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불가사리’를 쫓아내지 말라

등록 2005-05-25 00:00 수정 2020-05-03 04:24

‘곱창전골’ 밴드로 한국에 아방가르드 음악을 전파한 사토 유기에, 강제로 출국당할 위기에 놓이다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IMAGE1%%]

서울 홍익대 앞 걷고 싶은 거리 끄트머리에 있는 실험가게 ‘요기가’는 꼭꼭 숨어 있다. 적당히 발품을 팔면 아기자기한 패션 잡화들이 촘촘히 진열된 매장에 들어설 수 있다. 여기엔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는 음악을 담은 CD가 한쪽에 있다. 구매자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라서 자신을 한껏 드러내지도 않는다. 만일 누군가 CD에 관심을 보이면 실험가게의 숍매니저 이한주(34)씨는 “다양한 소리와 몸짓으로 끊임없이 무아지경에 빠져들게 하는 불가사의한 공연장이 있다”는 귀띔과 함께 서명용지를 내밀지 모른다. 한 일본인의 국내 입국 금지를 막으려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서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지난 5월4일 서울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사토 유키에라는 일본인에게 300만원의 벌금형과 보름 동안의 말미를 둔 ‘출국 명령’을 내렸다. 그가 한국을 떠나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최근 3년 동안 44번이나 국내에 들어와 30일 이내로 머물며 매달 한두 차례씩 33회에 걸쳐 입장료 1만원씩 받고 공연을 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재범’의 우려가 있는 ‘상습범’이라서 2년 동안 아주 특별한 사유가 아니라면 사증 발급도 제한한다는 추가 조항까지 붙었다. 이쯤 되면 그의 공연이 대단한 돈벌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질 법하다. 하지만 그는 비행기삯은 고사하고 밥값도 되지 않는 입장료(대관료로 지급)를 받고 국내에 아방가르드 음악의 씨앗을 뿌렸을 뿐이다.

도대체 사토 유키에가 누구이기에 쫓기듯 서울을 떠나야 하는 것일까. ‘곱창전골’이 먹을거리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문화적 감수성은 남다를 게 틀림없다. 한 방송 프로그램에 등장해 “문화 국적은 한국”이라고 당당히 말하던 일본인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도 곱창전골이라는 말이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그는 1995년 ‘사토 유키에와 곱창전골’이라는 록밴드를 결성해 국내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일본의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그가 서울로 둥지를 옮긴 것은 우연에 가까웠다. “서울 관광을 왔다가 레코드 가게에서 한국의 60, 70년대 록음악을 만났어요. 한국에 록음악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놀랍게도 한국 록이 남의 음악 같지 않았어요.”

"내 문화 국적은 한국" 신중현이 우상

[%%IMAGE2%%]

사토 유키에의 막힘없는 한국어 실력은 오랜 서울 생활을 짐작케 한다. 서울 관광 뒤 5개월 만에 일본인 5인조 록밴드를 결성할 정도로 그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밴드 멤버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이름을 따서 밴드 이름도 ‘곱창전골’이라 지었다. 이들의 존재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1997년 1월 한국방송 <일요스페셜> ‘신중현과 아름다운 강산’이라는 방송에 도쿄 공연 모습이 방영되면서다. 일본인의 국내 공연을 허용했다면 이들이 훨씬 빨리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방송 출연 3개월 전에 서울 압구정동 라이브 클럽 공연을 시도했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곱창전골은 국내의 인디밴드와 교류를 꾀했다. 황신혜밴드와 어어부밴드 등을 일본으로 초청하거나 황신혜밴드 팬클럽의 초청으로 홍대 앞 ‘푸른굴 양식장’이라는 클럽의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러다 1999년에 발매된 산울림 헌정음반에 <문 좀 열어줘>라는 곡으로 참여해 녹록지 않은 실력을 선보였다. 이것을 계기로 한국어 첫 음반 <안녕하시므니까>(도레미레코드)를 펴내면서 본격적인 국내 활동에 들어갔다. 이 음반에는 사토 유키에의 우상인 신중현과 산울림, 배철수 등의 기존 노래 6곡과 자신들의 신곡 <하나 둘 셋>과 <정보 정키> 2곡을 담았다.

이때 나름대로 음반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사토 유키에가 강제 출국당할 위기는 오지 않았으리라. 음반사와 계약을 연장하면서 ‘연예 비자’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어 첫 음반은 매스컴의 주목을 받아 밴드의 인지도를 높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대신 멤버들의 한국 생활은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개인적 사정으로 멤버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어요. 저는 계속 머물면서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젊은 아티스트들과 친분을 쌓았어요. 거기엔 1990년대 중반 대학생 신분으로 인디밴드를 하다가 그만둔 친구들이 적지 않았어요. 뭔가 같이 하면서 홍대 앞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것이 ‘불가사리’(www.bulgasari.com) 공연을 잉태하게 될 줄은 사토 유키에도 몰랐다. 물론 그것은 그에겐 ‘불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불가사리로 인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 국내 무대에서 멀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한국행을 가로막게 된 불가사리 공연은 ‘SCUM in Seoul’(Small Circle of Unknown Music)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기획해 지난 2003년 2월23일 서울 신촌의 클럽 ‘러시’에서 시작했다. 그야말로 색깔이 제각각인 아티스트가 참여하는 불가사의한 공연이었다. 록이나 재즈 등의 장르를 따지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전통과 현대를 가로지르며 몸짓과 소리, 전자악기와 국악 등이 어우러지는 즉흥무대였다.

불가사의해요, 불가사리!

“일본에는 전위음악 운동이 활발해요. 고 김대환 선생을 비롯해 강태환, 최선배 선생 등도 일본에서 공연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 그런 무대를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어딘가에 숨어 있는 젊은 즉흥음악가를 발견해 함께 무대에 서고 싶었어요.” 록밴드 곱창전골을 홀로 지키며 한국인들을 모아 결성한 인디밴드 ‘마리아나 페라가모 로렌 앤드 허 생큐스’의 멤버 이한주씨는 든든한 동반자였다. 게다가 1980년대 유럽의 아방가르드 음악을 대표하는 알프레드 하르트가 국내에 장기 체류하고 있었다. 이들과 함께 마련한 첫 번째 ‘SCUM in Seoul’은 공연 한 시간 뒤에 취객 두명이 들어오면서 무관객 공연을 간신히 면했다.

[%%IMAGE3%%]

‘SCUM in Seoul’이 10여회 공연을 이어가는 동안 불가사의한 공연은 불가사리라는 이름으로 회자되며 골수팬까지 생겼다. 아예 공연 이름도 불가사리로 바꿨다. 국내의 강민석, 박창수, 있다, 유유미자(재일동포 3세) 등은 물론 사토 유키에가 국제적 인맥을 활용해 외국의 유명 즉흥음악가도 잇따라 무대에 올랐다. 불가사리 공연자 목록엔 일본의 전설적인 프리뮤직 선구자 도요즈미 요시사부로, 영국을 대표하는 목소리의 마술사 필 민톤, 인도의 반수리(대나무 플루트) 연주자 미린드 다테, 오스트레일리아의 퍼포먼스 밴드 토이데스 등이 있다. 사토 유키에는 이들의 관광가이드를 자청해 자비로 국내 무대에 세웠다.

“모르는 게 죄라면 죄니까 출국 명령은 따라야죠. 하지만 2년 동안 불가사리 무대에 오를 수 없다는 게 가슴 아파요. 곱창전골 멤버를 모아 2집을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음반사 계약도 성사 단계여서 연예 비자를 받을 수 있게 됐거든요.” 요즘 사토 유키에보다 국내에 남은 불가사리 멤버들의 걱정이 많다. 일단 사증 발급 제한 조처라도 풀기 위해 법무부 장관에게 보낼 탄원서 서명을 받는 이한주씨는 이렇게 말한다. “잘못이 있다면 법과 제도를 파악하지 못한 우리에게 있죠. 인디의 메카라는 홍대 앞에서 이만큼이라도 아방가르드 음악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은 유키에 형 덕분입니다. 유키에 형은 문화의 다양성을 다시 생각하게 했어요. 유키에 형을 받아주지 못하는 게 우리의 문화 수준이겠지요.”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