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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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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시계가 다시 돈다

‘비상식적’이고 ‘우발적’인 진전
등록 2019-07-06 14:53 수정 2020-05-03 04:29
6월30일 군사분계선을 향하는 트런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6월30일 군사분계선을 향하는 트런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6월30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에 세 사람이 모였다. 정전협정 66년 만에 이뤄진 역사적인 이벤트라고 하기엔 세 사람은 갑작스레, 편하게 만났다. 한반도를 향한 세 개의 ‘열망’이 이들을 군사분계선으로 이끌었다. ‘재선용 업적’(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권위 회복’(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한반도 평화 중재자 복귀’(문재인 대통령) 등 그 열망의 내용은 각각 달랐다. 하지만 세 열망이 한곳에 모이자 지난 2월 북-미 정상회담(베트남 하노이 회담) 뒤 멈췄던 한반도 평화 시계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이들의 열망은 앞으로 ‘남·북·미 삼각형’ 안에서 끊임없이 붙었다 떨어졌다 다시 붙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 속도와 방향은 세 사람의 정치 미래를 좌우하고 동시에 한반도 평화의 미래를 바꿔나갈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30일 판문점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30일 판문점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는 1990년대 중반부터 정치판을 기웃거렸다. 그전까지는 민주당 출신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쪽에 정치자금을 내는 등 정치적 성향이 공화당 쪽은 아니었다.

철면피의 전복적인 능력

1999년 그는 새로 창당된 개혁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기도 했다. 1990년대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돌풍을 일으켰던 억만장자 로스 페로가 창당한 이 개혁당의 대선 경선에는 공화당을 탈당한 강경우파 팻 뷰캐넌도 참가했다. 뷰캐넌은 위험스러운 인종주의 발언을 쏟아냈다. 반면 트럼프는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흑인 여성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구애하기도 했다. 그는 또 뷰캐넌을 “아돌프 히틀러에 반한 사람”이라며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트럼프는 공화당원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흑인 여성을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삼기를 원할 정도로 인종주의와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지금 백인민족주의 집단의 가장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그들을 핵심 지지층 중 하나로 삼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인종주의는 정치인이나 공직자라면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최고의 금기다. 지금 트럼프는 인종주의와 그 세력이라는 금기를 가볍게 넘나들며 자신의 정치 동력으로 삼고 있다. 이런 행태를 옳고 그름이라는 차원에서만 판단하면, 트럼프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그 극복도 불가능해진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철면피임이 분명하나, 그 정도로 기존 가치관을 간단히 뛰어넘는 전복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지난 6월30일 판문점에서 전격적으로 이뤄진 이벤트는 트럼프의 이런 성향과 능력을 제외하고는 설명이 안 된다. 적대국 사이의 정상회동이 트위터 메시지 한 방을 계기로 하루 사이에 전격적으로 성사된 과정이나 형식도 파격적이지만, 판문점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녘땅을 밟은 것은 상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에서 가장 극적인 외교 퍼포먼스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트럼프는 왜 판문점 회동을 했나? 다목적이다. 자신이 주도한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 등 북핵 외교 되살리기부터 시작해 궁극적으로는 재선을 겨냥했다.

첫째,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로 좌초된 자신의 북핵 외교를 이 이벤트 하나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최고로 화려하게 부활시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했다. 하노이 정상회담 뒤 자신이 희망하고 공언하던 공식적인 3차 북-미 정상회담으로 가려면, 수많은 협상을 통한 사전 정지와 의전이 필요했다. 더구나 싱가포르와 하노이 회담이 결과적으로 교착돼, 자신이 밀고나갔던 ‘톱다운’(위에서 아래로) 프로세스를 통한 정상회담에 대해 행정부 안에서도 회의가 커진 상황이었다.

트럼프는 이번에 트윗으로 판문점 회동을 제안하고 하루 만에 밀어붙이는 더 전격적인 톱다운 방식으로 기존 실패와 교착을 상쇄해버렸다. 사실상 3차 북-미 정상회담을 넘어서 남·북·미 3자 정상회담으로 판을 넓혔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북핵 외교의 디테일을 확실히 실무진에 넘겨버렸다.

북한 카드, 중국에 뺏기지 않아

둘째, 판문점 회동에 앞서 있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자신이 봉착했던 각종 문제를 희석해버렸다. 1년 이상 끌며 이미 임계점에 오른 중국과의 무역분쟁은 G20 회의 중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동에서도 사실 봉합으로 끝났다. 화웨이 제재를 완화하고, 보복관세 등 무역분쟁은 계속 협상하기로 합의한 정도다. 이 정도를 가지고 국내로 돌아갔다면, 민주당은 물론이고 공화당과 행정부 내에서도 비판의 폭탄이 쏟아졌을 것이다. 판문점 회동으로 국내외 여론의 초점은 그의 판문점 이벤트로 쏠렸다. 미-중 협상 결과보다 그의 외교 행태에 대한 찬반만 가열됐다.

또한 미-중 대결에서 북한 카드를 중국에 뺏기지 않는 결과도 얻었다. 시진핑은 G20에서 트럼프와 회담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북-중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북핵 문제를 놓고 구체적으로 무슨 합의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시 주석이 김 위원장을 구슬려 트럼프와 타협하라고 했을 수도 있고, 반대로 김 위원장을 부추겨 트럼프에게 맞서라고 했을 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북한과 중국 두 나라는 미국에 맞서 서로를 카드로 쓸 수도 있다는 것을 과시했다.

트럼프는 판문점 회동을 통해 자신도 중국에 맞서 북한을 카드로 쓸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을 확보했다. 더구나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까지 미국 쪽에 더 엮어두는 조처를 더한 것이다.

셋째, 때맞춰 시작된 민주당 대선 후보 토론회에 쏠리던 여론의 김을 빼버렸다. 트럼프의 판문점 이벤트는 민주당 대선 후보 토론회를 압도했다.

이는 하노이 정상회담과 비교된다. 당시 트럼프는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유로, 임박했던 마이클 코언 전 개인변호사의 의회 청문회 등을 들었다. 외국에 나가서 외교를 벌이는데, 국내에서는 자신을 향해 저격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당시 그런 상황에서 북한과의 타협적인 협상안을 들고 국내로 간다면, 자신에 대한 공세가 거세질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더 큰 폭탄을 떠뜨려 자신을 도마 위에 올리는 민주당 대선 후보 토론회의 김을 빼고는 자신에 대한 공격도 중구난방으로 만들어버렸다.

넷째, 무엇보다 트럼프는 재선으로 향하는 가도에서 북핵 문제를 자신의 필요에 맞게 쥐고서 흔들 가능성을 만들었다. 그에게는 공식적인 3차 북-미 정상회담도 열려 있고, 김정은의 워싱턴 방문이나 그의 평양 방문 등 또 다른 이벤트를 펼칠 수도 있다.

“쇼만 한다”, 외화내빈의 대표적 사례

트럼프에게 이제 북핵 이슈는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이벤트 상자가 되고 있다. 트럼프는 애초에 북핵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겠다고 공언하고, 전격적인 북-미 정상외교를 열었다. 하지만 그의 공언과 달리 북핵 폐기 등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진전이 없었고, “쇼만 한다”는 비판과 함께 트럼프 외교의 외화내빈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짙어가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트럼프는 자신이 추진한 북한과의 정상외교 이후 북한이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를 하지 않는 등 더 이상의 도발을 멈췄고, 한반도에서 전쟁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반박했다. 미군 유해가 송환되는 성과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미국이 완전한 핵폐기를 위해 북한에 여전히 제재를 유지하는 등 양보한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트럼프의 말대로 미국이 북한에 준 것은 사실 김정은과의 정상회담 외에는 없다. 특히 북한은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을 위해 풍계리 핵시설을 폭파하는 등 미래 핵을 포기하는 부분적인 조처도 선행했다.

판문점 회동을 계기로 트럼프나 그 행정부는 북핵 접근책을 바꿀 수 있는 계기를 잡았다. 즉,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했던 ‘완전한 북핵 선 폐기 이후 제재 해제 등 보상’이라는 접근책을 수정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핵 동결을 입구로 하여, 단계적인 북핵 폐기에 상응하는 관계 개선과 제재 해제 등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미국 언론 등도 이런 내용을 보도했다. 물론 존 볼턴 등 강경파는 펄쩍 뛰고, 국무부 등의 공식 대응도 이를 부정한다.

하지만 트럼프 입장에서는 이제 판문점 회동이라는 극적인 퍼포먼스를 하고, 이에 대한 실질을 채워나가는 것은 당연하다. 판문점 회동에 대한 주된 비판은 ‘실질’(substance)은 없고 ‘상징’(symbolism)만 있다는 것임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트럼프로서는 자신이 애초 공언했던 ‘단번에 북핵 선 폐기’라는 굴레를 능청스럽게 벗어던지게 된 것이다. 또 트럼프 입장에서도 북핵 문제의 점차적 진전은 이제 결코 나쁘지 않은 방식이다. 그가 줄곧 ‘북한이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성과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면 그때마다 그는 자기 업적을 부풀릴 것이다.

“북한으로 도널드 트럼프가 걸어 들어간 것은 2020 대선의 렌즈를 통해서 가장 잘 설명된다”고 미국 방송 <cnn>은 분석했다. 방송은 “트럼프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북한과의 전쟁을 막았고, 자신이 재선에 출마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진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주장을 여전히 유효하게 하는 데 사활적인 정치적 이해가 있다”며 “김정은과의 만남은 자신의 재임과 민주당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데 필요한 ‘평화와 번영’ 플랫폼의 중심 소재”라고 지적했다.

6월30일 판문점에서 열린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회동에 트럼프의 딸인 이방카 백악관 선임보좌관도 참석했다. 연합뉴스

6월30일 판문점에서 열린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회동에 트럼프의 딸인 이방카 백악관 선임보좌관도 참석했다. 연합뉴스


오랜 가식을 포기하게 하는 인물?

트럼프가 북핵을 폐기하고 북한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한반도에 평화와 안정을 구축하는 새로운 체제를 세울 수 있을까? 그리고 그는 정말 이를 이루기 위해 매진을 멈추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트럼프는 자신이 주도한 북핵 해법을 완성시키고, 이를 업적으로 내세울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인종주의를 넘나드는 정치적 표변성과 가치관의 전복을 고려하면, 트럼프는 언제라도 북핵 이슈를 차버릴 수도 있다.
적어도 2020년 대선 전까지는 북핵 외교판을 없던 일로 만들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대선 전까지 북핵 협상은 지속되고, 성과는 부분적으로 그칠 가능성도 크다고 봐야 한다. 그래도 트럼프는 여전히 자신이 북한과의 전쟁을 막았고, 북한의 핵개발을 멈추게 했고, 핵폐기를 진행 중이라고 자랑할 것이다. 사실, 그것만 해도 성과인 것은 확실하다.
냉전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자인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학 교수는 트럼프에 대해 “그는 기존 대외정책을 반대한 것이 당선된 큰 이유였다”면서도 “재직할수록 변화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고, 버락 오바마가 ‘워싱턴 플레이북’이라고 했던 것을 추종하고 있다”고 실망감을 보였다. 트럼프 역시 대외분쟁 개입을 삼가겠다는 자신의 공약을 지키지 못하고, 적성국이나 동맹을 가리지 않고 갈등과 분쟁을 악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를 비판한 대목에서도 유일하게 북한 문제는 예외다. 트럼프는 북한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헨리 키신저의 트럼프 비평을 다시 상기해보자. “트럼프는 가끔 역사에서 등장하는 한 시대의 종언을 상징하고 그 오랜 가식을 포기하게 하는 인물 중 하나일 수 있다. 그가 이를 의식하거나, 어떤 큰 대안을 고려한다고는 반드시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우발적일 수 있다.”
키신저의 말대로 북한과 한반도 문제에서 트럼프가 그런 한 시대의 종언을 상징하고, 오랜 가식을 포기하게 하는 인물이 될지 지켜보고, 기대해보자.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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