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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적나라한 통일 영화들이 온다

등록 2005-08-19 00:00 수정 2020-05-03 04:24

<간 큰 가족> <웰컴투 동막골>이 일으킨 특별하고 솔직한 감흥
핵무장과 이순신을 묶은 <천군>에선 강성대국 이루겠다는 망상 드러나

▣ 황진미/ 영화평론가

극장가에도 한반도 평화의 기운이 물씬 풍기고 있다. 최초의 합작 애니메이션 <왕후 심청>의 남북 동시 개봉과 북한 다큐멘터리 <어떤 나라>의 개봉도 앞두고 있다. 그러고 보면 <간 큰 가족> <천군> <웰컴투 동막골> 등 남북의 만남을 그린 영화들이 눈에 띤다. 바야흐로 통일 영화의 시대인가? 속단에 앞서 이들 영화의 정치적 의미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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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 싫다”는 아이 입을 틀어막고…

<간 큰 가족>은 통일에 대한 남한 사람의 의식과 현실을 보여준다. 영화는 북에 가족을 둔 노인의 자식들이 유산 때문에 거짓 통일을 꾸미는 코미디다. 사기극의 판이 점점 커지다가 탄로나고, 진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진다. 영화는 굴곡진 이 과정을 통해 남한 사회의 통일관을 꽤나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첫째, 통일의 당위성을 여전히 민족적(혈연적) 동질성에서 찾으려 하지만, 그러한 당위성은 이미 시효가 다해가고 있다. 김 노인은 죽음에 임박해 끝내 상봉 테이블에 나가지 못하고, 북쪽 가족 역시 당사자는 이미 죽고 없다. 둘째, 이산의 당사자가 아닌 남한 사람들에게 통일은 현실적으로 경제 문제다. 영화 속 3천만원을 투자해서 50억원이 나오는 사업계획처럼, 통일은 미래의 더 큰 수익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돈을 투입해야 하는 일종의 ‘사업’인데, 이익 환수가 계속 지연될 수 있는 ‘장기적이고 험난한 사업’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과거 ‘통일운동’이라는 말 대신 ‘통일사업’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며, 언제나 ‘통일 비용’을 먼저 계산한다. 셋째, 군사적 위협과 적개심이 여전히 상존하지만, 통일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선 ‘평화’를 상연(上演)해야 한다. 영화에서 ‘서해교전’이 터지지만, 차남은 ‘쫑파티’로 눈속임한다. 그 자신도 “이런 놈들과 무슨 통일을 한다구?”라고 중얼거릴 만큼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지니지만 드러내지 않는다. 통일을 위해선 “통일이 싫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아이의 입을 틀어막고, 모두가 ‘통일의 대의’를 믿는 것처럼 상연해야 한다. 넷째, 통일사업은 지극히 남성 중심적으로 이루어진다. 어머니는 통일 자작극이나 실제 상봉에서 소외돼 있으며, 신이는 ‘통일의 꽃’이지만 어떠한 이익도 챙기지 못하는 들러리일 뿐이다. 또한 남쪽의 아버지·남동생이 북쪽의 누이를 만나는 설정은 남한 사회가 북한을 여성으로 성별화해 대상화하려는 혐의를 드러낸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 통일에 관한 모든 담론은 정치적·군사적·경제적·혈통적으로 남성들에게 독점돼 있다. 영화는 ‘남남북녀 만나기’식의 통일론이 지니는 가부장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성격과 한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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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군>은 남북한 공동 핵개발이 성공하지만 강대국의 폐기 압력을 맞고, 이때 남북한 군이 과거로 이동해 이순신을 만나 장군으로 변모시키는 이야기다. 영화는 핵무장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강대국에 의한 좌절을 안타깝게 그린다. 같은 맥락으로 이순신 장군의 애국심과 무훈을 배치한다. 이들이 목숨 걸고 지킨 나라를 위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했냐는 반문은 흡사 ‘장군의 정신을 이어받아 핵무장을 통해 강대국에 맞서자’는 웅변으로 들린다. 핵 무장론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유령> 등에서 이미 다뤄졌지만, <천군>은 여기에 이순신이라는 애국주의적 도상을 끌어들여 주제를 강조한다. 근대 국가주의와 전혀 개념이 다른 충군애국주의의 전쟁 영웅을 끌어들이는 이유가 뭘까? 첫째, 남북이 역사를 공유한 한민족이라는 감상적 민족주의를 강조하기 위해서고, 둘째 남북한에 팽배한 군사주의(군인정신)로 동질감을 얻고자 함이다. (남북한 공히 세계적으로 드문 ‘병영사회’다.) 그러나 감상적 민족주의로 남북이 통일에 합의하고, 군사주의를 통해 ‘강성대국’을 이뤄보겠다는 생각은 망상이다. 20세기 전쟁사에서 보듯이, 민족주의와 군사주의는 반목과 전쟁을 부르는 주문(呪文)일 뿐, 결코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웰컴 투 동막골>은 평화 통일의 메시지를 전한다. 영화는 분단의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촉발된 한국전쟁 속으로 들어간다. 전쟁을 모르는 산촌에서 패퇴하던 인민군, 탈영한 국방군, 추락한 연합군 조종사가 만난다. 그들은 처음에는 서로 총을 겨누지만, 긴장이 고조된 순간 축포처럼 터진 팝콘과, 함께하는 노동과, 멧돼지 사냥이라는 스포츠와, 음식 나눠먹기 등을 통해 마음을 연다.

인민군도 연합군도 ‘평화’로 가요

꽃을 꽂은 여자가 환유하듯, 이념에 물들지 않은 순수 동심의 공간 동막골(아이처럼 막살라는 뜻)에서 평화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물들인다. 다시금 이곳을 짓밟는 연합군이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사람들을 지키고자 총을 든다. 그리고 마을을 폭격하려는 미군에 맞서 ‘남북 연합작전’을 편다. 이들은 흡사 ‘우방보다 민족이 우선’이라는 통일론을 펴는 듯하다. 그러나 무턱대고 ‘반미’를 표상하진 않는다. 그들이 마지막에 조종사를 향후 폭격을 막을 중재자로 남기는 건, 미국의 군사주의에 반대하면서도 평화를 조정하는 국제 사회의 노력을 배척하지 않는 균형감을 보여준다. 외교적 노력으로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현실적 평화통일론을 드러내는 것이다. 남북한을 바라보는 영화의 균형감은 주민들의 굶주림을 먼저 헤아린 북한 장교와 “탁월한 영도력”은 “뭘 많이 먹이는” 데 있다는 촌장의 발언 속에도 녹아 있으며,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논하는 장면에서 일단 남침을 인정하는 것에도 깃들어 있다.

<휘파람 공주> <남남북녀> <동해물과 백두산이> <그녀를 모르면 간첩> 등 분단 문제를 단지 상업적으로 활용한 일련의 영화들이 모두 실패한 반면, 남한 사회 통일에 대한 의식과 현실을 보여준 <간 큰 가족>과 평화 통일의 메시지를 담은 <웰컴투 동막골>은 관객들에게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이쯤 되면 ‘통일 영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더 많은, 더 다양한, 더 심오한 통일 영화가 나오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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