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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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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와 놀게 하라!

등록 2000-10-10 00:00 수정 2020-05-02 04:21

극단으로 치닫는 조기교육 열풍… 아이의 능력계발을 위해 올바른 방법부터 고민해야

“How are you?”

“…….…….”

오랜만에 친구 집에 놀러간 주부 박아무개(38·서울 마포구 서교동)씨는 어리둥절했다. 둘째딸 은아(5)와 같은 또래인 친구의 아이가 느닷없이 영어로 인사를 건넨 것이다. 1시간 남짓 친구 집에 머물며 박씨는 사과를 ‘애플’(apple)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하는 친구의 딸을 멍하니 지켜봤다. 친구는 한달 전부터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영어학원에 딸아이를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유아반도 한참 기다렸다 등록했다”는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초등학교 2학년인 큰딸 은지(9)도 영어학원에 보내지 않고 있는데…. 차마 입 밖으로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박씨는 “주위에서 4, 5살 때부터 과외를 시킨다는 말을 듣고부터는 우리 아이만 뒤처지고 있지 않은지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영어학원 수강이 하늘의 별따기?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 영어 조기교육 열풍에 휩싸여 있다. ‘내 자식한테만은 영어 스트레스를 물려주지 않겠다.’ 지난 97년 초등학교 영어교육이 시행된 이후 서서히 불어닥친 바람이 요즘은 걷잡을 수 없다. 초등학생들이 방학 때 영어권 나라로 몇백만원이 드는 어학연수를 떠나거나 처자식을 외국으로 보내고 ‘홀아비’로 지내는 아빠들의 모습도 오래된 풍경이다. 국내에서 어린이들한테 영어를 잘 가르치기로 소문난 학원들도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외국인 강사가 있는 곳은 어린이들이 몰려 발디딜 틈조차 없다.

영국문화원은 7∼13살 어린이를 상대로 수강료 14만5천원을 받고 ‘초등학교 어린이 영어교실’을 열고 있다. 이곳의 강사들은 영어교육자격증(Tesol)과 학사 이상의 학위, 영어교육 경력을 가지고 있는 영국인 또는 미국인으로 1주일에 2차례 1시간씩 수업을 한다. 한반에 13명씩 모두 80개 반이 있어 한 학기에 1040명이 수강할 수 있다. 그런데 1년에 6학기로 나뉘는 학기마다 수강신청을 새로 받지만 수강하고 있는 어린이들이 우선이며, 이들이 빠져나가 자리가 남으면 그 자리를 채우는 방식이다. 또 강의를 들으려면 먼저 인터뷰를 해야 하고, 인터뷰를 한 다음 수강할 수 있는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야 한다. 대기생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영국문화원의 한 관계자는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어린이가 약 2천명이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 기다리는 어린이는 1천여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내년 12월까지 인터뷰 예약이 끝나 지금 신청해도 2002년 1월에야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국내의 이름난 어린이 영어전문학원도 예외가 아니다. 울산의 ㅈ어린이 영어전문학원의 경우에는 “현재 이 과정을 밟고 있는 어린이의 학부모로부터 추천서를 받아야 한다”고 수강할 수 있는 자격을 밝히고 있다. 자식의 영어교육에 다른 학부모의 추천서까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영어교육을 향한 한국 학부모들의 열정을 짐작게 한다.

최근의 영어 조기교육 바람은 갓 우리말을 시작한 유아에까지 미치고 있다. ‘유치원에서 영어교육을 시작하는 것도 이미 늦다. 유아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정도는 그나마 다행이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보모를 구하는 부모들까지 생기고 있다. 아이한테 우리말을 가르칠 때 영어를 함께 가르치는 이들도 있다. 서점가의 여성·유아 코너에서는 자신의 자녀한테 직접 영어교육을 한 엄마들의 경험담을 담은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다. 의 저자이기도 한 어린이영어 전문가 김미영(33)씨는 “어떤 부모는 ‘아이가 한국어를 잊어버릴 정도로 영어를 잘하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한다”며 “우리말보다 영어를 먼저 가르치고 싶어하는 부모들이 있을 정도로 조기 영어교육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고 우려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몇살 때부터 아이한테 영어를 가르쳐야 하나? 영어 동화책을 읽어주어야 하나 아니면 비디오를 틀어주어야 하나? 심지어 임신중에 영어비디오를 보거나 영어책을 읽으며 태교를 하면 효과가 있다는 말도 떠돈다. 태어날 아이가 영어를 잘하기 바라는 예비 부모들도 혼란스럽다.

언제부터 시작해야 하나

영어 태교가 효과가 있을까? 연이산부인과 김창규(세계태아학회 이사) 원장은 “뱃속의 아이한테 영어 조기교육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오히려 태아가 스트레스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임신부가 좋아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는 게 태교의 기본이라는 설명이다. 평소 영어를 사용하거나 영자 신문을 읽는 엄마가 임신중에 그대로 행동한다면 상관없지만 아이를 가졌다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영어공부를 하는 것은 오히려 태아한테 해를 끼친다는 것이다.

태교 문제를 일단 접더라도 외국어는 일찍 배울수록 좋다는 게 일반론이다. 그런데 언제 영어교육을 시킬 것인지 결정할 때 먼저 숙고해야 할 사항이 있다. 자녀가 영어를 모국어처럼 완벽하게 쓰기를 바라는지 아니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잘하기를 바라는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이에 따라 교육 시기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이정민 교수(언어학과)는 “발음이나 억양까지 영어 모국어 사용자처럼 하려면 대체로 5살 정도까지는 시작해야 하고, 13살 이전에 시작해 집중적으로 배우면 유창하고 자연스러운 영어를 할 수 있다”면서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를 넘기면 뜻대로 되지 않고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결정적 시기 이론은 생물학적으로 어떤 기능은 정해진 발달단계에 습득하지 않으면 그뒤에는 그 기능이 바라는 온전하고 정상적인 수준으로 발달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인간의 언어 기능도 특정한 발달단계로 사춘기의 시작인 13살 이전까지가 결정적 시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영어를 유창하게 하려면 13살 이전에 시작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설명이다. 발음이나 문법 등 모든 면에서 영어를 모국어 사용자처럼 잘하려면 7살 이전에 시작해야 한다는 미국의 연구결과도 있다.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를 잘하기를 원한다면 사정이 다르다. 일찍 영어를 시작하지 않았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어릴 때부터 영어를 시작하지 않은 성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미국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16살 이후에 미국에 이민하거나 유학한 한국인과 중국인은 미국인의 70∼80%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개인 차이가 많지만 조금 늦게 시작해도 노력 여하에 따라 학문을 하거나 세계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수준까지 영어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영어교육 시기를 따질 때에는 ‘영어 환경에 노출돼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이 교수는 “학문적인 연구·실험을 종합하면 어려서 외국어를 배우는 게 효과적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힘들다”면서 “그럴 경우에도 외국에서 외국어를 배우거나 상당히 오랜 기간 외국어에 노출돼야 효과가 크다”고 설명한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환경이 마련돼야 발음과 억양, 문법 등을 모국어 사용자처럼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일찍 영어교육을 시작해도 학습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2개 언어를 배울 때 문제는 없을까

영어에 노출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생활하는 일이다. 해외연수도 이런 측면에서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연수 기간과 비용이 문제다.

한솔교육문화원 이영주 과장은 “해외연수는 영어로만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영어 습득에 대한 강한 동기를 부여한다는 장점이 있다”면서도 “해외연수를 하고 돌아와 지속적으로 같은 환경이 마련되지 않으면 효과는 없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3주나 한달 동안의 자녀 해외연수비로 200만∼600만원을 쓸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가진 부모는 소수에 불과하다.

(공저)을 쓴 서현주(31)씨가 유아 영어교육 바람에 일조를 한 이유도 그가 자녀의 해외연수는 생각지도 않은 평범한 주부였기 때문이다. 서씨는 “돈이 있는 집안의 아이가 영어를 잘하는 것이 현실이다”며 “여느 가정에서나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위화감을 조성하는 분위기를 어느 정도 없앤 게 보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생아 때부터 아이들한테 영어와 한국말을 함께 해주었다. 말을 깨칠 때는 우리말과 영어를 함께 가르쳤다. 현재 아들(5)은 3살난 미국인 아이 정도의 영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영어를 우리말과 함께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유아 때 우리말과 영어를 같이 가르치면 아이가 혼란을 일으킨다는 주장과 유아 때도 2개의 언어를 충분히 배울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2가지 언어를 가르칠 때에는 유아가 모국어를 배우는 속도가 느려진다는 게 일반론이다. 서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언어가 자리잡아가는 경우에는 다른 언어에 노출되어도 큰 문제는 없다고 한다. 언어 현상에 민감해지기 때문에 모국어를 잘하기 위해 외국어를 공부하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조차 있다.
영어 조기교육으로 한국과 비슷한 진통을 겪는 일본의 문부성 자문기관인 국어심의회 제3위원회는 지난 5월 ‘국제화시대 일본어교육에 대한 보고서’를 내 “모국어 기초를 다지지 않으면 일상언어를 넘어서는 추상적인 말을 사용하기 곤란해진다”고 지적했다. 추상적 언어능력이나 외국어 습득에 모국어가 기반이 된다는 설명이었다. 보고서는 “조기 외국어학습이 지나치면 모국어도 외국어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될 위험성도 있다”면서 “모국어 습득의 기초적인 틀은 10살 전후까지 완성된다”며 이 나이까지는 모국어 학습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임찬빈 책임연구원도 “우리말과 영어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2개 언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우리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네댓살 이후에 영어를 접하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영어만 잘하면 된다”라는 족쇄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바이링걸(bilingual).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아메리칸.’ 영어 외에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미국인을 비꼬는 미국의 유머다. 하지만 미국인들 스스로도 영어가 언어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어권 나라들도 적절한 외국어 교육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한다.
김미영씨는 “외국인 선생님들이 가끔 아이를 가리키며 ‘쟤는 영어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라고 말하곤 한다”며 “중요한 것은 영어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능력을 키우는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말로 된 책을 읽고 스스로 생각하며 소양을 쌓아야 할 유아들이 ‘영어만 잘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에 희생되고 있음을 외국인 교사들도 안타까워 한다는 설명이다. 한솔교육문화원 장영주 과장은 “엄마들과 상담을 하다보면 엄마들의 생각 속에 아이들이 늘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아이가 즐겁게 영어를 배울 준비가 됐는지는 제쳐두고 어떻게 해야 아이가 영어를 잘할 수 있는지만을 묻는다”고 전했다. 영어는 목적이 아니라 도구이다. 무턱대고 조기 영어교육에 욕심을 부린다면 자녀의 능력을 계발하려는 교육의 목표가 오히려 뒷전으로 밀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

황상철 기자rosebud@hani.co.kr
이민아 기자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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