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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태초에 ‘가면’이 있었노라

등록 2005-06-09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연극의 원형 복구 작업에 나선 연극발전연구소의 ‘가면과 사람’ 프로젝트
역설적인 몸의 언어로 ‘언어중심주의’에 치우친 현대극에 새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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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굳게 닫힌 ‘유리성’ 안으로 일단의 허름한 무리가 들이닥치면서 느닷없이 파티가 시작되는 연극 <파티>(6월12일까지, 대학로 열린극장). 한적한 마을에 고가의 캡슐을 짓고 사회적 가면을 쓰고 들어온 김가형 교수 일가는 시골 사람들에게 상대적 빈곤 혹은 억눌린 욕망을 깨닫게 한다. 여기에 ‘화해의 길트기’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나타난 이들은 거칠게 자신을 드러내면서 현대인의 고독한 영혼의 치유자가 되려고 한다. 그럼에도 파티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혼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면과 욕망의 충돌만을 부채질한다. 가면은 ‘카오스모스’(Chaosmos·혼돈 속의 질서) 상태를 만들어낼 것인가.

연극 <파티>에서 재구성된 인간의 욕망

애당초 극작가 윤영선씨가 선보인 연극 <파티>는 인간의 억압받는 욕망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작품이었다. 이것이 가면과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재구성되면서 극중에 가면이 등장하게 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서울문화재단(단장 유인촌)이 유망 예술프로그램을 집중 육성하려고 최장 3년 동안 후원하는 다년간 지원사업으로 연극발전연구소의 ‘가면과 사람’ 프로젝트가 선정하면서 기존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연극 <파티>의 연출을 맡은 연극발전연구소 이기호 소장은 “기존의 <파티>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방법으로 가면과 욕망의 관점에서 파헤쳤다. 극중에도 상징과 은유로서 가면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사실 연극 <파티>를 가면과 욕망의 관점에서 재구성했다고 해서 원작의 흐름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골에 지어놓은 거대한 몸 안에 ‘이드’(id)로서의 동장과 마을 사람들의 자유의지, ‘초자아’(superego)로서의 김가형 가족과 동장의 사회적 가면 등이 끝없이 갈등하는 국면에서 가면과 욕망의 알레고리를 무대화했다는 것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흥미로운 사실은 오브제로 등장하는 가면보다 보이지 않는 가면이 극의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극 <파티>는 현대극이면서도 ‘가면’이라는 코드로 읽었을 때 욕망의 분화가 더욱 실감나게 읽히고 등장인물의 면면이 확실하게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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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가면이 무엇이기에 작품 분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일까. 연극 <파티>에서 시골 식당종업원 역으로 나오는 민경은(극단 노릇바치 단원)씨는 “가면이 등장하면서 작품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회적 가면 속에서 욕망이 억압당하는 모습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고 진단한다. 이는 동일자의 시선과 타자의 시선 사이의 접점을 만들어내는 ‘인터페이스’ 구실을 하는 가면의 속성에서 비롯된다.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문화적 갈등의 당사자들이 치유의 길에 들어서는 것은 가면을 통해 서로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연극 <파티>에서 가면은 전면에 드러나지 않은 채 숨겨져 있을 뿐이다.

국내외 연극사에서 가면은 중추적 구실을 한다. 전통 연극의 역사를 아우르고 있는 게 바로 가면이다. 인간의 탈자아로서 욕망을 부추기며 탄생한 가면은 연극의 역할창조 욕망과 맞닿아 다양한 형식으로 진화를 거듭했다. 그러다 현대에 이르러 무대기술의 발달로 가면의 자리는 갈수록 좁아졌다. 기껏해야 눈에 띄지 않는 역할을 맡거나 이미지로 끼는 정도였다. 이기호 소장은 다년간 지원 프로젝트를 통해 전통과 현대를 잇는 가면의 자리를 만들려고 한다. “요즘 현대연극은 언어 중심주의로 흘러가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몸의 언어로서 가면의 자리가 사라진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로 가면의 연극성을 회복하고 가면을 통한 새로운 연극언어를 발굴하려고 한다.”

하지만 연극의 모태 구실을 한 가면을 현대연극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가면극이 연극의 중추 구실을 했음에도 가면연기에 관한 학술적 연구가 국내에서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가끔 가면연기술 강좌를 한다 해도 프랑스의 현대 연극 사관학교인 자크 르콕 마임학교 강사진 등 해외 연구자에 의존해야 하는 형편이다. 이런 까닭에 연극발전연구소의 ‘가면과 사람’ 프로젝트는 가연연극에 대한 학술적 연구를 주요 과제로 삼아 진행된다. 연극 <파티> 재공연에 가면이 등장한 것도 가면연극에 대한 연구의 일환이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 연구한다

“서양연극은 시작과 중간, 끝의 흐름을 따른다. 이에 견줘 우리의 시간 개념은 끝에서 또 다른 시작이 이뤄진다. 공간의 경우도 외국은 개별적으로 분리됐지만 우리는 텅 빈 공간이 다목적으로 활용된다. 이런 원리에 따라 작품을 가면연극을 만들려고 한다.” 아직까지 ‘가면과 사람’ 프로젝트에 따라 어떤 작품이 탄생할지는 이기호 소장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연구자들이 3주에 한번씩 만나 가면을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 사람들을 만나게 하는 다리를 놓고 있다. 여기에서 혼란스러운 가운데 나름의 질서가 있는 새로운 미학이 탄생할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어쩌면 ‘가면과 사람’ 프로젝트에 따라 제작될 가면연극은 연극의 원형을 복원하는 동시에 연극의 미래를 보여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서양연극에 길든 눈을 정화하면서 우리 정서 안에 숨어 있는 그 무엇인가를 끄집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연극 제작에 각종 기관의 지원을 받는다고 해봐야 1천만원을 넘지 못하는 현실에서 3년 동안 최대 2억여원을 다년간 지원으로 받는 것 자체가 기대를 부풀게 한다. 물론 그것이 이기호 소장에겐 부담이기도 하다. “국내 연극 풍토에서 학술과 창작이 맞물려 진행되는 기회를 얻어 기쁘다. 이 과정을 통해 전혀 새로운 미학을 창출해 관객들 앞에 선보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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