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우리 박물관을 만져보세요

등록 2004-10-28 00:00 수정 2020-05-03 04:23

시각장애아 관람객들을 ‘꿔다논 보릿자루’에서 탈출하게 한 어린이 민속박물관 점자 안내문의 힘



박물관에 가도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았던 시각장애아들을 위해 어린이민속박물관에서 점자 안내책자를 만들었다. 예술가들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국립서울맹학교 6학년 곽남희군은 호기심이 남다르다. 그의 부모는 생후 100일 무렵에 아들의 시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엇을 보여줘도 겨우 형체만을 알아볼 뿐이었다. 보지 못하는 그에게 많은 것을 만지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들이 만질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는 만질 수 있는 것이라면 나무토막 하나에서도 수없이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나무토막 하나에도 질문 퍼부어

꼬마 에디슨이 따로 없었다. 한번 만진 것은 틀림없이 기억했다. 만지고 싶은 게 많다 보니 위험한 물건에까지 손이 닿기 일쑤였다. 때론 손이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럼에도 지금껏 호기심 소년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

그의 호기심은 돌멩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만지고 묻는 것이 그에겐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리라. 그의 교실에 있는 스케치북에는 다양한 그림과 종이접기 작품이 있다. 확대경을 이용해 글자를 겨우 확인하는 그인지라 색종이를 세밀하게 접지는 못한다. 그래도 자신이 만진 것들을 표현한 그림은 그가 세상을 만난 경험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것은 유치원생이 경험한 것에도 미치지 못한다. 만일 그가 더 많은 것들을 만진다면 그림으로 표현할 내용도 훨씬 풍부했을 것이다.

그는 나름대로 세상을 만나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웬만한 놀이기구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탈 수 있고, 널리 알려진 박물관에 대한 기억도 있다. 서울에 있는 철도박물관이나 전쟁박물관, 삼성어린이박물관 등부터 멀리 있는 독립기념관까지 다녀온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박물관 이름뿐이다. 어디에도 그의 손때를 묻힐 수 없었다. 유리장에 갇힌 전시물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선생님의 설명을 띄엄띄엄 듣는 게 전부였다. 어디에서든 그의 눈이 되어주는 엄마 박숙희씨 말대로 “박물관에서 일반인들이 눈으로 보듯, 시각장애인은 눈으로 만져야 한다. 같은 관람요금을 받으면서 차별하면 안 된다.”

그렇게 박물관에서 문화적 소외를 다반사로 당했던 그가 같은 반 친구 고동혁군과 함께 국립민속박물관 부설 어린이민속박물관에 갔다. 사실 이들은 지난 7월에 어린이민속박물관에 갔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인지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별다른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어린이민속박물관은 다른 곳에 비해 만질 수 있는 게 많았고, 사물놀이에 대해 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어린이민속박물관은 ‘보고 만지고 느끼는’ 문화체험 공간을 표방하며 다양한 문화체험을 유도하고 있다. 아무리 다른 어린이박물관에 비해 만질 게 많더라도 그의 호기심을 채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다시 찾은 어린이민속박물관은 전에 갔던 그곳이 아니었다. 체험 중심으로 입장 인원을 제한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이날은 평일인 탓에 미리 관람 예약을 하지 않고 곧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달라진 것은 박물관 안내석에서 곧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시각장애인이라고 말하자 자원봉사자가 두툼한 책자를 건네줬다. 시각장애아용 어린이민속박물관 안내책자였다. 시각장애아용임에도 화려한 색깔과 깔끔한 디자인이 돋보였다. 마치 도서박람회에 선보인 작품처럼 느껴졌다. 안내책자를 받은 두 학생은 겉표지에서 점자를 발견하고 ‘어린이 민속박물관’이라고 또박또박 읽었다.

원색 바탕·입체감 등 세심하게 배려

그것은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수많은 박물관 어디에서도 점자 설명문 하나 찾지 못한 그들이 아니었던가. 그동안 박물관을 가더라도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박물관의 즐거움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여럿이 함께 차량으로 이동하는 재미만 있었을 뿐이다. 일반 학교에 다니다가 맹학교로 옮긴 고군이 띄엄띄엄 점자를 읽는 동안 곽군은 1쪽을 금세 읽어내려 갔다. ‘…국립민속박물관으로 들어가는 문이 나옵니다. 혼자서도 국립민속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고요, 여러분을 도와주는 도우미 선생님의 안내를 받을 수 있어요.’

시각장애아용 안내책자는 단순한 점자 자료가 아니었다. 대개의 점자 도서는 하얀 바탕에 펀칭한 점자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린이민속박물관 안내책자는 바탕색을 원색으로 사용해 저시력 어린이들이 색감을 느끼도록 했고, 다양한 입체감을 넣은 이미지 자료로 실물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했다. 예컨대 집을 소개한 지면에 기와집과 초가집을 그린 뒤 테두리를 넣고 기와와 초가를 촉감으로 느끼게 하는 식이다. 집 옆에 사람 이미지를 넣어 비례를 알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기도 했다. 시각장애아들이 안내책자의 주인이기에 각 장의 배열을 점자·그림·묵자 순으로 배열한 것도 눈에 띄었다.

두 학생이 아트북 수준의 안내책자를 받기까지는 난관도 있었다. 무엇보다 참고자료가 어디에도 없었다. 국내에서 시각장애인용 박물관 안내책자를 발견하지 못한 제작팀은 해외까지 눈을 돌렸지만 쓸 만한 자료가 없었다. 고작 점자도서류의 안내책자가 있었을 뿐이다. 기획·편집진은 본의 아니게 국내 최초라는 때늦은 타이틀을 ‘획득’했기에 부담감이 적을 리 없었다. 무보수로 안내책자를 디자인한 ‘원 오 원 디자인’ 박영훈 대표는 “기본적으로 박물관은 시각적인 공간이다. 시각을 촉각으로 느끼도록 했다. 장애아 혼자서도 관람할 수 있도록 동선에 따라 책자를 배열하고 이미지 자료 하나도 전문가의 자문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렇듯 시각장애인에게 새로운 문화활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어린이민속박물관 안내책자에는 예술가들의 따뜻한 숨결이 깃들여 있다. 바로 시각장애인과 함께 문화활동을 하려는 예술가들이 지난 1997년에 결성한 한국시각장애인예술협회 회원들이다. 이 협회 회원들은 시각장애아들을 위한 미술 워크숍을 진행하고, 우수작들을 전시하는 ‘우리들의 눈’전을 마련하는 등 시각장애인의 문화체험 기회를 넓혀왔다. 지난 6월에는 코엑스 태평양관에서 열린 서울국제북아트전에는 시각장애아들이 점자를 쉽게 습득하도록 하는 점자·촉각아트북을 만들어 전시하기도 했다.

사실 시각장애아용 안내책자 발간은 우연치 않게 시작됐다. 예술협회 회원들이 책자 발간을 ‘우리들의 눈’전에 관심을 보인 김홍남 국립민속박물관장에게 제안하자 흔쾌히 수락한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디자인 작업이 이뤄지기 전에 어린이민속박물관은 인터넷 홈페이지(www.kidsnfm.go.kr)의 콘텐츠에 시각장애아를 위한 음성 서비스를 실시하기도 했다. 한국시각장애인예술협회 부회장으로 안내책자의 발간을 기획한 화가 엄정순씨는 박물관을 시각장애아들이 친구집처럼 이용하길 바란다며 이렇게 말했다. “장애아들의 문화활동은 인생을 좌우하는 경험이 될 수 있다. 문화 공간에 가까이 할 게 없다는 생각을 깨뜨리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예술가들의 숨결… 세상을 체험하거라

국내 최초의 시각장애아용 안내책자로 전시실을 확인한 두 학생은 보이지 않는 공간을 꿰뚫고 있었다. 안내원과 함께 전시실을 찾은 이들은 실물을 확인하려고 바삐 움직였다. 농기구의 쓰임새를 묻고 장독의 덮개를 조심스레 만지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미지 자료로 야외 전시실을 확인한 학생들은 굴렁쇠를 굴리고 팽이를 치려 하고 원두막에 오르기도 했다. 이들이 외곽선이 있는 이미지 자료만으로 전시공간을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너무 점자가 옅었기에. 국내에서 가장 비싼 종이로 알려진 ‘반누보지’도 점자 앞에서 무기력했던 것이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달력 점자지에 인쇄하면 좋은데”라고 말했다. 국내 최초의 시각장애아용 안내책자에 대한 아쉬움은 개정판에서 달래야 한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