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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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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막힌 대피로 턱 없는 매뉴얼

포항 지진 후 2017년 9월 ‘장애인 안전 종합대책’ 마련했지만

장애 유형별로 다양하지 않고 구체적이지 않아
등록 2019-05-14 12:38 수정 2020-05-09 11:27
4월4일 화재시 대피소로 지정됐던 속초시생활체육관 화장실. 장애인 편의시설이 없고, 진입로에는 턱이 있다(왼쪽). 행정안전부가 마련한 ‘지진 발생시 상황별 행동요령’에는 장애인이 실천할 수 있는 게 없다. 이승준 기자

4월4일 화재시 대피소로 지정됐던 속초시생활체육관 화장실. 장애인 편의시설이 없고, 진입로에는 턱이 있다(왼쪽). 행정안전부가 마련한 ‘지진 발생시 상황별 행동요령’에는 장애인이 실천할 수 있는 게 없다. 이승준 기자

강원도 산불 이전에 경북 경주·포항 지진이 있었다. 2016년 9월12일 경주 지진(규모 5.8)과 2017년 11월15일 포항 지진(규모 5.4)이 일어났을 때 ‘재난취약계층’인 장애인과 노인을 위한 재난 안전 시스템은 사실상 없었다. 당시 장애인 단체와 언론은 지진이 났을 때 ‘재난 약자’들의 무기력한 상황을 전하며 재난 정보의 정확한 전달, 표준화된 매뉴얼 수립 필요성을 지적했다.

청각·지적 장애인은 이해 못하는 ‘문자 통보’

국회는 2016년 12월29일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며 재난·안전사고에 취약한 어린이, 노인, 장애인 등을 ‘안전취약계층’으로 정의했다. 뒤늦게 재난 약자의 안전 대책을 마련할 법적 근거가 생긴 것이다. 정부는 2017년 9월24일 관계 부처 합동으로 ‘장애인 안전 종합대책’(이하 종합대책)을 발표해 장애 특성을 반영한 재난·안전 관리 강화, 안전한 장애인 활동 공간 조성, 안전·교육 훈련 강화, 안전 문화 확산 등 3대 분야 14개 과제를 5년 계획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행정안전부(행안부)는 지난해 8월 발간한 ‘2017 포항 지진 백서’에서 포항 지진 당시 ‘장애인·외국인의 행동 요령에 대한 안내 부족’을 문제점으로 지적해 보완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1년6개월이 지난 4월4일 밤에 일어난 강원도 산불 현장에서 고성군과 속초시에 사는 장애인들은 자력으로 대피하거나, 가족·이웃의 도움으로 안전을 확보하거나,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노심초사했다. 권미혁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장애인공동대응네트워크가 4월15일 국회에서 연 ‘장애인 안전 종합대책 이행을 위한 정책 간담회’에서 행안부는 종합대책 추진 경과와 올해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는 종합대책 마련이 시간표대로 진행된다고 밝혔지만 여전히 경주·포항 지진 때 드러난 문제점의 대응은 더디기만 하다.

재난 발생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재난 정보를 전달하고 쉽게 찾을 수 있는 대피 매뉴얼을 갖추는 일이다. 누구보다 장애인에게는 화재나 지진 발생 상황에 대한 정보와 가까운 대피소 위치 등이 다양한 장애 유형(장애인복지법은 15개 장애 유형으로 구분)에 맞게 제공돼야 한다.

하지만 현재 문자 메시지·알림 형식의 재난 정보 전달은 여전히 비장애인 중심이다. 일단 문자 형태의 정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청각장애인과 지적장애인에게는 무용지물이다. 문자 정보를 이해하더라도 대피소에 장애인 편의시설이 있는지, 수어통역사 등 장애 특성에 맞는 지원 인력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행안부에서 만든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정부 대표 재난 안전 포털앱’이라고 소개된 ‘안전디딤돌’을 실행하면 전국 대피소 위치를 알 수 있지만 장애인 편의시설 정보는 없다.

강원도 산불 당시 대피소로 지정돼 이재민들이 임시 거주했던 속초생활체육관을 5월3일 찾아보니 경사로는 있지만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블록, 장애인 화장실은 없었다. 화장실 출입구에 턱이 있어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은 자력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2017년 포항 지진 당시 대피소인 포항 북구 흥해체육관을 찾았던 김성열 포항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이 말했다. “도움을 주려고 갔는데 장애인을 대피소에서 볼 수 없었다.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확보되지 않았고, 장애인 화장실 등 편의시설도 없었다. 장애인 당사자들은 집에 있는 게 차라리 편한 상황이었다.”

대피소 5분의 2가 휠체어 못 들어가

2017년 11월 경남아자장애인자립생활센터 등이 창원시 재난대피소 315곳을 전수조사해 발표한 결과를 보면, 휠체어를 타고 자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피소는 129곳에 그쳤고 모든 장애 유형이 대피할 수 있는 장소는 없었다. 행안부 관계자는 “보건복지부가 5년마다 장애인 편의시설 실태 조사를 하는데 (올해 2월27일 발표) 그 결과를 안전디딤돌 앱과 연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현재의 재난 대비·대피 매뉴얼도 장애인 단체들은 쓸모없다고 지적한다. 장애인 단체들은 다양한 장애 유형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구체적인 표준 매뉴얼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그동안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관련 연구나 매뉴얼 수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2013년), 보건복지부(2014년), 한국장애인개발원(2016) 등에서 장애인 재난 안전을 연구해 매뉴얼을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장애인들은 매뉴얼이 있는지 모르거나, 실제 상황에서 도움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낸다. 장애인들이 단체로 거주하는 시설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많았고, 15개 장애 유형의 일부만 다루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고, 비장애인 대피 행동 요령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박재영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제도개선팀장은 “구체적이지 않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라는 내용 위주인데 긴급상태에서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라며 “재난 대비 교육·훈련과 연계되기 때문에 매뉴얼부터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단 비장애인이든 장애인이든 재난 정보와 대피 행동 요령을 볼 수 있는 ‘국민재난안전포털’ ‘안전디딤돌 앱’ ‘국민안전방송 안전한TV’ 등을 살펴보면 그동안 연구된 장애인 매뉴얼이 반영되지 않았고, 장애인에게 적용되는 행동 요령도 찾기 어려웠다. 안전디딤돌 앱에서 지진·화재가 났을 때 상황별 행동 요령을 확인해보면,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재난 발생시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에 대한 설명이 없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계단을 이용하라”라는 문구만 있다. ‘국민안전방송 안전한TV’에서 ‘장애인 화재 인지 교육’ 영상 자료를 보면 시각장애인을 구하러 온 비장애인이 건물 내 연기로 출구를 못 찾자 오히려 시각장애인이 점자 유도 블록을 통해 비장애인을 이끄는 다소 황당한 내용도 있다. 그나마 소방청과 서울소방재난본부에서 최근 몇 년 사이 지체장애인·청각장애인·시각장애인 재난 교육 자료를 만들고 수화 영상 제작, 점자 매뉴얼을 발간해 장애인의 재난 매뉴얼 접근성을 높이려 하지만 장애인 단체는 역부족이라고 지적한다.

같이 대피할 수 있는 관계망 필요해

정부 종합대책에 따라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은 지난해 12월 1년여간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장애인 취약 특성을 고려한 재난 대응 메뉴얼 개발’ 연구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그동안의 연구가 장애인의 일부 유형을 다루고 있으나, 장애인들의 재난 취약 특성을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다”며 화재·지진 발생시 지체장애인·발달장애인·시각장애인이 거주시설(아파트), 이용시설(복지관), 학교별로 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을 개발했다. 이전보다 장애 유형별로 구체화된 내용이 담긴 매뉴얼로 행안부는 종합대책 추진 성과로 내세우지만, 장애인들과 각 기관에서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 개발까지는 예산 확보 등의 과정이 필요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행안부 관계자는 “현재 연구원에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강원도 산불, 경주·포항 지진을 경험한 중증장애인들은 무엇보다 활동지원서비스 시간 확대, 같이 대피할 수 있는 지역사회 인적 관계망·비상연락망 구축 등을 원한다. 대피할 때 도움을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의 경우 보건복지부가 지원하는 시간에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으로 시간을 더하는 방식인데, 24시간 서비스하는 지역은 서울·경기·충북·광주·전남밖에 없다. 즉, 밤이나 새벽 시간대에 재난이 발생하면 혼자 사는 중증장애인들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된다.

포항 북구의 한 아파트 고층에 사는 지체장애 1급 이아무개(38)씨는 근육병을 앓고 있어 넘어지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일어설 수 없다. 그는 2017년 11월15일 오후 2시29분 규모 5.4의 지진, 2018년 2월11일 새벽 5시께 규모 4.6 지진이 났을 때 멀리 사는 동생과 지역 장애인단체의 도움으로 대피했다. 포항 북구의 빌라 2층에 사는 뇌병변 장애인 하아무개(37)씨는 2018년 2월 새벽 지진이 일어났을 때 집에 혼자 누워 “그냥 집과 함께 무너져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지자체나 재난기관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씨는 “시스템 구축에 예산과 시간이 많이 들어가니 지금으로써는 곁에 누가 있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씨와 하씨 모두 지진 이후 지자체에서 자신들의 상황을 조사하거나 의견을 묻는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포항 장애인단체들은 지자체에서 먼저 재난취약계층 담당부서를 만들어 장애인·독거노인 현황을 전수조사하고 119·이웃 주민·복지관 등과의 비상연락망 구축을 요구하고 있다. 포항 지진 이후 장애인, 활동지원사, 포항 지역 공무원을 심층 인터뷰한 뒤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 2017년 포항 지진을 겪은 장애인의 경험을 바탕으로’라는 영문 논문을 쓴 박은선 연세대학교 환경공간정보 및 방재연구실 연구원도 장애인의 사회관계망 구축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외국의 많은 재난 연구에서 사회관계망이 두터운 사람일수록 정확한 재난 정보를 얻고 대피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의 장애인들은 취업률이 낮아 사회적 접촉이 적고 그만큼 재난에 취약하다.”

화재시 사망자 수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4.7배

정부가 그동안 내놓은 장애인 재난 매뉴얼도 대부분 재난 대피시 ‘조력자’를 전제한 채 작성됐다. 인적 연결망이 구축돼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대피하는 교육·훈련도 가능하다. 정부는 현재 홀몸노인·중증장애인과 사회복지사-지자체 공무원-전국자율방재단(민간) 사이에 비상연락망이 짜였다고 했다. 지난해 여름 폭염 당시 전국자율방재단이 재난 도우미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겨레21>이 만난 장애인들은 이런 연락망의 존재를 몰랐고, 산불이나 지진이 난 뒤 연락받은 적도 없다고 했다.

정부가 집계한 사망 원인 통계(2014년)를 보면 10만 명당 화재 사망자 수는 비장애인이 0.6명이지만 장애인은 2.8명으로 약 4.7배였다. 경주·포항 지진, 강원도 산불에서 장애인 인명 피해는 집계돼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의 안전을 언제까지 ‘운’에 맡겨야 할까.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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