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트럼프 대통령이 분리선을 넘어서 우리 땅을 밟았는데 사상 처음으로 우리 땅을 밟은 미국 대통령이 되셨습니다.”
“이 행동 자체만 보시지 말고 이 트럼프 대통령께서 분리선을 넘어서 가신 건 좋지 않은 과거를 청산하고 앞으로 좋은 앞날을 개척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남다른 용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6월30일 오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땅을 밟은 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판문점이라 가능했던 즉석 만남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4월12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과의 협상 시한을 연말까지로 못 박고 미국이 셈법을 바꾸지 않으면 대화에 나서지 않겠다고 밝혔다. 최근 미국이 ‘유연한 접근’을 밝혔지만 셈법을 바꾸지 않았는데 왜 김 위원장은 6월30일 판문점 북-미 정상회동에 응한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판문점이란 장소가 특별했기 때문이다. 판문점은 66년 전 북한과 유엔사(미국)가 정전협정을 맺었던 곳이다.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은 남북 대립뿐만 아니라 북-미 적대와 대립, 갈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1976년 8월 판문점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미군 장교 두 명이 북한군에게 살해돼, 한반도가 전쟁 일보 직전의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66년 만에 조(북)-미 두 나라 최고수뇌분들께서 분단의 상징이였던 판문점에서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역사적인 악수를 하는 놀라운 현실”이며 “오랜 세월 불신과 오해,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간직한 판문점에서 화해와 평화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었다”고 6월1일 북한 은 보도했다.
북-미 정상이 악수하고 손을 잡고 북쪽으로 넘어간 군사분계선은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T2)과 실무장교 회의실(T3)로 쓰는 파란색 조립식 건물 사이에 있다. 판문점에는 T1(중립국감독위원회 회담장), T2, T3 건물 등이 있다. 건물 이름의 T는 ‘임시’(Temporary)란 뜻의 영문 앞글자다.
이 건물들은 1953년 7월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뒤 그해 10월 세웠다. 당시는 66년째 쓸 것으로 전혀 생각 못하고 잠시 사용을 예상해 건물 이름에 ‘임시’를 넣었다. 정전협정은 전후에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이 필요한 과도적이고 한시적인 성격의 협정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한반도 평화 로드맵(이행안)은 종전 선언 이후 비핵화 진전을 통해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방식이다.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학 석좌교수는 한반도를 ‘냉전의 박물관’으로 일컫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에서 가장 무장된 비무장지대(DMZ), 남과 북의 대규모 지상군과 징병제, 정전협상이 진행된 판문점, 유엔군사령부 같은 냉전의 역사적 유물이 전쟁이 종식된 지 6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판문점 북-미 정상회동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자신이 마지막 남은 냉전 체제를 해체하는 세계사적 소임을 맡은 지도자임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효과를 거뒀다.
둘째 이유는,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로 손상된 김정은 위원장의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7월1일치 1면 기사의 첫 문장은 “김정은 동지께서 6월30일 도널드 트럼프 미합중국 대통령의 제의에 따라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상봉”이었다. 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온 데 대하여 수락하시고” “트럼프 대통령의 판문점 상봉 요청 의사” 같은 표현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먼저 만나자고 했다”고 세 번이나 강조했다.
권력 승계 완료 직후 강조한 ‘부귀영화’북한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유일적 최고결정권을 지닌 무오류’의 존재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돼 직접 협상에 나선 김 위원장의 권위에 큰 상처가 났다. 북한은 이를 만회할 계기를 찾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에 찾아와 만남을 요청한 것은 김 위원장의 권위를 회복할 좋은 기회였다.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의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싶다’는 트윗에 5시간 뒤에 호응하면서도 ‘공식 제기’를 받지 못했다고 단서를 단 것은 김 위원장의 권위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판문점 회동에서 김 위원장은 대내적으로 체면을 회복하고 미국과 대화를 재개할 명분을 얻었다.
판문점 북-미 정상회동 이후 북한 언론매체들은 김정은 위원장의 업적을 치켜세웠다. 7월4일치는 ‘태양의 강국’이라는 제목의 정론에서 “최고 영도자 동지께서 미합중국 대통령과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신 소식을 두고 온 지구촌의 눈과 귀가 조선반도로 다시금 집중되고 주체조선, 그 위대한 부름이 세인의 심장을 세차게 울려주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우리 수령님은 20세기의 가장 걸출한 수령, 인류의 태양”이라며 “수령님을 높이 모시었기에 우리 민족은 태양민족으로 세상에 두 번 다시 태어날 수 있었고 반만년 민족사의 가장 위대한 기적과 사변들을 이룩하며 그 이름을 찬란히 빛낼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어려운 북한 경제 형편도 김 위원장이 판문점에 나온 배경이다. 북한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자력갱생’을 강조하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석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북한의 새 경제와 대북제재: 분석과 가설’ 보고서에서 “김정은 시대 북한 경제가 해외 경제와의 통합, 시장경제 활동이 공식 부문 확산 등 큰 변화를 겪고 있으며, 과거에 비해 국제사회의 경제제재에 휠씬 더 취약해졌다”고 분석했다.
김 위원장은 경제 건설과 주민 생활 향상을 자신의 대표 업적으로 삼으려 한다. 그는 권력 승계 완료 직후인 2012년 4월15일 평양에서 열린 열병식에 참가해 첫 공개연설을 하면서 “다시는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북한은 지난해 4월2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핵·경제 병진 노선을 폐기하고 경제 건설에 총력을 집중한다는 새 노선을 채택했다.
올해는 북한이 2016년부터 추진하는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2016~2020년) 목표 수행 4년차가 된다. 올해 안으로 구체적인 성과가 나와야, 내년에 성공적으로 이 전략을 마무리할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최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새로운 전략적 노선에 따른 경제발전과 민생 개선에 노력하고 있다며 외부 환경이 개선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대북제재가 풀리지 않으면 중국과 러시아의 도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김 위원장은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올해 안에 북-미 관계를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북한 처지에서 보면 올해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6월30일 판문점 북-미 정상회동 이후 다음번 북-미 정상회담, 남북 정상회담, 유엔 총회, 북-중 수교 70주년 정상회담을 어떤 순서로 배치할지 결정해야 한다. 9월 유엔 총회에 김 위원장이 참석해 연설할 수도 있다. 10월6일 북-중 수교 70주년 기념을 계기로 김 위원장이 방중해 북-중 정상회담을 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평양 또는 워싱턴 북-미 정상회담, 4차 남북 정상회담을 어떤 비중과 순서로 할지 김 위원장이 판단해야 한다.
판문점 북-미 정상회동은 남북관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김 위원장이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가 연계됐음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북한은 남한에 불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6월27일 북한 외무성 국장은 “(남조선 당국은 북-미 대화에) 참견하지 말라”는 입장을 내놨고, 김 위원장이 4월 남쪽을 겨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되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서 제안한 북-미 정상 판문점 만남이 바로 다음날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은 지난해 9월 평양에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가 채택됐기 때문이다. 이상근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연구원이 내는 `이슈브리프’에서 “군사 분야 합의서에 따라 지난해 10월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지뢰 제거, 화기, 탄약, 경비 병력 철수가 완료되었으며 유엔사·한국군·북한군 3자 검증도 이뤄졌다. 그 결과 판문점은 트럼프 대통령이 갑자기 방문할 수 있는 완전한 비무장 지역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결과로 6월30일 한-미 대통령이 처음으로 군복·방탄복이 아닌 양복·넥타이 차림으로 최전방 경계초소(GP)를 방문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해 판문점에서 이미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설 수리와 안전 점검 등이 돼 있었고, 경호와 의전 경험도 축적돼 있었다. 이런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면 북-미 회담 실무 합의가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한다면 아무 때나”김정은 위원장도 문재인 대통령에게 과거 회담 사례를 참고했다고 말했다. 영국 일간지 이 7월4일 유튜브 계정에 공개한 판문점 회동 당시 현장 영상을 보면,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양자 회동이 끝난 뒤 남·북·미 정상 3명이 판문점 자유의집에서 나란히 걸어 나온다.
이때 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나와 트럼프 대통령도 장소와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이렇게 원한다면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다는 그런 전례를 참고하였다”고 웃으며 말한다. ‘장소와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만난 전례는 지난해 5월26일 판문점 북쪽 통일각에서 이뤄진 김 위원장과 문 대통령의 두 번째 정상회담으로 보인다. 이 회담은 하루 만에 급히 준비됐고, 의전 등에 얽매이지 않고 성사됐다.
권혁철 한겨레평화연구소장 nura@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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