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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전한 ‘웰메이드’

등록 2005-02-16 00:00 수정 2020-05-03 04:24

▣<에비에이터>에 스코시지의 통찰력과 디캐프리오의 연기는 없으니…

▣ 김은형 기자/ 한겨레 문화생활부 dmsgud@hani.co.kr

하워드 휴스(1905~76)는 누구보다 화려하게 살다가 누구보다 비참하고 외롭게 죽은 미국의 억만장자이다. 스무살이 되기 전 이미 수백만달러의 상속자가 됐고, 막대한 돈으로 영화를 제작하면서 배우 뺨치는 외모로 당대 최고의 할리우드 여자스타들을 ‘섭렵’했으며, 개인 돈으로 항공사 TWA를 인수하고 스스로가 탁월한 비행사이기도 했지만 종국에는 나선처럼 휘어질 정도로 긴 손톱에 클리넥스 상자를 두 발에 신은 상태로 세상과 유폐되어 죽어간 인물인 그는 삶 자체가 한편의 영화였다. 그러니 그의 삶이 스크린으로 옮겨지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던 셈이다.

휴스의 젊은 시절 일대기를 그린 <에비에이터>를 영화로 구상한 첫 번째 인물은 제작자가 아니라 이 영화에서 하워드 휴스를 연기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였다. 그가 감독으로 <갱스 오브 뉴욕>에서 함께 일한 마틴 스코시즈를 떠올린 것도 자연스러운 순서로 느껴진다. <에비에이터>는 이미 골든글로브에서 주요 부문을 수상했고, 아카데미에도 최다 부문에 후보에 올라 무난한 성공작의 반열에 오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할리우드 스튜디오 전성기 시절의 화려함을 담은 이 작품의 양화(陽畵)에 비해 휴스의 결벽증과 히스테리적인 정신분열, 그로 인한 몰락의 징후를 담은 음화(陰畵)의 완성도는 떨어져 보인다. 한마디로 <에비에이터>는 ‘웰메이드’지만 <좋은 친구들>이나 <성난 황소> 같은 스코시즈의 전작들이 보여줬던 인간의 그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카데미의 최다 부문 후보가 됐을 테지만 말이다.

<에비에이터>는 예닐곱살 꼬마 적인 휴스를 엄마가 씻겨주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콜레라, 말라리아 등 전염병 걱정을 하면서 “너는 안전하지 않아”라고 한마디 엄마가 남긴 말은 평생토록 그에게 굴레처럼 작동한다. 그는 가장 화려한 파티와 가장 유명한 사람들 사이를 거닐면서도 누군가 입을 댔던 잔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쇼비즈니스계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팬들이 환호하는 자리에서는 식은땀을 흘린다. 물론 이 병적 징후는 이 영화에서 불길한 암시일 뿐 조명은 그의 화려하고도 비상했던 삶을 비춘다. 공중전의 배경이 되는 그럴듯한 구름을 잡기 위해 수십대의 카메라와 수십대의 비행기를 대기시켜놓고 하루에도 수만달러씩 까먹으며 첫 영화를 완성한 직후 유성영화가 등장하자 모든 장면을 다시 찍었던 광기에 가까운 열정, 캐서린 헵번과 에바 가드너 등 당대 최고 여배우들과의 로맨스, 공학 전문가들을 압도하는 비행기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두뇌, 목숨을 걸고 직접 시험비행에 나서는 무모한 용기 등이 현란한 카메라 워크에 실린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영화의 초반 자신만만한 풋내기로 할리우드 시스템과 저항하거나 여배우들을 유혹할 때까지만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일그러지는 초상화의 모델이 되는 데는 너무 어리고 역부족으로 보인다. 어머니와 함께 휴스의 일생에서 중요한 두명의 여자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는 캐서린 헵번 역의 케이트 블란쳇 역시 디캐프리오 옆에 서면 격정적인 연인이기보다 마치 이모나 큰누나처럼 느껴져서 아무런 긴장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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