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캠피온의 혼란과 상투성을 노출한 매혹의 에로틱 스릴러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
수잔나 무어의 4번째 소설 을 읽고 제인 캠피온은 주인공 프래니에게 매혹됐지만 자신의 영화 주인공으로 초대하는 것에 대해선 꽤 오래도록 망설였다. 위험한 도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과 작가주의 영화의 조화를 성공적으로 개척해온 캠피온에게 ‘에로틱 스릴러’라는 장르는 자칫 명백한 함정이 되기 십상이다. 자신의 개성이 탄탄한 장르의 관습에 포획돼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험 말이다. 게다가 지적인 여자 교수가 터프한 남성 형사의 훈련된 손과 혀에 이끌려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아슬아슬한 성적 유희에 빠져든다는 구도는 더욱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캠피온은 그래서 더 도전하고 싶은 욕망에 이끌린 게 아닐까. 주류화된 장르의 세계로 뛰어들어 자신만의 발화점을 찾아내 멋지게 보여주겠다는.
영문학을 가르치는 프래니(멕 라이언)는 외설 범벅의 흑인 비속어를 수집하려 제자를 만난 바에서 목격자가 된다. 음침한 지하에서 오럴섹스에 빠져 있는 손목 문신의 남자와 파란 손톱의 여자. 프래니는 흠칫 놀라지만 꼼짝 못하고 얼어붙은 채 관음에 빠져든다. 그림자에 가려진 남자의 눈이 프래니를 응시한다. 목격자에게 어김없이 형사가 찾아온다. 말로이 형사는 여자의 목이 잘려나간 사건을 탐문하다 프래니를 만난다. 말로이를 만난 프래니의 몸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프래니는 말로이와 흥건한 정사에 젖어버리지만 뒤늦게 발견한 말로이의 손목 문신이 경고 신호를 보낸다. 네가 욕망하는 그가 연쇄 살인범일 수 있다고. 동시에 하얀 눈과 빙판 위에서 운명적이고 로맨틱한 만남을 가졌던 부모에 대한 기억은 점차 핏빛 악몽으로 바뀐다. 의심스런 말로이 형사와 더욱 친밀해지는 순간, 그의 유일한 혈육이 연쇄살인의 표적이 된다.
말로이가 정말 살인범일까? 주관적인 결론부터 말한다면, 캠피온은 매혹적인 스타일로 장르 영화를 매끈하게 만들어내는 솜씨는 탁월했으나 여성적 정체성의 탐사라는 일관된 화두에 대해선 변죽만 울리고 말았다. 면도칼로 여인의 목을 그어버리는 연쇄살인의 처참함에 덧입은 빼어난 스타일은 신경줄이 곤두서는 긴장감을 지속시키지만 ‘스케이트장 신’으로 대표되는 감독의 경고성 메시지는 상투적이다. 그 목소리가 제인 캠피온의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여성의 성욕도 의심의 여지 없는 실존이니 그 욕망을 흘러가는 대로 놔둘 일이나 한 가지 덫만은 피하라고 한다. 섹스와 연애의 쾌감을 굳이 결혼으로 제도화하려는 욕망 말이다. 성적 욕망을 제도화하려 할 때, 그녀들은 남성들로부터 끔찍한 죽임을 당한다.
가정을 배신하고 섹스에 탐닉한 대가로 죽음을 맞이하는 보통의 에로틱 스릴러와는 반대다. 가정을 만드는 과정으로 섹스에 빠져들 때 죽음이 어른거린다. 이건 익숙해서 재미없는 설교다. 의 매력은 로맨틱 드라마의 상징 같은 멕 라이언에게 있다. 멕 라이언은 섹스와 죽음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며 그간의 이미지를 위반한다. 주인공 프래니가 원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 사이의 혼재는 멕 라이언의 실재처럼, 제인 캠피온의 실재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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