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과거를 진단하고 미래를 그리는 사회학자를 만났다.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끼리 상대방을 악으로 정의하고 공격하는 형국이다. 돌이킬 수 없는 갈등사회로 몰아가고 있다. 양쪽이 다 그렇다. 마치 두 개의 국민이 있는 것처럼, 내가 챙길 국민은 이쪽이고 저쪽은 국민이 아니라는 식이다. 아주 위험하다.” 이재열 서울대 교수는 최근 두 개로 갈라진 한국 사회를 보면서 “깊은 절망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몇 달 전 (21세기북스 펴냄)란 도발적인 제목의 한국 사회 비평서를 펴냈다. 이전 저서로는 등이 있다. 10월1일 서울 관악산 자락 그의 연구실에서 4시간 가까이 긴 대화를 나눴다.
의원들이 촛불과 태극기 뒤를 따르는 현실조국 사태로 우리 사회의 갈등이 극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주말 일이 있어 광화문에 나갔다. 태극기 부대가 모였더라. 그날 저녁에는 서초동에서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다. 몇 차례 정권이 바뀌면서 세상이 나아질까 기대했는데, 덫에 걸린 느낌이다. 극단적인 진영논리로 빠져드는 게 겁이 난다. 위험한 시그널(신호)이다. 국회라는 제도가 작동을 멈추고, 의원들이 촛불과 태극기 뒤를 따라다닌다.
극단적인 갈등의 뿌리를 어떻게 진단하나.
불신이다. 대한민국은 가난한 평등사회에서 풍요로운 불평등사회로 급속하게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가장 뚜렷한 변화가 불신사회다. 민주화를 이룬 뒤에, 오히려 불신은 더 깊어졌다. 한동안 시민단체와 종교·언론이 신뢰를 받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사라졌다. 심판에 해당하는 입법·사법·행정부를 특히 못 믿는다. 제도의 불신이 심각하다. 심판을 못 믿으니 갈등이 벌어져도 해소할 길이 없다. 극단적인 양 진영에서는 “이게 해법”이라고 서로 주장하지만,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믿을 놈 아무도 없다”고 고개를 돌린다.
조국의 검찰개혁을 기대하는 여론도 높다.
미국 헌법을 만든 제임스 매디슨 이야기를 상기시키고 싶다. 그가 가장 고민했던 문제가 극단적인 불신의 제도화였다. 시민들이 주권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어떤 경우에도 배신당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래서 대통령 임기를 제한하고, 삼권분립을 하고, 임기 중간에 탄핵할 수 있는 여러 장치를 고안했다. 어떤 권력자도 믿을 수 없다는 원칙을 구현한 것이다.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를 냉정하게 돌아보자. “조국은 다르다”고 이야기한다면, 조국을 신격화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원칙으로 보면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누가 그 자리에 있더라도 의심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대원칙이다.
언론 문제도 많이 지적된다.
탈진실(post-truth) 시대라고 한다. 팩트(사실)를 체크해서 진실을 가리는 게 무의미해졌다는 뜻이다. 뉴스를 자기 식으로 편집하고,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끼리만 소통한다. 사회의 큰 어젠다(의제)를 끌어가던 전통적 언론의 기능은 왜소화했다. 각 진영에서 유튜브 등을 통해 전선을 만들어 광장으로 동원하고 행동한다. 그렇게 메시지를 전파하면서 다시 전선을 확대해나간다. 미국, 유럽도 비슷하지만 우리는 신뢰받는 제도가 없으니 갈등이 더 증폭된다. 입소문 퍼지는 속도도 유럽의 5~6배나 된다.
저서에서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를 걱정했더라.
우리 사회가 민주화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이미 많이 풀었다. 성장을 더 해서 풀 수 있는 문제도 이제는 별로 없다. 더 많은 민주화와 성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가장 심각한 게 신뢰의 적자(赤字)다. 그 바탕에는 투명성 문제가 깔렸다. 조사해보니 우리 투명성 수준이 세계 50위권에 멈춰 있더라. 이탈리아, 대만과 비슷하다. 이 정도 투명성 수준에서 풀지 못하는 문제가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다.
쉽게 예를 들어달라.
내가 규제자일 때 피규제자를 봐주고 은퇴 뒤 자리를 보장받는 것, 국회의원 도움을 기대하고 그 자식을 취업시켜주는 것, 그런 식으로 눈에 잘 드러나지 않게 저질러지는 부조리들이다. 엘리트 집단에 속한 이들끼리 공적인 규칙이나 정보를 사적으로 유용하는데 뚜렷한 피해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디에선가 결국 문제가 노출된다. 위험한 상황에서 규제자가 휘슬(호루라기)을 불지 않았던 세월호 사건도 유사한 사례다. 복지예산은 엄청나게 불어나는데 진짜 필요한 곳으로 가지 않는다. 그것을 눈감아준다면 어떻게 되겠나. 우리가 지금 이런 엘리트 카르텔형 부패 문제를 풀지 못하는, 딱 그 위치에 갇혀 있다.
검찰개혁 과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조국 문제와 검찰개혁은 별개 이슈다. 나도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은 지지한다. 문제는 어떤 공수처냐 하는 것이지, 공수처냐 아니냐가 아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무력화되지 않고 이어질 수 있는, 그런 공수처에 대한 본격적인 공론이 필요하다. 지금은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개종하라고 삿대질하는 식이다. 이래서는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
해법을 찾을 수 있겠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종차별을 ‘몽플뢰르 시나리오 콘퍼런스’라는 사회적 합의로 극복했다. 우리보다 훨씬 극단적인 갈등을 풀어냈다. 독일에서는 노조의 지지를 받아 집권한 사민당 정권이 가장 강력한 노동개혁을 단행했다. 그 여파로 슈뢰더가 다음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보수적인 기민당의 메르켈 총리가 적장인 슈뢰더를 모셔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1930~60년대 70% 이상의 법인세 부과를 보수집단에서 기꺼이 수용했다. 우파가 집권했을 때 재벌개혁을 이루고, 좌파가 집권했을 때 노동개혁을 이루는 나라로 가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열린다.
불신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서둘러야 할 과제라면.
선거법만 바뀌어도 많은 것이 달라질 거다. 지금은 51%의 표만 받으면 권력을 독식한다. 비례성과 대표성의 문제가 너무 크다. 선거 캠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정당정치 해악도 크다. 정치꾼이 넘치고, 위대한 정치인이 생겨나지 않는다. 유권자들의 갈증에 답하는 방식으로 공천이 이뤄져야 한다.
젊은이들의 아픔과 분노, 그리고 예민한 공정성 요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그는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인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분노와 아픔의 뿌리를 찾았다.
“동작대교에서는 전동차와 자동차가 같이 달린다. 이때 전동차 안에서 자동차를 보면, 내가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전동차가 속도를 더 내도, 자동차가 그만큼 더 달리면 또 둘 다 제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느낀다. 우리 아이들이 이처럼 서로 더 앞서 달리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고3 공부를 고2 때 선행학습을 하다가 중학교 때로 더 내려오고,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우는 식이다. 사회 전체의 효용 증가는 제로(영)인데, 그 경쟁에 들어가는 비용은 엄청나게 늘어난다.”
선행학습의 사회적 효용이 제로라고.
물론이다. 스카이(SKY) 대학에 들어갈 소수의 아이를 추려내기 위한 경쟁이다. 아이들은 창의적 경쟁이 아니라 위험 회피 경쟁에 익숙해진다. 오답 하나 내면 떨어진다. 재능 많은 아이들을 나쁜 경쟁에 가둬놓는다는 점에서, 사회적 효용은 제로보다 못한 마이너스(영 아래)일 수 있다.
지금 젊은이들이 공정성에 아주 예민하다.
공정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다. 공정해야 한다는 윤리감도 매우 높다. 아이들이 강의 시간에 질문을 잘 하지 않는다. 자칫 다른 아이들의 시간을 뺏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꼭 궁금한 게 있으면, 이메일을 보내거나 수업 끝난 뒤에 따로 질문한다. 또 중간에 규칙이 바뀌어 누구한테 불리해지거나 없던 규칙이 새로 들어오거나 하는 일을 못 견딘다. 지금처럼 예민한 공정성을 요구한 때는 역사적으로 없었던 것 같다. 굉장히 한국적인 경쟁문화가 그 뿌리라고 본다.
굉장히 한국적인 경쟁문화란.
시험 문화다. 왜 아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목을 맬까. 차별이 없고 공정하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더 매달리는 것도 여성 차별이 남아 있는 사회적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시험이란 객관적 절차에 익숙하다. 그 공정성이 흔들리면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와 지금 세대의 일자리가 전혀 다르다는 점도 이해해야 한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렸다. 지금 대졸자가 1천만 명이라면 대졸자 일자리는 절반인 500만 개에 불과하다. 그러니 좋은 정규직 일자리에 대한 공정성 요구가 상상을 뛰어넘는다. 공기업에서 기존 직원의 친인척을 많이 채용했다는, 그런 기사에 아이들이 분노하는 이유다.
대졸자와 일자리의 수요공급 불일치 해소해야저서에서 ‘중산층 붕괴’를 짚었더라.
1980년대만 해도 자신이 중산층이라는 국민이 60~75%에 이르렀다. 지금은 20%에 그친다. 언제부턴가 ‘강남 8학군의 30평 아파트’를 중산층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 정도는 돼야 중산층이라 생각한다. 독특한 한국적 계층의식이다. 그런데 정작 8학군에 들어간 강남의 학부모들이 행복감이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더 잘하도록, 끝없이 치열하게 사다리 오르기 경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자로서 교육 처방을 내놓는다면.
사교육 시장은 이미 내성이 강한 슈퍼바이러스로 진화했다. 학부모들의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사교육이 번창하는 한, 어떤 입시제도로도 지금 같은 극심한 순위 경쟁은 해소되지 않는다. 교육도 고용도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정규직 일자리 조금 늘려봤자 거기에 못 들어간 비정규직의 불행은 오히려 더 커진다. 지금 정치인들은 표가 되지 않는다고 이런 일에 나서지 않는다. 선행학습부터 없애자. 대졸자와 대졸자 일자리의 극심한 수요공급 불일치를 해소하는 첫걸음을 떼자. 길게 보고 ‘우물을 파는 정치 리더십’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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