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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바이러스’ 취급 했다”

38번째 메르스 사망자이자 80번째 환자인 치과의사 김병훈씨 아내,
대한민국 정부,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 세 곳 상대로 소송 중
등록 2020-02-08 16:52 수정 2020-05-03 04:29
인천광역시의료원 음압병동 간호사가 병실 문을 열고 있다. 병실 문은 밖에서만 열 수 있는데 카드를 찍으면 열린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인천광역시의료원 음압병동 간호사가 병실 문을 열고 있다. 병실 문은 밖에서만 열 수 있는데 카드를 찍으면 열린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80번째 환자는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을 방문했다가 다수 전파 환자였던 14번째 환자로부터 감염됐다. 162번째 환자는 2015년 6월11일께 삼성서울병원에서 80번째 환자의 엑스레이 촬영을 하는 과정에 개인 보호장구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코로나바이러스에 노출돼 감염됐다. 162번째 환자는 7월23일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했지만 80번째 환자는 기저질환(악성림프종)이 악화돼 11월25일 숨을 거뒀다. 마지막 80번째 환자의 죽음으로 메르스 사태는 종식됐다.”
2015년 ‘메르스 사태’에서 80번째 환자와 162번째 환자에 대해 보건 당국의 역학조사는 이렇게 담담하게 기록돼 있다. 은 메르스 사태가 종식된 지 4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 기록을 꺼내 들고 피해자들을 다시 만났다. 메르스 사태 피해자들이 2020년 다시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해서다. 무엇이 나아졌는지, 여전히 잘못하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들에게 메르스는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떠난 80번째 환자의 아내는 대한민국 정부,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이라는 대한민국 권력의 세 축을 상대로 제기한 피해보상 소송 1심 선고(2월18일 예정)를 앞두고 있다. 완치 판정을 받고 퇴원한 162번째 환자는 이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정신과 진료를 1년이나 받았지만 여전히 ‘대인기피증’ 등의 증세로 메르스 감염 이전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치료 중 폐에서 뿜어나오는 피가래가 기도를 자꾸 막아 목에 큰 구멍을 내고 ‘기도삽관술’을 한 흔적이 아직 선명하다. 3주에 한 번씩 레이저 치료를 받지만 흉터가 없어지지 않아 치료를 포기할까 고민한다.
메르스 생존자, 사망자 유가족 모두 메르스와 아직 싸우고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잘못됐고, 나아진 것은 없었다.
2020년 2월6일 현재 23명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확진 판정을 받은 상황에서 우리는 궁금해진다, 이 감염 사태가 언제 종식될지. 기사에 등장하는 전문가들은 저마다 전망을 내놓는다.
이 보건 당국이 썼던 메르스 역사(疫史)의 뒤를 이어서 쓰는 이유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다.
바이러스 감염이 없으면 정말 사태는 끝나는 것일까? 바이러스 감염이 멈춰도 감염증을 앓았던 사람들과 그 가족의 아픔이 계속된다면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바이러스뿐일까? 정부가 고쳐야 할 것은 방역망뿐인가? 언론 보도는 무엇이 잘못됐을까?
80번째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감염자였던 김병훈씨는 어렵게 공부해 치과 전문의 자격증을 땄지만 메르스에 감염된 뒤 채 두 달을 일하지 못하고 악성림프종이 악화돼 목숨을 잃었다. 김씨가 생전에 쓰던 치료 도구들. 김진수 기자

80번째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감염자였던 김병훈씨는 어렵게 공부해 치과 전문의 자격증을 땄지만 메르스에 감염된 뒤 채 두 달을 일하지 못하고 악성림프종이 악화돼 목숨을 잃었다. 김씨가 생전에 쓰던 치료 도구들. 김진수 기자

“우리가 맞서 싸운 건 메르스 바이러스가 아니었다. 질병관리본부와 언론을 포함한 한국 사회 전체와 싸웠다.”

메르스 80번째 환자이자 38번째 사망자 김병훈(사망 당시 35살)씨의 아내 배아무개(41)씨는 남편이 메르스로 이름 붙여진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였지만 “남편을 환자가 아닌 ‘바이러스’ 취급을 했다”고 회상했다.

2015년 11월25일 새벽 3시께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3층 39병동 음압병실에서 배씨는 마지막 순간까지 ‘레벨D’ 보호구를 착용하고 남편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두꺼운 보호장갑을 끼고 있어 마지막 체온을 느낄 수도 없었다. 숨을 거둔 김씨는 정부가 지정한 화장터 일정에 맞추기 위해 숨을 거두고도 음압병실에 반나절을 더 머물렀다.

그가 죽자 나온 기사 제목

음압병실은 공기가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병실 기압을 대기압보다 낮춘 공간이다. 김씨는 숨을 거둘 때까지 6개월을 머물렀다. 김씨가 격리병실에 있는데도 질병관리본부는 2015년 7월27일 “마지막 격리자의 격리가 해제됐다”고 발표했다. 이튿날인 7월28일 황교안 국무총리(현 자유한국당 대표)는 “더 이상 메르스 감염을 우려하지 않아도 되니 국민들도 일상생활로 복귀해달라”며 메르스 국내 유행이 사실상 끝났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김씨 부부는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음압실에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음압병실에선 아무것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공기는 밖에서 안으로만 들어왔고, 소식도 밖에서 안으로만 들어왔다. ‘메르스 사태 지속으로 관광객 발길 끊긴다’ ‘메르스 불황’ ‘내수 경제 타격’ 등의 기사를 보면서 김씨 부부는 마치 자신들이 대한민국 경제·사회의 발목을 잡는 원흉인 듯 느꼈다.

악성림프종을 앓았던 김씨는 림프종 관련 검사와 항암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격리병실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시티(CT) 촬영 같은 기본적인 검사를 할 수 없었다. 가족은 병원과 정부에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질병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 격리 상황에 대한 심리적 압박이 더 컸기 때문이다. 배씨는 2월5일 오후 과 한 인터뷰에서 “온 국가가 우리를 이 나라의 발전과 일상을 방해하는 요인으로만 생각하는데 잘못 이야기했다가 얼마나 더 욕먹을지 무서웠다.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한 번만 병실 밖으로 나가 바깥공기를 쐬고 싶다”고 소원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배씨는 “남편의 임종이 다가오는 것을 직감한 뒤로 죽음 그 자체보다 ‘남편이 외출 한 번 못하고 죽을까’ 두려웠는데 결국 남편은 바깥바람을 쐬지 못했다”며 꾹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의 주검은 비닐팩에 몇 겹으로 싸인 뒤에야 음압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장례차에 실려 화장터로 가는 길 위에도 소독약이 뿌려졌다.

[%%IMAGE3%%]악성림프종 완치한 뒤 얼마 안 돼

김씨가 세상을 떠난 뒤 처음 나온 기사 제목은 “마지막 메르스 환자 숨져…6달여 만에 메르스 ‘제로’”였다. 장례를 치르고 뒤늦게 기사를 읽은 배씨는 “사회가 남편의 죽음을 기다려왔던 건가, 남편의 죽음을 환영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팠다”고 했다. 메르스 사태가 종식되면서 공동체는 일상으로 돌아갔으나 배씨의 싸움은 메르스 사태 종식과 동시에 시작됐다.

김씨는 2008년 치과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2010년 치의학대학원에 진학했다. 2013년 치과전문의 자격시험을 준비할 때 속이 좋지 않아서 위장약을 먹으며 공부했던 그는 전문의 자격을 따고 병원에 취업한 지 한 달 만인 2014년 4월께 악성림프종 진단을 받았다. 삼성서울병원에서 자가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고 1년 동안 항암치료로 ‘완전관해(암이 없어짐)’ 판정을 받아 2015년 5월 직장으로 돌아왔다. 복직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고열과 구토 증상이 생겨 5월27일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을 찾아 3일을 대기했다. 이때 같은 병원 응급실을 방문한 ‘다수 전파 환자’인 14번째 환자로부터 메르스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역학조사는 기록하고 있다.

응급실에 환자가 몰려 3일 동안 진료받지 못한 김씨는 진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30일부터는 기침과 황달 증상까지 겹쳐 6월1일 삼성서울병원에서 다시 예약 진료를 받았다. 김씨 부부는 메르스 검사를 받고 싶다고 했지만, 의사는 “메르스 의심환자가 아니기 때문에 메르스 검사를 해줄 수 없다. 림프종 재발이 의심되니 입원하라”고만 말했다. 간호사였던 배씨는 남편에게서 메르스 증상이 보이는데다 네 살 아들이 감염될까 걱정됐다. 병원에 여러 차례 요구한 끝에 검사받았고 6월7일 감염 확진 판정을 받았다.

김씨가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고 격리된 뒤 가족의 삶도 사회에서 격리됐다. 강남구 일원동 집에서 삼성서울병원 안까지 데려다주던 마을버스는 언제부턴가 병원 입구에 승객을 내려줬고, 병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며칠 뒤부터는 병원 입구에도 정차하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메르스 확진환자와 감염 의심자에 대한 대중의 공포는 극으로 치달았다. “남편의 감염 사실을 알리는 순간 이 사회에서 증발해 사라져야 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감염 사실을 절대 알리지 말고 그림자처럼 살아야겠다고 판단했다.”

당시 삼성서울병원은 정식 음압병실이 없어 임시방편으로 공조시스템으로 음압 상태를 만들어 환자를 수용했다. 메르스 사태에 간병인을 구할 수 없어 환자 가족이 보호구를 착용하고 감염 환자를 돌봤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김씨는 재발한 림프종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고 한 달을 대증요법으로 버텼다.

메르스 음성 결과로 음압병실을 나왔지만

7월3일께 서울대병원 음압격리병실로 이송된 김씨는 메르스를 치료하면 림프종 증상이 악화하고, 항암치료를 하면 메르스 바이러스가 살아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메르스 검사 결과가 ‘24시간 간격 두 번 연속 음성’으로 나와야 음압병실을 나와서 림프종 치료를 할 수 있는데 자꾸 검사 결과가 엇갈렸다. 양성과 음성이 번갈아가며 나왔다. 김씨는 “메르스 격리 해제 요건을 충족한다”는 검사 결과를 받아들고 10월3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서울대병원 음압병실에서 입원치료를 받은 지 3개월 만이었다. 하지만 9일 만에 고열 증상으로 병원을 찾았고, 메르스 검사 결과 양성 판정을 받아 다시 서울대병원 음압실에 격리됐다.

중앙메르스관리대책본부는 언론 브리핑에서 “3일 퇴원했던 80번째 환자가 고열 등 메르스 증세를 보여 바이러스 검사를 했고 체내에서 소량의 메르스 바이러스가 검출됐다”며 “(한국에서) 사라졌던 메르스 바이러스가 재검출된 것은 맞지만 메르스 재발로 보긴 어렵다”고 설명했다.

격리병실에 재입원한 뒤 김씨의 상태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하루빨리 격리병실을 나가서 림프종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병원과 보건 당국은 김씨의 격리 해제를 허락하지 않았다. 김씨가 병원을 나갔을 때 접촉해 ‘밀접접촉자’로 분류했던 129명 중에선 추가 감염자가 나오지 않았다. 아내와 가족은 같이 식사하고 한집에서 생활했지만 아무도 감염되지 않았다. 김씨가 메르스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없음을 방증하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배씨는 김씨의 메르스가 완치됐던 것이라 믿고 있다. 서울대병원 의료진은 11월19일께 “세계보건기구(WHO) 전문가들과 토론한 결과 바이러스의 일부 조각이 몸속에 있다가 떨어져 나와 호흡기로 배출돼 유전자 검사에서 확인된 것이라는 해석을 들었고 우리(서울대병원 의료진)도 이에 동의했다”(오명돈 서울대 감염내과 교수)고 설명했다. 또 “지금까지 코로나바이러스 지식을 통해 보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의 감염력은 0에 가깝다”(김남중 서울대 감염내과 교수)고 설명하면서도 김씨 격리는 해제하지 않았다.

감염환자의 격리는 당연한 걸까

대규모 감염병 사태가 발생하면 공동체는 극도의 공포를 느끼며 혼란에 빠진다. 혼란한 틈에 대중은 감염환자의 격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기본권인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범죄자를 구속할 때도 검찰이 영장을 청구하고 법원의 심사를 거치는데 아무런 죄 없이 바이러스에 노출돼 감염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만으로 환자를 격리하는 것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감염 두려움 때문에 김씨의 격리를 해제하지 못했고, 치료하지 못했다.

여론의 요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2014년 세월호 침몰에 이어 2015년 메르스 초동 대처 실패에 분노한 민심은 박근혜 정부로부터 등을 돌렸다. 20%대라는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자 정부는 메르스 확산 방지와 종식 선언에만 관심을 기울였지 감염력 없이도 격리돼 암치료를 받지 못하는 김씨는 안중에 없었다. 메르스 유입 때 밀접접촉자 기준을 ‘2m 이내 1시간 이상 접촉’이라고 잘못 세워 격리해야 할 환자를 제때 격리하지 못했던 정부는 결국 격리를 해제해야 할 환자를 제때 격리 해제하는 데도 실패했다.

남편이 죽은 뒤 배씨는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 치료받아야 했다. 보건복지부 심리위기지원단은 2015년 7월 메르스 감염으로 사망한 환자의 유가족 88명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유가족과 생존자에 대한 심리 지원을 약속했지만, 배씨는 지원받지 못했다. 어떠한 경제적 지원도 받지 못한 배씨는 혼자서 일하고 아이를 키우며 남편의 죽음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까지 준비했다. 상대는 감염병 관리에 실패하고 정보 공개를 지연시킨 대한민국 정부, 병원 내 감염 관리에 실패한 삼성서울병원, 감염병이 치료된 김씨의 격리를 해제하지 않아 암치료를 받지 못하게 한 서울대병원, 세 곳이었다. 배씨는 대한민국 권력의 세 축을 상대하는 소송을 맡겠다고 나서는 변호사가 없어 애를 태워야 했다. “이런 사건 맡으면 세무조사가 들어올 수 있다”거나 “삼성은 우리 주요 고객”이라는 말들이 비수로 날아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사건을 맡겠다고 나서 소송을 제기했지만 진행이 쉽지 않았다. 의무기록을 감정하고 답변을 받느라 재판은 계속 지연됐다. 2016년 6월 제기한 소송의 1심 선고기일이 2월18일이다.

배씨가 이토록 지난한 싸움을 택한 것은 두 가지를 위해서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사과’와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됐지만 여전히 내 남편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한민국 국가와 이 사회로부터 사과받고 남편의 죽음을 인정받고 싶다. 그다음에 남편을 추모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직도 남편의 죽음이 어제 일처럼 생생해 남편의 사진조차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는 배씨는 2015년을 살고 있는 듯 보였다.

“누구나 감염될 수 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이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2020년의 한국은 그때와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이다.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피해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가 횡행한다. 배씨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격리돼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모르는 것 같다. 조금이라도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이 격리돼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국가 방역과 전 국민의 건강을 위해서 우리 남편은 음압실에서 6개월을 갇혀 항암치료도 받지 못하고 죽어갔는데 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국민은 없을 것 같다”고 힘없이 말했다.

배씨는 묻는다. “이렇게 또 바이러스 감염병이 일어났고, 누구든 감염될 수 있다. 당신이 내 남편처럼 격리된 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도 괜찮을까요? 그렇게 죽고도 애도를 받지 못해도 괜찮으신가요?”

이재호 기자 ph@hani.co.kr·조윤영 기자 jyy@hani.co.kr

162번째 환자 이야기


“나는 사과받을 권리가 있다”


“전쟁에서 총상 입고 죽을 뻔한 병사를 모른 척하는 것 같다.”
162번째 메르스 환자인 신재원(38·가명)씨는 삼성서울병원 방사선사다. 2015년 6월11일께 병원에 격리 입원 중이던 고 김병훈씨와 72번째, 135번째, 137번째 감염자의 엑스레이를 촬영하던 중 메르스 바이러스에 노출됐다. 역학조사 내용을 보면 마치 신씨가 부주의로 메르스에 감염된 것처럼 적혔는데, 신씨는 이것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정부는 레벨D 수준의 보호구를 착용하고 메르스 환자를 접촉하도록 권고했지만 병원이 지급하지 않았다. 메르스 감염자의 엑스레이를 찍을 때 얼굴을 다 덮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목과 손 부분은 노출돼 바이러스로부터 완전히 보호되지 않았다.”
당시 삼성서울병원은 정상 진료가 힘들 정도로 참혹했다. 엑스레이를 찍는 방사선사의 30% 정도가 격리 조치돼 출근을 못했고, 나머지 직원이 돌아가면서 격리된 동료들의 업무를 채웠다.
6월11일 메르스 감염에 노출됐던 신씨는 6월14일(일요일) 밤부터 발열 증상이 있었다. 온몸에 기운이 빠져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는, 이튿날 병원에 나와 체온을 쟀는데 39도가 넘었다. 메르스 검사를 받았고, 확진 판정이 나오자 격리 입원됐다.
평소 감기도 잘 걸리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던 신씨는 ‘사이토카인 폭풍’이 나타난 경우였다. 사이토카인 폭풍은 기저질환이 없는 젊은 환자가 바이러스에 감염될 때 면역력이 과도하게 반응해 정상세포를 공격하는 현상이다. 자칫하면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그는 의식을 잃은 채 긴 악몽에 시달렸다. “생생한 악몽을 계속 꿨다. 나는 병원이 아닌 동굴 같은 곳에 묶여 있었고, 괴물 모습을 한 간호사들이 흉기로 나를 찔러 죽였다. 죽었다가 깨면 다시 다른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신씨는 7월5일께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음압병실로 옮겨져 계속 치료받았다. 이때부터 의식이 돌아왔다. 염증이 생긴 폐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래가 계속 나왔다. 의료진은 목에 구멍을 내어 ‘기관절개술’을 했다. 매시간 구멍이 뚫린 목에 튜브를 넣어 석션(기도에 막힌 이물질을 빨아들이는 치료)으로 뽑아내도 피가래는 계속 나왔다. “피가래가 튜브를 막아 질식사할 뻔한 일이 세 번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 빠져 죽는 것처럼 무서웠다. 그 뒤로 잠들면 죽을까 무서워 잠을 잘 수 없었다. 신경안정제를 맞아도 잠이 들지 않고 예민해졌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신씨는 고통스러운 치료를 이기고 38일간의 입원 생활을 마쳤지만, 퇴원한 뒤 1년2개월 동안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감염내과, 피부과, 정형외과 등 7개 진료과에서 계속 진료받았다. 퇴원 한 달 뒤에는 급성 탈모로 치료를 받았다. 2016년 9월께 직장에 복귀했지만, 2017년 봄부터 불안 증세를 보여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진단을 받고 1년 동안 치료받았다. 기관 절개를 위해 구멍을 뚫었던 목에는 큰 흉터가 남았다. “흉터를 지우려고 피부과 치료를 3주에 한 번씩 받지만 흉터가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치료를 포기할까 싶다. 다른 친구들처럼 연애도 하고 싶은데 최근에는 대인기피증까지 나타나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신씨는 두 차례 보건복지부 민원 사이트에 손해배상과 관련해 문의했지만, ‘치료비를 지급했고 피해자에게 따로 보상할 계획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자신이 일하는 병원과는 산업재해 보상보험금 지급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고 있다. 그는 메르스 치료를 받고 퇴원한 지 4년이 됐지만 여전히 싸우고 있다. 신씨는 인터뷰에서 “보호구를 주지 않고 일을 시킨 병원과 대규모 감염병 사태를 초래한 정부로부터 어떤 사과도 받지 못했다. 나는 사과받을 권리가 있다”고 했다.
2016년 12월 신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메르스 체험기를 썼다. 체험기의 첫 문장은 “나는 162번째 메르스 환자였다”로 시작한다. 환자 번호로 글을 시작한 이유를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162라는 환자 번호 뒤에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내 경험을 이야기로 써서 보여주면 사람들이 감염 사실뿐만 아니라 나라는 사람에게도 관심 가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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