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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 ‘쓰리’가 승리했다

등록 2004-08-19 00:00 수정 2020-05-03 04:23

비교적 고른 수위로 공포를 형상화한

▣ 이성욱/ 기자 lewook@cine21.com

박찬욱, 미이케 다카시(일본), 프룻 챈(홍콩)의 파트너십이 김지운, 진가신(홍콩), 논지 니미부트르(타이)의 그것보다 나았다. 물론 결과론이다. 두 번째 호러 옴니버스 는 ‘귀신 없는 호러’라는 것 말고는 감독들을 묶어세운 것이나 제약하는 게 없었다. 간략한 조건으로 편차가 심했던 1편의 단점을 비교적 고른 수위로 바꿔놓았다.

박찬욱 감독의 은 충분히 박찬욱스럽다. 바로크 스타일로 화려하게 세팅된 공간 안에서 온갖 고약스러운 기교를 발휘한다. 카메라의 유려한 움직임은 물론이고 캐릭터와 이야기에 꽂아놓은 잔혹 유머가 딱 그의 스타일이다. 은 영화감독 대 엑스트라라는 1차적 대립 구도로 짜여졌다. 인기 절정의 영화감독 류지호(이병헌)의 집에 그의 작품에 5번 출연했던 엑스트라(임원희)가 침입해 류지호를 고무줄 달린 인형처럼, 그의 아내(강혜정)를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묶어놓고 게임을 시작한다. 엑스트라가 요구하는 건 세 가지. 자신을 감복시킬 만큼 못된 과거를 털어놓거나, 웃기거나, 어디선가 데려온 아이를 죽이거나. 감독이 버벅대는 사이 엑스트라는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아내의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나간다. 2차 대립 구도는 부자 대 빈자라는 계급 속으로 들어간다. 엑스트라가 열받은 건 가난이 대물림되는 현실이 아니라 부자가 가난한 자의 전유물 같았던 착한 심성마저 가져가버리는 데 있다. 3차 대립 구도는 가족 내부로 들어간다. 류지호와 그의 아내가 서로 믿고 사랑하는 게 맞는 걸까, 하는 회의. 44분 동안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연극적 무대를 휘젓는 박찬욱 스타일에 불쾌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이럴 때는 웃고, 이 순간에는 놀라고, 여기선 이런 생각을 한번 하라고 자신감 있게 배치한 그의 ‘오만’이 싫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찬욱의 자신감이 싫으냐 좋으냐는 결국 취향의 문제로 귀착된다.

미이케 다카시와 프룻 챈은 예상을 조금 깬다. 무정부주의적인 기괴한 상상력으로 놀래키던 미이케 다카시는 뜻밖에도 지극히 예술적인 스타일의 몽환적인 호러를 보여준다. 예술적이라 함은 조금 지루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꽤 비범한 영상을 보여준다는 것이기도 하다. 유랑 서커스단에서 활약하던 쌍둥이 자매가 한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면서 생겨나는 비극이다. 질투와 집착이 불러들이는 에로틱한 공포다. 희디흰 눈과 새파랗거나 빨간 색감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프룻 챈은 홍콩의 사회파 예술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굉장히 단조로운 주제를 들고 나왔다. 호러의 단골 손님인 낙태 문제다. 젊음을 되찾고 싶어하는 왕년의 여배우가 정체 불명의 여인이 만드는 만두에 빠져드는 이야기. 그 만두는 낙태된 태아가 주재료다. 오도독오도독 만두를 씹어먹는 소리의 클로즈업이나 재료를 다지는 거대한 칼과 붉그스레한 재료를 반복해서 포착하는 시각의 클로즈업이 소름끼치게 한다.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메워주는 건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의 흘러다니는 듯한 영상이다. 처음에는 두려워하다가 점차 만두에 빠져드는 여인이나 그 만두 제조에 소명의식을 갖고 있는 듯한 여인과 만나는 것도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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