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다시, 동아시아!]
‘허공비행’ 하는 동아시아 담론의 현주소… 아시아를 알고 지식인 의제에서 벗어나야
|
▣ 김성기/ 문화비평가
“21세기는 동아시아에서! 사상의 눈을 돌려 아시아를 바로 보자!”언제부턴가 자주 들어본 진술일 터이다. 동아시아가 세계사의 중심 무대로 떠오르고 있으며, 매사 서양을 뒤쫓던 눈을 돌려 아시아 속에서 새로운 생각의 뿌리를 찾자는 것이다. 그 중에는 천년 만에 동아시아 시대가 열렸다는 과장법도 있지만, 어쨌건 동아시아론 혹은 동아시아 담론의 바탕에는 사뭇 진취적인 전망이 깔려 있다. 이 시리즈 기획을 통해서도 거듭 확인하듯이 그것은 90년대 이후 우리 지식계의 침체 국면을 돌파하는 대안적 기획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희망의 원리’라고 명명할 수도 있겠다.
한국은 정녕 동아시아에 속하는가
그런데 정말 그것은 희망의 원리일까. 서구 지향적 관점에서 탈피해 아시아를 중심으로 놓고, 혹은 아시아적 시각에서 오늘의 세계를 보고 대안적 세계질서를 상상하고 모색하기. 그리하여 좀더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가꾸고 향유하는 일, 이것만큼 매력적이고 이상적인 시대적 과제는 없으리라.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는 것. 동아시아 담론은 그 ‘어떻게’의 방법론을 모색해왔는데, 그간의 논의를 돌아보면 손에 잡히는 게 별로 없다는 느낌이다. 무성한 논의가 갈수록 허공을 맴도는 공전의 조짐을 보인다. 그렇다면 ‘다시, 동아시아’가 아니라 ‘그만, 동아시아’라는 선언이 더 어울리는 형국은 아닐는지.
왜 이렇게 말하는가. 우리 동아시아 담론은 규범적 성격이 강한 당위론에 머무를 뿐 구체의 현실을 매개로 하는 검증 과정을 소홀히 한다는 판단에서다. ‘동아시아(론)에는 뭔가 특별한 대안이 있다’는 기대감이 지나쳐 ‘있어야 한다’는 강박마저 일으키다 보니, 많은 분석적 설명이 필요한 대목을 그냥 건너뛰거나 봉쇄하고 마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서구 지향의 준거를 탈피해 아시아로 발길을 돌렸는데 그것 역시 고향 땅에 안착하지 못했다고 할까, 여전히 암중모색, 고공비행 중인 것이다. 이 한계, 문제를 제대로 짚지 않으면 동아시아 담론은 한갓 허구적 구성물이 될 공산이 클 뿐만 아니라, 우리 지식계의 대안 제시 능력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나쁜 선례를 추가할지도 모른다. 그래, 동아시아 담론을 등잔불이라고 할 때 그 등잔 밑 그늘에 시선을 돌릴 시점이 아닌가 하는데, 이와 관련해 세 가지 쟁점을 제기하도록 하겠다.
첫째, 한국은 정녕 동아시아에 속하는가. 언뜻 보면 말도 안 되는 물음이다. 하지만 나는 이에 대한 자기 성찰의 결핍이 동아시아 담론의 근본적 한계를 규정한다고 본다. 새삼 동아시아의 지리적 구획 문제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과연 동아시아와 아시아에 대한 진정한 자의식을 갖고 있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일본은 일찍이 ‘탈아입구’의 길을 걸었다, 중국 또한 아시아보다는 서구(미국)에 견주어 자기 인식을 했다 등등의 비판적 인식에 비추어볼 때 더욱 그렇다. 기실 우리 근현대 역시 탈아입구의 길을 (일본에 비해 늦게) 걸었고, 또한 서구 지향의 참조체계를 (중국에 비해 늦게) 형성했을 따름이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에게 동아시아 논의의 대상인 ‘동아시아’는 차라리 ‘없다’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 이게 엄연한 현실이라면 ‘우리’가 동아시아 한·중·일 연대의 주역이라는 주의주장은 그만 자제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른바 ‘자민족 이기주의’를 넘어서자고 하면서 곧바로 그 늪에 빠지는 이 악순환!
‘아시아 연합’은 차라리 망상
둘째, 앞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아시아, 우리 아시아’를 외칠 만큼 아시아를 알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안다’는 말은 만남 혹은 선린교류라고 바꿔 표현해도 좋을 텐데, 어쨌든 이 대목에서도 우리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여타 아시아 지역과 거의 단절 상태에 있었다. 흔히 제국주의의 침략 같은 역사적 경험을 내세워 아시아 지역으로서 공동 유대감을 강조하지만 중요한 건 당대 지역 내부에 생동하는 사회적 네트워크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 점이 너무 미약했다고 보는데, 특히 지적·문화적 차원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때문에 현재 동아시아 담론은 우리가 진정하게 아시아의 성원이 되기 위한 하나의 입사의식으로 그 위상을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렇다고 단순히 학술 차원의 ‘아시아 지역연구’로만 국한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아시아 지역과의 상호 소통과 참조가 가능할 수 있는 지적·문화적 작업이 관건이다. 그들이 한국을 모르는데 무슨 ‘아시아, 우리 아시아’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은 채 혼자서 북 치고 장고 치고 하는 면이 분명 있다.
셋째, 동아시아 담론에 모종의 ‘중국 중심주의’가 스며들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다. 서구의 헤게모니에 정면 도전하겠다는 ‘안티 서구’의 축이 알게 모르게 중국쪽으로 기운다는 말인데, 중국이 세계 경제의 거점으로 급부상하는 현실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는 건 어느 면 선택이 아니라 필수일 수 있다. 하여, 일각에서는 ‘탈미친중’ 노선이란 말까지 공공연히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오늘의 중국이 미국 패권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주요 강대국이란 사실은 분명하지만 ‘21세기 중국이 곧 동아시아 담론에서 상상하는 평화 공존 진보의 전위’라는 식의 ‘중국 대망론’은 상당히 곤란하다. 더불어 리영희의 나 에드거 스노의 같은 저술에서 그려 보인 ‘혁명 중국’에 대한 인식도 재고돼야 한다. 그것은 마오, 대장정, 문화혁명 등으로 요약되는 혁명적 낭만주의의 세계였는데, 그 또한 하나의 신화가 되지 않았는가. 나는 동아시아 담론에서 겨냥하는 진보 기획이 중국혁명의 신화에 이끌려서는 아니 된다는 입장이다. 신화는 신화로 남아야 아름답다. 신화의 역사화는 위험하다.
방금 논의는 동아시아 담론이 ‘희망의 원리’치곤 퍽 허술한 이론적·현실적 지반 위에 서 있음을 가리킨다. 섣부른 낙관과 비관이 교차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지구적 희망의 근거지로서의 새로운 동아시아는 목하 형성 중”이라며 한껏 기대에 부풀다가도 “주변 4강의 충돌 속에서 동아시아론은 참으로 갈 길이 멀다”(최원식, 524호)며 돌연 비감 어린 표정을 짓기도 하는데, 그리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다. 한술 더 떠 한·중·일이 연대하여 ‘유럽연합(EU) 같은 아시아 연합을 만들자’는 제안도 있던데, 이건 무슨 구상이 아니라 차라리 망상이다. 동아시아 담론은 좀더 냉정해져야 한다. 그래서 “현실과 유리된 동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살아 있는 동아시아에 대한 역사적 관심으로 확장해야 한다”(성근제, ‘문제는 관계로서의 동아시아’ 522호)는 주장에 선선히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런 뜻에서 동아시아 담론이 ‘21세기 동북아 시대’라는 국정목표를 성급하게 뒷받침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에게 동아시아 담론은 무엇보다 동아시아, 아시아로의 정체성을 새로 확인하고 다지는 인식론적 갱신의 장이요 이론적 자립의 장이어야 한다. 이같은 작업만도 벅차다. 일본과 중국쪽에서 제출하고 있는 동아시아 담론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한 탓이다. 우리네 동아시아 담론의 주요 과제, 이를테면 ‘아시아적 시각’이라든가 ‘근대의 추구와 극복’이란 것도 일본과 중국의 지식계에서 이미 논구(論究)된 바 있기에, 그네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섭렵하고 대응하는 일이 결코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대중문화에는 시선이 닿지 않는다
끝으로, 우리네 동아시아 담론을 지켜보면서 느낀 건 다분히 지식인 중심의 의제에 치중한다는 점이다. 소비사회의 형성이나 대중문화의 구조변동 같은 주제에는 별로 시선이 가 닿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비근한 예로, ‘한류’를 비롯해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변모 과정은 동아시아 담론의 내용을 좀더 구체화하는 데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할 수 있다. 80년대 중반 일본은 ‘아시아로의 복귀’를 선언하면서 자국의 대중문화 상품을 아시아 지역 곳곳에 퍼트리기 시작했다. 한류의 원조는 사실 일본이다. 그 흐름이 홍콩, 대만, 한국 등으로 이어지면서 아시아 대중문화는 괄목할 성장을 보였는데 일각에서는 이미 ‘할리우드 대중문화에 대한 방파제를 쌓았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아시아 지역의 연대 문제를 생각해보는 것도 동아시아 담론의 당면 과제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