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농단’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국정 농단 세력에 대한 사법적 단죄는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촛불’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더불어 단죄의 물꼬를 튼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2017년 2월28일 특검 수사 기간 종료와 함께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1·2심과 대법원 판결까지 무려 1천 일 동안 피고인의 쟁쟁한 변호인단과 치열한 법리 공방을 벌였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총성 없는 전쟁’이었다. 국정 농단 단죄의 숨은 주역들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왜 협박에 못 이긴 지원을 수사하냐“대법원의 판단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8월29일 오후 4시 강영은 특별수사관에게 대법원 선고에 대한 소감을 묻자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무미건조하고 교과서적인 문자였지만, 이틀 전 만났을 때의 표정이 떠올라 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로스쿨 출신 7년차 변호사다. 2016년 12월17일 특검팀에 합류한 뒤 지금까지 특검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그는 “특검팀 구성원들 모두 서로에게 깊은 동지애를 느낀다. 그만큼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며 지난 1천 일을 돌아봤다.
“2017년 2월28일 특검 수사 기간이 종료된 후 종무식을 할 때였어요. 박영수 특검께서 팀원들을 한 명씩 단상으로 불러 일일이 악수하며 표창하셨죠. 그러고는 마이크를 잡고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말씀을 시작하셨는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시는 거예요. 그때 코끝이 찡했죠.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요.” 당시 90일(준비 기간 20일 포함)의 1차 수사 기간이 끝날 무렵 박영수 특검은 당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수사 연장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박 특검은 2017년 3월6일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한정된 수사 기간으로 수사가 절반에 그쳐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박 특검은 수사 착수 때 파견검사와 수사관(변호사)들에게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진다. 여러분은 수사에만 전념하라”고 말했다. 이 말은 강 수사관 같은 ‘초짜’ 변호사뿐 아니라 수사 경험이 많은 파견검사들한테도 큰 힘이 됐다. 당시 이재용 삼성 부회장에 대한 수사는 경제지 등 재계 이익을 대변하는 언론들의 공격 대상이었다. 박근혜 정권의 협박에 못 이겨 최순실을 지원했을 뿐인데 쓸데없이 왜 수사하느냐는 논리였다.
하지만 앞서 검찰 수사 단계에서 이미 이 부회장의 뇌물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가 많이 확보돼 있었다. 검찰 수사 기록은 이 부회장을 처벌하지 않을 수 없도록 작성돼 있었다. “국정 농단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라고 만든 특검인데, 혐의가 명백한 사안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게 당시 특검팀 분위기였다고 한다. 특검팀은 이 부회장을 뇌물 혐의로 기소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부회장의 첫 구속영장은 법원에서 기각됐다. 특검팀의 최대 위기였다. 삼성 수사팀에 배속된 강 수사관에게는 더욱 큰 충격이었다. “영장실질심사 당일(2017년 1월19일) 분위기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요. 기각될 것이라고 예상한 팀원은 거의 없었죠. 그래서 이 부회장의 영장을 집행하기 위한 ‘집행조’에 지원해서 영장심사 결정문을 받으러 법원 당직실에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날 새벽에 나온 결정문에 기각 도장이 찍혀 있는 거예요.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 함께 간 팀원들 모두 아무 말도 못했죠. 법원에 제출했던 수사 기록을 여행용 가방에 주섬주섬 챙겨 담는데 정말 참담했어요.” 박 특검은 그날 새벽 영장 기각을 보고받자마자 삼성 수사팀 전원에게 하루 동안 강제 휴식을 ‘명령’했다. 팀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한 조처였다.
삼성 수사팀은 곧바로 재청구 작업에 들어갔다. 파견검사들 수사를 지원하는 업무를 맡은 강 수사관은 제3자 뇌물 등 뇌물죄 관련 각종 판례를 분석해 제공했다. 수사팀은 영장 기각 사유를 분석한 뒤 보강 조사를 거쳐 이 부회장의 영장을 재청구했다. 재청구된 영장은 2월17일 새벽에 발부됐다. “집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었는데, 다른 수사관이 영장 발부 소식을 문자로 알려줬어요. 문자를 받자마자 한달음에 특검 사무실로 달려갔습니다.” 팀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이 부회장에 대한 수사는 탄력을 받았다. 하지만 강 수사관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비극적인 사건이잖아요. 글로벌 기업의 총수가 대통령에게 뇌물을 제공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죠.” 구시대의 병폐인 정경유착이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이 씁쓸했다.
그가 박영수 특검팀에 지원한 계기는 소박했다. 2016년 가을에 터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보고 크게 실망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놀랐고 허탈했어요. 빨리 진상 규명이 돼야 사회가 안정될 거라고 생각했죠.” 박 특검은 그가 소속된 로펌의 대표 변호사였다. “특검님이 국정 농단 수사로 고생하실 텐데, 내가 뭐라도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특검팀에 지원해 40명 규모의 특별수사관에 합류했다. 파견검사 20명, 파견공무원 40명을 합쳐 수사 인력만 100명에 이르는 대규모 특검이었다.
특검 생활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아침 9시 출근-다음날 새벽 1시 퇴근이 일상이었다. 주말 근무는 필수였다. 압수수색이 있는 날에는 새벽 5시에 출근해 압수수색을 한 뒤 다음날 새벽 4시에 특검 사무실로 복귀했다. “몸이 아프지 않은 팀원이 없었어요. ‘내 몸을 갈아가면서 일한다’는 말이 실감 났죠. 피의자를 조사하는 파견검사들은 더 힘들었을 텐데, 그런 내색도 없이 일하는데 정말 놀랐습니다.” 강 수사관도 며칠 동안 코피가 멈추지 않아 애를 먹었다. 남편이 “제발 건강 좀 챙기라”고 했다. 하지만 여성의 ‘체력적 한계’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수사할 때는 아픈 줄도 몰랐던 것 같아요. 수사 기간이 끝난 뒤에야 병원에 갔죠. 다른 팀원들도 그제야 너도나도 병원에 가더군요.”
특검 생활은 ‘보안’의 일상이기도 했다. 박영수 특검은 유독 수사 보안을 강조했다. 섣부른 ‘언론플레이’는 상대에게 역공의 빌미를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는 탄핵은 당했지만 ‘살아 있는 권력’이었다. 태극기 부대는 연일 특검 사무실 주변에서 수사 규탄 시위를 벌였다. 특검팀은 내부 감찰팀을 구성해 팀원들의 수사 기밀 유출 여부를 감시했다. 또 ‘적법절차’와 ‘인권보호’ 지침을 지키도록 독려했다. 특검 수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기본에 충실해야 했다. 파견검사와 수사관들은 자기 사건이 아니면 수사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수사의 큰 그림은 박영수 특검을 비롯한 수뇌부가 그렸다.
‘적법절차’와 ‘인권보호’ 그리고 보안 수사특검 수사는 “팀원들 개개인의 헌신을 벽돌로 삼아 탄탄한 집을 짓는 과정”이었다. 팀워크가 좋지 않으면 결코 탄탄한 집을 지을 수가 없다. 어떤 팀원은 “총성 없는 전쟁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사 기간이 끝난 뒤에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재판 단계에 들어가면 조금은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재판 업무도 만만치 않았어요.” 강 수사관은 이재용 부회장 재판에도 투입됐다. 그는 ‘공판카드’ 작성 업무를 맡았다. 증거조사와 증인신문, 재판부의 소송 지휘 내용 등 재판에서 있었던 모든 것을 정리해 전파하는 업무다. 사건 내용을 훤히 꿰뚫고 있지 않으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밤을 새워가며 수십만 쪽에 이르는 기록을 다 읽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2018년 2월5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항소심 재판부는 삼성이 최순실에게 말을 지원한 것을 뇌물로 보지 않았다. 박근혜, 최순실 재판에서는 뇌물로 인정된 것이었다. 특검팀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판결이었다. “재판 진행 상황을 왜곡 보도하는 몇몇 언론을 보면서 삼성의 힘이 막강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어요.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오너(총수)를 보호하기 위해 위증을 하는 삼성 임원들이 안쓰러웠죠.”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삼성과 척지면 법률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는 말이 돌 정도로 삼성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강 수사관도 특검 생활이 끝나면 ‘생업’에 종사해야 한다. 앞으로 생계가 걱정되지는 않을까. “변호사가 꼭 소송 업무만 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웃음) 변호사는 공익 활동을 포함해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별로 걱정은 안 됩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변호사가 된 이유 중 하나가 공익 활동에 대한 로망이다. 그는 대학 시절 야학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임대아파트촌에 사는 맞벌이 부부의 초등학생들을 돌보는 활동이었다.
그는 특검 생활을 떠올리며 “군대를 갔다 오지 않았지만 사선을 넘나든 느낌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특검 수사 기간이 끝난 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을 결정했는데, 만약 탄핵이 안 됐다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대통령을 겨냥한 수사를 했던 특검팀이 무사했을까 등 여러 생각을 했죠. 특검 사무실 주변에 태극기 부대가 진을 치고 있기도 했고. 하지만 시민들이 특검을 응원하는 꽃바구니도 보내주시고 성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셔서 용기를 잃지 않았던 것 같아요.” 결국 촛불의 힘이 박영수 특검팀의 성공을 이끌어낸 셈이다.
이 부회장 재판은 대법원에서 파기환송이 됐기 때문에 특검팀은 재판 업무를 계속해야 한다. 한 사건을 1천 일 동안 다룬다는 것은 진이 빠질 정도로 지치는 일이었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재판 업무를 해야 하지만, 국민이 우리 존재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시면 큰 힘이 될 것 같다”며 수줍게 웃었다.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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