼이 원래 계급과 계층의 키를 재는 것이니 노골적일 수밖에 없을 터다. 여기서는 여러 국적, 계층, 남녀를 망라해 학교 성적표처럼 명징하게 줄을 선다. 베트남에서 온 여성이 대학을 나왔다고 하자 동네 주민들은 석우가 못난 결혼을 하려는데 잘됐다고 축하해준다. 그러니 베트남 일반 여성<한국 농촌 노총각<베트남 대졸 여성 순이다. 어머니는 석우가 티브 대신 예전부터 좋아하던 노처녀와 결혼하려고 하자 썩 내켜하지 않는다. 여자쪽에서는 물론 화를 낸다. 하지만 그 노처녀는 어머니가 재취 자리를 주선한다. 정리하자면(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베트남 일반 여성<한국 농촌 노총각<(한국 대졸 노처녀)<베트남 대졸 여성이다. 물론 최고의 자리에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젊은 신랑감이 자리하고 있다.
드라마는 일반인의 마음에 줄 선 그대로 묘사했다. 이번 명절에도 남자들은 안방에서 시체놀이를 하고, 여자들은 부엌에서 분주했을 것이다. 이런 사회적 억압에 이제 더 약한 이들이 들어왔다. 외국인 며느리는 가족이라는 품으로 감싸져 있지만, 이 가족은 변화하는 사회에서 가장 전근대적이다. 외국인 며느리는 한국 내에서 고립되고 제일 외로운 계급이다. 그 수가 점점 더 늘어나는데도 그렇다.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윤석열, 파면 이틀째 ‘관저정치’ 중…“대통령 아니라 집단 보스”
“주가폭락에 퇴직연금 증발 중…트럼프는 골프 중” 부글대는 미국
윤석열, 오늘은 나경원 1시간가량 독대 “고맙다, 수고했다”
‘탄핵 불복’ 이장우 대전시장, 윤석열 파면 뒤 “시민 보호 최선” 돌변
윤석열 파면 직후 대선 승리 다짐한 국힘…“뻔뻔” “해산해야”
이재명, ‘대장동 증인 불출석’ 과태료 처분에 이의 신청
‘윤석열 파면’에 길에서 오열한 김상욱 “4월4일을 국경일로”
“이제 전광훈 처벌을”…탄핵 기각 대비 유서 썼던 목사님의 일갈
기쁨 담아 나부낀 색색깔 깃발들…“이제 사회 대개혁으로”
세계가 놀란 ‘민주주의 열정’, 새로운 도약의 불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