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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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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랑스런 시네마테크

등록 2005-04-07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베르톨루치의 절절한 진심이 담긴 68혁명 후일담 영화 <몽상가들></font>

▣ 이성욱/ <씨네21> 기자 lewook@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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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가 공인하는 좌파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을 보러가는 길이 자못 설다. 높은 만족도가 기대돼서가 아니라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몽상가들>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냉혹했다. 프랑스 68혁명과 영화광과 섹스게임을 뒤섞어놓은 모양새가 수작은커녕 태작에 가깝다거나 그가 거장인지조차 의심스럽다는 등 평들이 흉흉했다. 이건 얼마 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쏟아졌던 상찬 일변도와 비교하면 흥미로운 풍경이다. 오래전부터 보수주의자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적 진보 혹은 진보성에 비해 좌파 베르톨루치의 태만 혹은 보수성이 비교된다면 ‘진보성’에 대한 재밌는 보고서가 만들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진보는 진보 혹은 혁명을 외치는 자의 전유물이 될 수 있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몽상가들>은 후일담 영화다. 90년대 쏟아졌던 수많은 후일담 소설이 80년대의 불꽃을 추억하고 회의했던 것처럼 베르톨루치는 영화광으로서 좌파 영화작가의 길을 떼기 시작했던 68혁명 속의 파리, 특히 시네마테크로 돌아가 당시의 공기를 음미한다. 그런데 영화를 감싸고 도는 정서와 기운이 ‘기대’와 달리 사랑스럽고 애교스러웠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만큼 관념적이지도 않고 평생 짊어지고 온 자신의 화두에 대해 나름대로 예쁘게 접어두고 가려는 편지 같았다. 정열적이되 전위적이지 않고, 선언적이되 반성이 곁들인 머뭇거림도 은근히 미소짓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진보적이나 남들과 더불어 진보적이지 않은 요즘 젊은이들과 호흡하려는 안간힘이 느껴졌다. 같은 장면을 놓고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한 공간을 남겨둔 것도 노년의 여유처럼 다가왔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미덕, 그러니까 삶의 구체성에 밀착해 정서의 환기를 불러오는 생생함이 <몽상가들>에는 없지만 대신 한 시대를 어떻게든 정리하고 싶어하는, 절절한 진심이 있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란 구호를 내세웠던 68혁명은 문화혁명이기도 했다. 1968년 2월 프랑스 정부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설립자로 권력이 금지한 영화들조차 서슴없이 상영했던 앙리 랑글루아를 해임하자 문화계를 중심으로 거센 시위가 벌어진다. 68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몽상가들>은 바로 이 장면에서 시작한다.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는 미국인 매튜(마이클 피트)는 시네마테크의 단골손님이어서 랑글루아 해임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리던 날도 어김없이 시네마테크를 찾는다. 매튜는 그곳에서 또 다른 영화광인 프랑스인 남매 테오(루이스 가렐)와 이자벨(에바 그린)을 만나고 친구가 된다. 일란성 쌍둥이인 이 남매는 예술의 정치 참여를 부정하는 시인을 아버지로 두고 있는데 피를 나눈 아버지뿐 아니라 기성 권위를 지독하게 혐오하는 정신적 동지이기도 하다. 부모가 휴가간 사이 남매는 테오를 집으로 초대해 머물게 하고는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거리의 긴장은 날로 높아가지만 영화광인 이들은 문화와 정치에 대한 고담준론을 나누고 고전영화들에 대한 애정을 경쟁적으로 실천한다. 급기야 테오는 영화 제목 맞히기 게임에서 진 테오에게 자신이 보는 앞에서 이자벨과 섹스하라는 벌칙을 내린다. 기성 윤리의 경계선에서 극한적인 위반을 즐기고 허무를 느낄 즈음 문득 집안으로 날아온 시위대의 돌멩이에 정신을 차리고 거리의 젊은이들과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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