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1천명이 소리와 영상으로 서울의 6월9일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프로젝트 ‘한 도시 이야기’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해질 녘 서울 하늘을 내려다본 사람이라면 거대 도시의 야경에 흠뻑 빠져들 만하다. 초고속 개발의 상징들이 도심에 즐비하다. 다채로운 조명과 꼬리를 무는 차량 불빛 등 보석처럼 빛나는 바다를 보는 형상이다. 하지만 차츰 땅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서울의 때묻은 속살이 확연히 드러난다. 전 국토의 0.6%에 지나지 않는 면적에서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도시 문명의 마력에 저당 잡힌 사람들은 가혹한 대가를 감내하며 살아간다. 거리에는 반환경의 잔재가 떠돌고 퇴폐적 환락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으며 사람들 사이에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휘돌고 있다. ‘행정수도’의 자리를 내놓을 날이 다가오는 서울, 지금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10년 전 ‘장편 다큐’ 시도했던 이재용 감독
이제 도시는 단순히 삶의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자본의 논리를 호흡하는 거대한 생명체 구실을 한다. 거리를 배회하던 치열한 시대정신의 자리엔 가벼운 일상의 화두만 난무한다. 어디 하나 마음 붙이고 발을 내려놓을 세상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누구든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고 지나는 행인을 바라본다면 이상한 멜랑콜리한 감성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어디에선가 잠시 멈춰서 바라보는 풍경은 일상의 삽화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으로 보존한다면 언젠가는 기록으로서 가치를 지닌 역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상성이라는 파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속하지만 따지고 보면 시대 현상을 반영하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한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마치 컴퓨터단층촬영처럼 서울의 일상을 단면으로 잘라서 보려는 사람들. 서울이라는 도시를 하루 동안 기록하는 종합영상 프로젝트 ‘한 도시 이야기’의 사연을 들으려면 10년 전(1994년 6월9일)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날 7명의 젊은 영화감독을 중심으로 700여명의 참가자들은 새벽 5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서울의 다양한 모습을 35mm 카메라와 이엔지 카메라, 비디오 카메라 등에 담았다. 극장 개봉을 목표로 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사진작가들은 서로 다른 눈으로 서울의 일상을 담았고, 미술가들이 오브제에 서울을 새기면서 다양한 일상을 ‘채집’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서울을 기록하고 모아 서울의 이미지로 남기려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의 기억을 다큐멘터리에 담으려던 프로젝트는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 700여명의 인원이 기록한 다큐멘터리 는 편집 단계에서 중단되고 말았던 것이다. 문제는 후반작업에 필요한 돈이었다. 서울의 하루를 담은 15만자에 이르는 35mm 영화필름과 스틸사진 6만8천여컷은 이재용 감독(영화 )에게 유물로 남겨졌다. 가편집 상태의 필름은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한 타임캡슐에 들어가기도 했다. 혼자만의 기록영화를 기획하다 여러 사람의 다양한 관점을 ‘콜라주’하려던 이 감독의 애초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 작업은 국내의 35mm 영화계에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다큐멘터리 장르에 도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시간을 초월한 종합예술 프로젝트로 뿌리내리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0년 전 서울의 기록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훨씬 전으로 디카, 폰카 등 디지털 매체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시절, 서울의 기록은 수작업에 가까웠다. 참여자들은 유선전화와 호출기로 연락하여 서로의 작업 내용을 확인하며 사람과 음식, 돈, 자동차 등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것은 고스란히 서울의 기록이 되어 ‘한 도시 이야기 9404’의 산파 구실을 했다. 다빈치출판사 김장호 주간은 ‘기억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서울의 기록을 평가한다. “사람들은 일상 현상을 기억하게 마련이다. 기록되지 않은 자기 기억을 장기적으로 보존하기는 어렵다. ‘한 도시 이야기’는 뇌에 갇힌 공간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기 기록하는 것으로 기억을 풍요롭게 한다. 다양한 시각의 기억으로 공간을 넓고 깊게 볼 수도 있다.”
디지털 기술에 힘입은 ‘한 도시 이야기’는 진화된 모습으로 대중을 자극했다. 10주년을 기념한 이번 프로젝트는 두개의 이벤트로 현실화됐다. 하나는 10년 전의 동영상·사진 자료를 서울 대학로 문예진흥원 마로니에 미술관에 전시하는 것이었다. 전기기간 동안 마로니에 미술관은 불법 현수막으로 덮여 있었다. 서울이 거대한 포장에 싸인 모습을 합법적 현수막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울긋불긋한 벽지가 붙어 있는 전시실은 촌스러운 서울을 상징했고, 창고에 있던 재활용 가구가 곳곳에 버틴 모습은 재활용 가구 같은 서울을 떠올리게 했다. 10년 전의 서울을 담은 310여장의 사진 속에는 ‘연탄가스 배출구’ ‘엘리베이터 도우미’처럼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풍경도 적지 않았다. 동영상 인터뷰에 응했던 300여명의 모습엔 ‘그때 그 시절’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누구나 역사 기록자”… 8월경 전시 예정
다른 하나는 2004년 6월9일 하루 동안 서울에서 기록하는 것. ‘아무나 아무거나 아무렇게나’ 기록하면 그만이었다. 서울‘을’ 찍는 게 아니기에 서울의 상징물을 담을 이유도 없었다. 서울‘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을 맘대로 찍으면 되는 것이었다. 빔 벤더스가 도쿄를, 페데리코 펠리니가 로마를, 우디 앨런·장 뤼크 고다르 등이 파리를 찍었던 것처럼 누구나가 예술가가 되어 저마다의 서울을 담아내는 데 인터넷(www.handosi.com)으로 참여한 일반인이 1천명을 웃돌았다. 서울은 어디든 카메라만 들이대면 ‘작품’이 되고, 그것이 모이면 거대한 ‘아카이브’(영상자료실)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참가자들은 자기 완결성을 갖는 분량(동영상 5분 이내, 스틸사진 10장 안팎)의 작품을 온라인으로 제출할 예정이다.
“서울에 관한 ‘한 도시 이야기’를 10년 주기로 진행하면서 서울을 제외한 도시를 다룬 ‘한 도시 빼고 이야기’나 서울과 평양에 관한 ‘한 나라 두 도시 이야기’도 언젠가는 하고 싶다. 두 도시의 주민이 육로로 이동해 서울 사람은 평양에서, 평양 사람은 서울에서 찍는 것이다.” 이재용 감독은 10년 전의 일상적 기록이 역사가 되는 것을 실감했다. 누구나 예술가가 되고 역사 기록자가 되는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일상의 편린 속에서 서울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다시 10년 뒤를 기약하고 있다. 지난 6월9일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8월쯤 열리는 ‘한 도시 이야기 9404’전에서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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