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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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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없는 것보다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지역 지키는 청년들 ‘같이’의 가치… 부산 <하트인부산>,

전주 책방 ‘물결서사’, 강릉 공유 업무공간 ‘파도살롱’
등록 2019-12-31 12:56 수정 2020-05-03 04:29
전북 전주의 동네책방 ‘물결서사’를 운영하는 예술가들 서완호, 장근범, 고형숙, 임주아, 최은우씨(왼쪽부터). 박승화 기자

전북 전주의 동네책방 ‘물결서사’를 운영하는 예술가들 서완호, 장근범, 고형숙, 임주아, 최은우씨(왼쪽부터). 박승화 기자

홍성의 박푸른들씨, 진안의 배이슬씨, 화천의 임달래씨, 합천의 김예슬씨, 순천의 신건희씨, 전주의 임주아씨, 강릉의 김지우씨, 남해의 최창혁씨….
지역에 청년이 있습니다. ‘지역 소멸’을 말하는 시대에도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청년들입니다. 삭막한 자본주의에서 탈출해 지역으로 간 이들, 나고 자란 지역을 지키는 청년들. 농사를 짓고 문화공간을 만들고 마을을 기록하고 창업을 합니다. 서울에서도 지역 변화를 모색하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성장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때론 흔들리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합니다. 힘들 때마다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합니다. 자연과 사람의 연결을 귀하게 여기며 ‘같이’의 가치를 만듭니다. 신년호에서 그 지역의 청년 한명 한명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온전히 지역 중심의 이야기입니다. 2020년 ‘지역에서 변화를 꿈꾸는 청년들’ 연중기획은 이어집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젊은데 왜 서울로 안 가노?”

2019년 12월23일 부산에서 만난 김다은(27)씨는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그때마다 말한다. “고향을 떠날 이유가 없었다”라고. “청년들이 지역을 떠나고 지역에는 청년들이 없다고 하잖아요. 이 악순환을 나라도 끊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어요. 누군가는 지역에 남아 이곳을 기록하고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처럼 이런 마음으로 지역을 떠나지 않는 청년들도 있어요.”

‘부심’이 생겼어요

김씨는 ‘부산 이바구(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를 전하는’ 문화계간지 의 편집장이다. 2017년 부산에 있는 청년작가들의 모임 ‘글담’ 회원들과 문화기획자 장혜원씨와 “부산에는 청년들이 즐길 만한 일도, 건강한 문화도 없다”는 대화를 하다가 “부산에 대한 문화매거진을 직접 만들어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 2017년 11월 창간호를 시작으로 지금껏 10권을 펴냈다.

김씨와 더불어 지역 청년 9명의 재능기부로 제작되는 은 160쪽에 음식점이나 관광지 위주의 ‘핫플’(뜨는 장소) 소개보다는 동네, 역사,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러기 위해 청년들은 지역 구석구석을 기록하며 소소한 이야기를 품은 사람들을 만난다. 김두리(32) 에디터는 “내가 이곳에 살면서 지나쳐온 걸 다시 돌아보게 된다”며 “산복도로를 처음 걸어보기도 하고 그곳의 주민을 만나고 그들을 기록하는 사진작가도 만났다”고 말했다. 그들이 지나간 공간은 만난 사람들로 기억된다. 조영인(27) 책임매니저는 “다대포 취재를 할 때 시장으로 가는 골목길이 기억나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은 길이었어요. 그곳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촘촘히 모여 있었어요. ‘아, 이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구나.’ 그 사람들을 만나며 처음 가본 동네에 애정이 생겼어요.”

의 청년들은 “돈 안 되는 일을 만다꼬(왜) 하노?” 하는 질문도 종종 받는다. 그때마다 지역 기록자로서 보람과 기쁨이 떠오른다. 잡지 발행인 역할을 맡은 문화기획자 장혜원(29)씨는 “잡지로 몇몇 관광지만 말고 심지어 우리도 몰랐던 부산을 속속들이 사람들에게 알리게 돼 뿌듯해요”라고 했다. 김 편집장은 더불어 잡지를 만들면서 지역에 대해 알아갈수록 애향심이 더 샘솟는다고 한다. 일명 ‘부심’(부산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 “로컬 콘텐츠는 아직 가공되지 않은 보석과 같아요. 지역에 있는 우리가 그걸 찾고 알리는 게 중요하죠. 거기에 우리만의 색깔을 입히는 일이 과제예요.”

을 만드는 이들은 지역을 기록하는 청년들이다. 그들에게 지역은 떠나야 할 곳이 아니라 살아가고 꿈을 이뤄가는 삶터이다. 이들처럼 지역을 지키는 청년들이 있다. 12월19일 저녁 7시 전북 전주 선미촌. 해가 지고 성매매 업소들이 하나둘 붉은 등을 켰다. 1950년대 형성된 성매매 집결지인 이곳은 도시재생사업으로 문화예술마을로 바뀌고 있다. 이제는 불 꺼진 곳이 많고 20여 곳만이 성매매 영업을 하고 있다. 이곳 한가운데에 문학, 미술 등 예술 관련 서적을 파는 동네책방 ‘물결서사’가 있다.

문화계간지 <하트인부산>을 만드는 김두리, 김다은, 장혜원, 조영인씨(왼쪽부터). 허윤희 기자

문화계간지 <하트인부산>을 만드는 김두리, 김다은, 장혜원, 조영인씨(왼쪽부터). 허윤희 기자

나눔·공유 있는 모두의 책방 ‘물결서사’

임주아(30) 시인, 서완호(37) 작가, 최은우(37) 작가, 장근범(39) 작가 등 전주에서 활동하는 ‘물왕멀’ 청년 예술가 7명이 2019년 1월 책방을 열었다. 시작은 이랬다. 장씨는 2017년 선미촌에서 열린 여성인권 전시를 준비하며 이 책방을 구상했다. 함께할 지역의 예술가들을 찾았다. 그렇게 모인 그들은 전주시에서 임대받아 이곳을 새롭게 꾸몄다. “선미촌에 문화공간이 없었어요. 슈퍼나 세탁소, 미용실 정도 있어요. 소외된 이곳 주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이 되고 싶었어요.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편견을 지우고 싶었어요.” 장씨가 말했다. 책방 한켠에는 공유책방도 마련했다. 주민들이 기증한 책을 누구나 와서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나눔과 공유가 있는 ‘모두의 책방’이 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들은 이곳에 터를 잡고 여기에 사는 주민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발굴했다. 주목받지 못했던 이웃의 삶에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책방 옆집에 사는 만신(여자 무당) 김오순씨를 초대주민으로 초청해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창작물을 선보인 공간이나 발표 지면이 부족한 지역 예술가들에게도 책방은 큰 의미가 있다. 책방지기인 작가들은 이곳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시로, 사진으로 담아 책방에 전시한다. 페이스북에 에스엔에스(SNS) 연재 채널도 만들었다. 따로 또 같이 창작 아카이브를 만드는 것이다. 임씨는 그곳에 책방의 단상을 적었다. “선미촌에서 나는 사람의 얼굴과 사람의 목소리와 사람의 환대와 사람의 온기를 찾아나선다. 그것이 남기는 여운을 찾아 헐레벌떡 뛰어간다. 사랑할 수 없는 것보다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한다.”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공간은 열려 있다. 기명숙 시인의 첫 시집 낭독회를 열고 성악가 조현상의 데뷔 무대를 올리기도 했다.

홀로 창작 활동을 하던 7명의 책방지기들은 책방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느슨하면서도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며 “어떤 이가 창작물을 내놓으면 서로 조언해”주고 “‘실패해도 괜찮아’라는 위로”를 건넨다. 장씨는 “물결서사가 만들고 싶은 건 꾸준함의 서사예요. 꾸준히 지역에서 창작하고 꾸준히 공간을 만들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런 꾸준함이 중요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임씨는 무슨 주제든 서울 이야기만 주목받는다며 꾸준함을 위해 “우리 삶에 대한 지지와 응원을 받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지역에서 창업을 통해 ‘같이’의 가치를 만드는 청년도 있다. 강원도 강릉에 사는 김지우(28)씨는 2017년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 강릉으로 돌아갔다. 지역이 갖고 있는 유산, 정체성 등을 기반으로 지역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지역은 기회의 공간이다. 답답한 도시보다는 여유롭고 자연을 가깝게 볼 수 있는 지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컸다. 2019년 1월 대학 동창인 최지백씨, 이창석씨와 지역의 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스타트업 ‘더웨이브컴퍼니’를 꾸렸다. 동업자들과 강릉에서 ‘로컬 크리에이터’(지역성이나 인문·문화·관광 등을 자원으로 해 혁신적인 방식으로 창업에 나서는 사람)의 역할을 해나간다.

새로 알게 된 나의 도시

김씨는 가장 먼저 지역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을 만들었다. 현재는 공유 업무공간 ‘파도살롱’을 운영하는데 이곳에는 사진작가, 만화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로컬 크리에이터가 입주했다. 2019년 강릉시에서 연 단오제에서 지역 청년과 관광객을 불러들일 공간을 설치하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외에 강릉의 크고 작은 축제나 행사를 기획,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지역 창업자로서 고민이 있다. 김씨는 지역에서 좋은 인재를 찾는 게 가장 어렵다. 지역에 남는 청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 대학과 연계를 시도하지만 쉽지 않다. 여기에 지속가능한 모델을 만드는 것도 큰 숙제다. “지역 창업자를 많이 만나는데 그들도 지속가능한 모델을 만들지 못해 지역을 떠나요. 현재 정부 지원금, 공공기관 계약 등이 이어지지만 이런 외주 지원이 지속가능하지 않잖아요.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만드는 게 2020년 과제예요.”

김씨와 함께 강릉에 내려온 최씨는 강릉에서 생활하며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다. “관광지로만 알고 있었는데 문화의 도시더라고요. ‘정동진독립영화제’ 같은 행사도 자주 있고 시에서 혹은 시민들이 만든 문화공간도 많아요.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죠. 이런 강릉의 문화를 브랜드로 만들고 알리는 일을 할 거예요.”

4개 ‘로컬 어셈블’ 협업체

김씨와 최씨는 지역에서 창업하는 이들도 돕는다.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와 함께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로컬 크리에이터를 발굴, 지원하고 정착할 수 있도록 멘토 구실을 한다. 지역에서 함께 커나갈 동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 창업자들과도 손을 잡았다. 서울과 전북 군산의 언더독스, 전남 목포의 공장공장, 경기도 시흥의 빌드 등 각 지역 로컬 크리에이터들과 연결망을 만들었다. 4개 로컬 스타트업으로 구성된 ‘로컬 어셈블’ 협업체이다. 앞으로 지역 창업 관련 교재 공동 기획, 공동 워크숍, 지역별 우수 창업 사례 소개 포럼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최고의 로컬 브랜드는 지역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에요. 지역 사람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유의 장을 만들어갈 겁니다.” 김씨가 강릉에서 일으키고 싶은 새로운 물결이다.

전주·부산=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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