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매가 필요없는 TV 안의 영화제 ‘EBS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 94편
전세계 돌며 상영작 낚아올린 정윤환 프로그래머가 꼽은 필감5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예매도 좌석도 필요 없는 영화제가 온다. 가정용 기구(비디오)를 활용하면 정해진 시간도 필요 없다. 교육방송(EBS)은 8월29일 월요일부터 9월4일 일요일까지 일주일 동안 유아와 어린이 정규 프로그램 시간을 제외(토요일은 유아 시간만, 일요일은 전일 상영)하고는 공중파 송출 시간, 오전 6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를 94편의 다큐멘터리로 채울 예정이다. 지난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크리스틴 초이의 작품 등으로 입소문이 났던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 그 두 번째 자리가 마련되는 것이다. 이번 영화제의 주제는 ‘생명과 평화의 아시아’, 12편이 참여하는 경쟁부문 ‘페스티벌 초이스’에 붙은 부제이기도 하다. 엄선한 31편은 서울시 도곡동 EBS 스페이스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선착순 예약). 전세계 다큐멘터리페스티벌을 돌며 상영작을 찾으러 다닌 정윤환 프로그래머에게 ‘필감5’를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어느 하나 깨물어 아프지 않은 게 없는 작품 중 어렵게 꼽은 다섯 손가락. 상영시간표 등 영화제 소개는 http://www.eidf.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자지구 조삼모사 너무하네
(Checkpoint)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 부문/ 요아프 샤미르/ 이스라엘/ 2003년/ 비디오/ 80분/ 방영시간: 8월31일 밤 11시50분(EBS 스페이스 8월30일 오후 5시40분)
프로그래머 코멘트 “적나라한 팔레스타인의 현실, 팽팽한 긴장감에 화면으로부터 시선을 돌릴 수 없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를 점령한 이후 검문소를 마을과 마을 사이 그리고 마을 안에 설치했다. 이곳을 지나는 팔레스타인인은 모두 “나한테 따지지 마라. 우리는 상관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라고 되뇌는 통과 허가가 고무줄인 ‘인간’ 바리케이드를 지나야 한다. 검문하는 자들의 인간적인 면은 이들에게 잔인하다. 사납게 군 뒤 “저 좀 착하게 보이게 잘 찍어주세요”라고 말하는 자와, 급조한 신분증을 가진 엄마를 아이에게서 떼어내는 자는 같다. 반항심으로 신분증에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브래드 피트, 스티븐 시걸의 얼굴과 이름을 넣은 사람들도 있다. 검문에 항의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설득력이 있다. “테러범인 양 우리를 취급하는데 이 어린애들이 테러범이냐. 진짜 테러범들은 바리케이드로 오지 않는다.” 얼마 전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정착촌과 군 시설이 철수되기 시작됐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걸까?
아이 열셋, 발가락만 닮았지만
(My Flesh and My Blood)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 부문/ 조너선 키시/ 미국/ 2002년/ 비디오/ 83분/ 방영시간: 9월2일 밤 11시50분
프로그래머 코멘트 “힘들다.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삶을 살아내는 사람은 아름답다. 발가락이 닮은 엄마가 들려주는 나의 사랑, 나의 아이들.”
수전 톰에게는 “엄마”라고 부르는 13명의 아이가 있다. 현재는 9명과 살고 있다. 그 아이들은 보통 아이와 많이 다르다. 제니아와 리비는 다리가 잘렸고, 이제 19살이 되는 앤서니는 병균 저항력이 거의 없어 피부가 상처로 마를 날이 없는 ‘이영양성 수포성 표피박리증’을 앓고, 페이스는 어릴 때 얼굴과 팔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겉으로 가장 멀쩡해 보이는 조는 치명적인 말들을 쏟아낸다. 그 속도 편치 못하다. 그는 주의력 결핍 및 과잉행동장애에 섬유성 수포증을 앓고 있다. 수전은 결혼을 하고 아들 둘을 낳았는데 딸도 갖고 싶어 한국에서 에밀리를 입양했고, 뇌수술을 한 딱한 사정의 마가렛을 입양했다. 그러고 나니 5명이나 6명이나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양을 계속했다. 하지만 남편과는 헤어졌다. 현재는 정부 지원금으로 이 많은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영화는 풍이지만 여기에는 내레이션의 폭력이 없다(내레이션은 감정을 중계해서 단 하나의 감정으로 몰아간다). 카메라는 모르는 체하면서 네 계절을 보낸다. 그 중간, 결국 눈을 부릅뜬 채 악담하던 조는 여름을 넘기지 못한다.
황당하고 기괴한 신부 납치 작전
(Bride Kidnapping in Kyrgyzstan)
페스티벌 초이스 부문/ 페트르 롬/ 키르기스스탄/ 2004년/ 비디오/ 51분/ 방영시간: 9월2일 저녁 8시40분(EBS 스페이스 9월2일 오후 5시40분)
프로그래머 코멘트 “인간의 호기심과 도덕적 양심을 끊임없이 저울질하는 작품.”
키르기스스탄은 신부 납치가 일상적인 나라다. 신부 납치를 당해서 눈물의 세월을 보낸 어머니도 정작 그때가 되면 “정 붙이고 살자”주의자가 된다. 가족은 모여서 신부 납치를 모의하고, 양복을 멀쩡하게 입고는 친척 두세명이 몰려가 출근하는 학교에 등교하는 신부를 ‘연행’해온다. 겉보기에는 아주 평화적이다. 납치당한 신부를 친척들이 둘러싸고는 면사포를 씌우려고 한다. 눈물로 지새우고 입히는 옷을 마다하는 것을 친척들은 ‘통과의례’로 여긴다. 그렇게 결혼해 끔찍하게 산 친척 하나가 보내자고 말해보지만 쪽수가 안 된다. 영화는 신부 납치의 여러 가지 유형을 차례대로 보여준다. 학교를 다니다 납치를 당하고는 그대로 눌러앉기도 하고, 남자친구가 있는데도 납치를 당하고, 납치할 신부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던 사람을 납치해버리기도 한다. 결국 못 견뎌 자살하는 경우도 생긴다. 자살한 신부의 아버지는 소송을 제기하지만 거절당한다. 불법이 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3명 중 1명이 신부 납치를 당하고 납치당한 10명 중 2명만이 결혼을 거부할 수 있다. 극적으로 탈출하는 사례 하나는 거의 ‘전사’적이다. 체제내화한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는 것조차도 이 동굴 속에서는 어렵다.
뇌졸중 남편과 여인의 카메라
(Stroke)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부문/ 카타리나 페터스/ 2004년/ 독일/ 111분/ 방영시간: 9월4일 오전 9시30분(EBS 스페이스 8월31일 저녁 9시)
프로그래머 코멘트 “현 위에 퍼지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수줍은 사랑의 세레나데.”
사업을 하던 카타리나 페터스는 카메라를 들며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한다. 그 시절 남편 보리스를 만났다. 한눈에 반한 남편은 자연스럽게 피사체로 들어왔다. 그런데 남편의 삶이 ‘적극적 피사체’의 성격을 띤다. 말하자면 ‘뷰파인더로 들어올 이유가 충분한 극적 삶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카타리나가 경멸하던 ‘상업영화’에 어울리는 삶의 형태로. 촉망받던 첼리스트 보리스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이제 카타리나는 카메라를 동반자처럼 지니고 그의 삶을 보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간곡한 보살핌은 보리스를 살려낸다. 다큐멘터리의 ‘운명’인 극적 삶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본질적으로 캐물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극적 사건 자체에는 의지하지 않는 영화. 사건은 분출하지 않고 조용하다. 정련되고 고운 화면이 심리적 내레이션과 함께한다.
음악가들은 브라질에서 만났다
(Miracle of Candeal)
뮤직 인사이드 다큐멘터리 부문/ 페르난도 트루에바/ 스페인/ 2005년/ 35mm/ 133분/ 방영시간: 9월4일 밤 11시25분(EBS 스페이스 9월1일 저녁 9시)
프로그래머 코멘트 “회색빛 미래, 하지만 음악이 있어 오늘은 행복한 사람들. 빈민가의 흐릿한 일상이 음악으로 투명해진다.”
85살의 베보 발데스는 쿠바 출신으로 스페인에서 오랫동안 피아니스트로서 생활했다. 그는 브라질의 살바도르 데 바이아로 음악 여행을 온다. 그는 쿠바 출신이고 만나는 음악가들은 살바도르에 오래 살았지만, 그들 모두 거기서 오래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모두 아프리카에서 왔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 역시 아프리카로부터 왔다. 음악은 말보다 빠르고 세월보다 스스럼없어서 멀리서 온 그는 자연스럽게 섞여들어간다. 골목에서는 아이들이 공을 차고, 옆 건물에서는 음악 연주가 한창이다. 발데스는 박자를 하나 쳐주고, 음악학교 학생들은 ‘이 할아버지 뭐하나’ 하는 표정이다가 점점 동화된다. 어깨춤도 자연스럽다. 보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흥겹다. 의 음악적 감동에 굶주렸다면 이 다큐멘터리가 비슷한 수위의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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