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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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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예술가냐 제비냐

등록 2004-04-08 00:00 수정 2020-05-03 04:23

사교춤 고수들에게 사사하고 카바레에 간 남자이야기

김은형 기자/ 한겨레 문화부 dmsgud@hani.co.kr

이제는 춤 영화의 고전이 된 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까지 춤은 스크린이 변덕 부리지 않고 좋아해온 몇 안 되는 소재 가운데 하나다. 고전 발레에서 힙합 댄스까지 장르야 다양하지만 영화가 춤을 다뤄온 방식은 대체로 단순하다. 춤을 통해 성공을 향한 주인공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성취, 그리고 어깨를 움찔거리게 만드는 눈부신 동작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것이다. 큰 범주에서 춤 영화들은 도전과 성취라는 스포츠 영화 안에 들어 있는 셈이다.

정작 춤을 추는 사람은 스포츠라고 우기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냥 씩 웃고 지나가거나 모질게는 콧방귀를 뀌면서 비아냥거리는 춤이 있다. 댄스스포츠 또는 사교춤이라고 부르는 춤이다. 그렇다면 이 춤을 추는 사람들은 운동선수인가, 예술가인가, 제비인가. 4월9일 개봉하는 은 주인공의 도전과 성취라는 춤 영화의 전형적 플롯에서 벗어나 예술가와 제비 사이에서 균열되는 춤꾼의 이야기를 그린 독특한 춤 영화다. 아무런 재미도, 의욕도 없이 살아가는 대리점 관리사원 풍식(김성재)은 ‘춤선생’을 자임하는 제비인 고교 동창 만수(김수로)로부터 춤을 배운다. 처음에는 내가 제비냐며 거절하던 그가 마지못해 첫 스텝을 밟는 순간 시간은 정지하고 뜨거운 바람 한 자락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다. 춤의 세계를 알아버린 그는 만수의 농간으로 쫄딱 망한 대리점을 미련 없이 떠나 5년 동안 전국을 떠돌며 숨어사는 춤선생들에게 사사한다.

여기까지는 여타 춤 영화와 크게 다른 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풍식이 하산하면서부터 은 다른 길을 간다. 그는 무림의 고수를 꿈꾸었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를 반겨줄 곳은 외로운 중년 부인들이 모이는 카바레밖에 없다는 게 문제였던 것이다. 풍식은 ‘단지 춤을 추었을 뿐인데’, 감동한 부인네들은 그에게 사랑을 느끼고 돈다발을 갖다주며 명실상부한 ‘제비’의 타이틀을 그에게 헌사한다. 풍식은 예술가인가, 제비인가. 풍식은 언제나 자신을 예술가라고 소개하지만 그를 수사하는 여형사 연화(박솔미)에게나 관객에게나 선뜻 한쪽의 깃발을 들기가 쉽지 않다. 처음에는 한사코 돈을 거부했지만 그 돈을 모아 결국 저택까지 마련하는 풍식도 자기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모른다. 세상의 모든 제비가 풍식 같지야 않겠지만 예술가와 제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헤매는 그를 보노라면 이런 이분법적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 법하다.

을 코미디 영화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던 시나리오 작가 박정우가 감독 데뷔작으로 골랐다는 건 의외다. 이 영화는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꽤 진지한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첫 연출작으로 무난하다는 평을 받을 만하지만 풍식의 단순하지 않은 춤 인생을 그리는 시선에서 보는 이의 가슴까지 후벼파는 깊이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아쉽다. 그래서일까? 춤에 대한 열정은커녕 오로지 여자를 등쳐 인생역전하겠다는 생각으로 춤을 췄던 10년 전 텔레비전 드라마 의 제비 홍식(한석규)의 비극적 최후가 도리어 머릿속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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