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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자 배달맨, 스파이더맨!

등록 2004-07-08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장난스런 B급취향의 비할리우드 감독이 만든 블록버스터의 매력 </font>

▣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언제부턴가 할리우드의 여름 영화들은 비할리우드적인 감독들의 재능을 속속 빨아들이고 있다. 브라이언 싱어와 이안이 이미 〈X맨〉과 를 만들었고, 크리스토퍼 놀란과 알폰소 쿠아론은 과 의 속편에 뛰어들었으며, 의 폴 그린그래스는 의 속편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시리즈의 샘 레이미. 시리즈로 대표되는 샘 레이미는 고약스런 상상력 사이로 장난스런 유머를 곁들이는 B급 취향의 감독이 아니던가. 시리즈가 기대됐던 건 이런 샘 레이미의 등장 때문이었고, 덕분에 은 스크린에 뛰어든 마블 코믹스 영웅들 가운데 최고의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캐릭터와 내러티브, 디테일에 변화가 일면서 확실히 달라진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 건 8할이 이런 비할리우드적(이었던) 감독들의 취향 때문이다.

샘 레이미적 정서가 대폭 늘어난 는 1편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어 보인다. 1편 제작비의 2배에 이르는 2억1천만달러가 뉴욕 마천루를 누비는 스파이더맨의 공중부양 묘기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기도 했지만, 전반부에 쏟아지는 유머들이 예기치 않은 즐거움을 준다. 비록 이 유머들이 스파이더맨이 성장하면서 겪는 정신적 고통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들이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들의 영웅’ 스파이더맨이 2편에서 처음으로 숨겨진 재능을 발휘하는 건 피자 배달 아르바이트를 어떻게든 유지해보고자 하는 바람에서다. 피자 박스를 한아름 안고 하늘을 붕붕 날아가는 스파이더맨이라니! 그렇지만 끝내 배달 시간을 지키지 못한 그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었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집구석에 들어갈라치면 집세를 재촉하는 그악스러운 주인의 등쌀에 시달려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비상한 과학자의 소질을 가지고 있건만 악당 처리반 노릇을 하느라 툭하면 수업을 빼먹어야 하고, 너무나 사랑하는 메리 제인과의 약속도 이래저래 펑크내기 일쑤다. 피터/스파이더맨는 자신의 일상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영웅의 책임감에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심리적 공황상태를 맞이하고, 이 여파로 거미의 초능력이 사라지기 시작한다(스파이더맨이 잠시 초능력을 잃고 고층 빌딩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야 하는 한심한 순간에 가장 익살맞은 유머가 등장한다. 퀴어 드라마의 인기 캐릭터와 스파이더맨이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벌이는 기묘한 긴장감을 블록버스터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피터가 알록달록한 스파이더맨 의상을 쓰레기통에 처넣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지던 재미는 이후부터 추락세로 반전된다. 어쨌든 그는 다시 영웅으로 부활해야 하니까. 위기에 처한 세계를 구할, 책임감 있는 영웅이 필요하다는 장광설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아마 이것이 블록버스터와 조우한 비할리우드적 정서의 한계가 아닐까. 그래도 가 밉지 않다. 샘 레이미의 살아 있는 호흡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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