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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양연화>와 다르니…

등록 2004-10-15 00:00 수정 2020-05-03 04:23

너무나 궁금했던 왕자웨이의 새 영화 부산에서 만나다

▣ 김은형 기자/ 한겨레 문화생활부 dmsgud@hani.co.kr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 의 표가 예매 시작 4분54초 만에 다 팔렸다는 건 영화제의 인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5년여를 끌어왔으면서도 지난 칸영화제 때 공식시사 몇 시간 전까지 완성된 필름이 도착하지 않아 관계자들을 속태웠던 전력, 칸 상영 뒤에도 추가 촬영과 전면 재편집으로 완전히 새로운 영화가 됐다는 소식은 한국의 많은 왕자웨이 감독 팬을 궁금해 미칠 지경으로 몰아갈 만했다. 오죽하면 평론가 정성일씨는 부산영화제 첫쨋날 데일리에 ‘애타게 을 기다리며’라는 장문의 글을 기고했을까.

왕자웨이 감독, 주연배우 량차오웨이와 4천여 관객이 객석을 메운 가운데 7일 8시 수영만 야외 상영장에서 겹겹으로 싸였던 의 베일이 벗겨졌다. (수영만 바닷가를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장쯔이의 신음 소리를 감상했던 건 단 한번의 야외상영이 줄 수 있는 기이한 관람체험이었다!) 일단 칸에서 날아왔던 정보를 몇 가지 수정하자면 칸 버전에서 한 장면도 등장하지 않아 당시 굳은 얼굴로 극장을 나왔던 장만위가 새 버전에서는 등장한다. 차우(량차오웨이)의 회고 장면 몇개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새 에는 기무라 다쿠야가 왕징웬(왕페이)의 일본인 애인으로 등장하는 것도 변한 점이다.

은 의 속편으로 알려져왔다. 은 유부녀와의 이뤄지지 않은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채 싱가포르로 떠났던 차우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정서와 구조는 와 매우 다르다. 는 한 커플이 사랑에 빠지고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미세한 감정의 굴곡들을 포착하지만 은 여러 등장인물과 과거와 현재, 미래,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복잡한 이야기 속에서 지속적으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허름한 호텔 2046호의 옆방에서 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는 차우. 2046은 에서 수리첸과 남몰래 만나던 호텔방의 호수이기도 하고, 홍콩 반환 5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신문사 일을 때려치우고 통속소설을 쓰면서 화려하고 덧없는 싸구려 파티장을 전전하는 그에게 3명의 여자가 스쳐간다. 2046호에 머물며 차우와 격정적인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바이링(장쯔이), 아버지가 반대하는 일본인 애인 때문에 고민하는 호텔 사장 딸 왕징웬.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싱가포르에서 짤막한 사랑을 나눴던 도박사 수리첸(궁리). “결국 사랑에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라는 차우의 독백처럼 차우와 세 여자의 사랑은 서로 다른 타이밍을 가졌던 탓에 어긋나버린다. 타이밍은 사랑뿐 아니라 삶에서 부정할 수 없는 과거와 견디어야 하는 현재,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도 적용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삶은 낡고 지루한 것이 되며 사랑은 덧없어진다. 그럼에도 사는 건 이 모든 시간의 흔적과 상처들과 대면하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빼어난 스타일리스트답게 화면은 여전히 어지러울 만큼 아름답지만 복잡하고 뒤로 갈수록 뻔한 느낌의 에피소드들이 다소 맥빠지게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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