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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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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무나 이기나!

등록 2004-09-16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패전 처리 전문 투수의 상처와 욕망 </font>

▣ 이성욱/ 기자 lewook@cine21.com

세계가 품질을 인정하는 한국 영화, 이 잘나가는 ‘메이저 월드’에서 유독 인기를 누리는 건 마이너들이다. 루저(패배자)들의 씁쓸한 뒷맛을 영화만큼 따뜻하게 포옹해 달콤쌉싸래한 요리로 승화해내는 곳이 한국 어디에 또 있을까. 그 한복판에 선 영화 (각본·감독 김종현)은 이런 의미에서 태생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을 만한 출신성분을 지녔다. 충무로 메이저 중의 메이저라 할 싸이더스가 내놓은 패배자의 영화 은 한국 프로야구 원년에 최소득점, 최소홈런, 최소도루, 최다실점 등의 기록을 ‘독박’ 쓰듯 남겨놓은 삼미 슈퍼스타즈, 그 중에서도 ‘패전 처리 전문’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던 투수 감사용의 실화다.

중학교 때 야구를 시작해 대학에서도 투수로 뛰었지만 감사용은 실업야구 선수가 아닌 평범한 사회인으로 삼미 특수강에 입사해 직장 야구를 즐겼다. 그런 그가 프로야구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건, 공개 오디션을 통하기는 했지만 팀에 좌완투수가 없었다는 배경이 작용해서였다. 영화의 시작은 이때부터다. 따지고 보면, 이미 그의 꿈은 이뤄진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다 진 경기의 뒷마무리가 주업무이긴 했으나 군복 같은 작업복 대신 폼나는 프로야구 유니폼에 전용버스를 타고 다니는 직업인이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감사용의 욕망은, 아니 그 누구라도 예서 족할 수 없다. 그는 화려한 승리를 꿈꾼다. 스타 중의 스타 박철순을 뛰어넘는 투수가 되고 싶어한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감사용이 OB베어스와의 경기에 선발로 등판해 20연승 기록 달성을 눈앞에 둔 박철순과 맞대결을 벌이는 장면이다. 누구나 질 것으로 예상했고, 선수 자신들도 차마 기대하지 못했던 경기. 그러나 감사용의 꿈은 아주 조금씩 현실에 근접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동료들도 감사용의 욕망에 하나둘 전염돼 이상한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그 극적인 순간들을, 감사용의 땀방울 하나하나를 잡아내기 위해 감사용 이상으로 분투한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패배와 역경을 딛고 최후의 순간에 감동적인 승리의 쾌감을 안겨주는 여느 스포츠 영화가 아니다. 칙칙한 쓰레기장에서 흙과 땀으로 뒤범벅돼 실력을 키우던 순간들이 승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쓰라린 과거가 있다고, 그 상처를 치유하고자 아무리 애써도 누구나 승리자가 될 수는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웅변하는 스포츠 리얼리즘이 의 광채인 셈이다.

그렇지만 리얼리즘은 편의적으로 도입된다. 실존인물 감사용은 영화의 절반 정도가 실제와 맞아떨어진다고 했다. 허구의 상당 부분은 감사용의 가족 이야기에 할애된다. 시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는 어머니(김수미), 인생은 한판 승부로 뒤집어질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노름쟁이 형 감삼용, 그리고 푼수덩어리 여동생이 감사용에게 위로와 용기를 건네는 진정한 동지들로 등장한다. 그리고 감사용에게 승리의 꿈 대신 사랑의 꿈을 실현해주는 구장 매표 직원 은아(윤진서)가 그 동지의 대열에 합류한다. 패배 스토리를 감동으로 치환해내는 보완재는 예의 영화적 장치들이다. 끈끈한 가족애와 로맨스. 이 2% 부족해 보이는 건 이런 구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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