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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유급휴가가, 싸게 먹힌다

보사연 보고서 “병에 걸리면 소득 줄어들다가 결국에는 가난해져”
등록 2019-05-08 09:53 수정 2020-05-03 04:29
공무원과 사립학교 교원은 유급병가를 법적으로 보장받는 소수 노동자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공무원과 사립학교 교원은 유급병가를 법적으로 보장받는 소수 노동자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한국에서 업무 외 부상·질병으로 아플 때 쉴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는 노동자는 공무원과 사립학교 교원이 유일하다. 공무원은 1년에 60일까지 병가(질병휴가)를 쓸 수 있다. 6일까지는 의사의 진단서를 첨부하지 않아도 된다. 만약 60일 안에 몸이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다면 최대 2년까지 질병 휴직을 낼 수 있다. 소득도 보장된다. 휴가 중 월급의 100%, 휴직 중 50~70%가 나온다. 병가를 이용해 아플 때 제대로 쉬는 것은 노동자의 권리이자 의무다. 국가공무원법은 “신체·정신상의 장애로 장기 요양이 필요할 때” 임용권자는 노동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휴직을 명해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역시 공무원 복지는 좋다’고 부러워하거나 비아냥대고 끝날 일이 아니다. 질문을 던져야 한다. 국가는 왜 공무원에게 노동자의 유급휴가를 보장하고 있을까. 왜 유급휴가를 노동자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을까.

‘질병으로 인한 가구의 경제활동’ 보고서

한국에서 노동자가 아프면 두 가지 위험에 맞닥뜨리게 된다. 치료받고 요양하는 동안 일을 못하면 일자리를 잃을 수 있고, 일자리를 유지하더라도 임금이 줄어들 수 있다. 실직과 소득 감소 모두 노동자에게는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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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이 노동자 개인과 가족의 고용·소득에 미치는 구체적인 영향을 분석한 연구 결과가 5월 초 발표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책임연구자 김수진 부연구위원)이 펴낸 ‘질병으로 인한 가구의 경제활동 및 경제상태 변화와 정책과제’ 보고서를 이 먼저 살펴봤다.

2008~2016년 한국의료패널 자료를 이용해, 예상치 못한 ‘건강 충격’인 중증질환(암·뇌혈관계 질환 등으로 15일 이상 입원)을 진단받았던 20~59살 노동자와 중증질환을 진단받은 적 없는 같은 연령대 노동자를 비교했다. 그중에서도 노동자가 질병에 걸리기 직전 해에 경제활동을 하던 사람만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분석 시기는 질병 진단 시점을 기준으로 진단 직전 4년과 직후 4년이다.

중증질환에 걸린 직후, 노동자들은 노동시장을 빠른 속도로 빠져나갔다. 질병에 걸리기 직전 해에 100%였던 중증질환군의 경제활동참가율(15살 이상 인구 중에서 취업자와 실업자를 합한 경제활동인구 비율)은 질병을 진단받은 해에 77.5%로 뚝 떨어졌다. 그로부터 2년 뒤 이 비율은 잠시 회복됐다가 3년 뒤 하락세로 돌아섰고, 4년 뒤 70.5%까지 떨어졌다. 질병에 걸렸던 노동자의 30%는 시간이 지나도 노동시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뜻이다. 같은 시기 비중증질환군에서 이 비율은 100%에서 90.9%(질병 진단)를 거쳐 83.6%(진단 4년 후)로 하락했다. 질병에 걸리지 않았어도 나이 효과 등으로 경제활동참가율은 시간이 지날수록 완만하게 줄어들지만, 감소폭이 중증질환군에 견줘 절반 정도다.

한번 중증질환에 걸리면 노동자의 소득은 꽤 오랫동안 줄어들었다. 중증질환군의 연간 개인 노동소득은 질병을 진단받기 전에는 해마다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1977만원(진단 1년 전)으로 최고점을 찍었다. 그러다 질병 진단을 받자마자 감소세로 돌아서더니 3년 후 1565원까지 쪼그라들었다. 비중증질환군에서 같은 시기 1926만원에서 1876만원으로 서서히 줄어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는 두 집단의 소득 격차로 이어졌다. 질병을 진단받기 전에는 중증질환군이 노동소득을 두고 비중증질환군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으나, 한번 질병에 걸린 뒤에는 늘 더 낮은 소득수준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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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업자에게 질병은 폐업

질병은 노동자 가족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중증질환군의 상대빈곤율(가구 근로소득이 기준 중위소득 50%를 밑도는 비율)은 질병 진단 직전 해 9.0%에서 진단 시점에 15.2%로 뛰더니 4년 뒤에는 22.0%가 됐다. 반면 비중증질환군의 상대빈곤율은 같은 시기 10.7%→10.2%→15.1%로 상대적으로 변화폭이 작았다.

김수진 부연구위원은 “중증질환 발생에 따른 경제활동의 감소와 빈곤은 3년차 정도에 가장 크고 이후에 회복됐다”며 “보통 10개월 정도 치료받은 뒤 개인의 선택에 따라 요양하거나 일자리를 구하는 데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결과 등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아픈 노동자의 경제적 지위가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경로도 들여다봤다. 2018년 6~9월 중증질환에 걸렸던 노동자 16명의 심층 면담을 통해서다. 몸에 이상 신호가 왔을 때 노동자들은 일단 참다가 도저히 일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후 병원을 찾았다. 일용직 노동자나 자영업자에게는 하루 치의 소득 손실이, 정규직 노동자는 눈앞에 쌓인 업무와 상사의 눈치가 통증보다 더 걱정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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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을 진단받은 후 직장에 다니고 있던 노동자 12명 중 보험회사 정규직 1명(폐암)만 유급 질병휴직 9개월을 받았다가 치료 후 복직했다. 또 다른 정규직(유방암)은 8개월의 무급병가를 받았으나 치료 기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해 퇴사하고, 한 비정규직(위암)은 3개월의 무급병가 후 복직하지 않아 퇴사 처리됐다.

그나마 이들은 무급이라도 병가를 냈고, 퇴사도 스스로 결정한 경우다. 다른 정규직은 병가 규정이 있어도 치료에 3개월, 6개월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간접적으로 퇴사 권고를 당했고, 비정규직은 퇴사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자영업자에게 질병은 곧 폐업이다. 4명 모두 장사를 접었고 현재 실직 상태다.

누군가는 일터에 남고 누군가는 일터를 떠났지만 똑같이 소득 공백의 위기를 맞았다. 건강보험제도에서 병원비 일부를 지원해주지만 나머지 의료비와 생활비가 필요했다. 이들은 저축, 민간 보험금, 가족의 지원, 퇴직금, 부동산 처분, 대출까지 모든 자원을 스스로 동원해 버티다가 결국 가난해졌다.

노동자들이 회복한 뒤 다시 일을 시작하기도 쉽지 않다. 질병 진단 후 6개월~15년이 된 이들 중 회사에 복직한 정규직 1명을 제외하고는 현재 무직이거나 저임금 일자리로 이동했다. 정규직 사무노동자이던 30대(뇌혈관 질환)는 아르바이트하며 구직 중이고, 정규직 택시 노동자이던 50대(심근경색)는 경비업체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출근해도 일 못하는 ‘프리젠티즘’

16명의 아픈 노동자가 빈곤해지는 경로를 보면 공적 영역에서 ‘소득안전판’은 아예 작동하지 않는다. 기업 복지의 최선은 무급병가였고, 국가 복지의 최선은 최빈층으로 떨어진 이들을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해주는 정도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업무 외 부상·질병 관련 휴직·휴가(병가제도)가 의무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득 상실분에 대한 기업·국가 차원의 현금 보상(유급병가·상병수당)도 없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왜 노동자가 아파서 쉴 때 돈을 받아야 할까. 누구나 아프면 실직과 소득 감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충분한 치료를 받아 빠르게 회복하고 더 위험한 질병을 예방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아팠을 때 제대로 치료받을 권리는 기본권이다.

기업에도 필요한 일이다. 회사에 출근했지만 몸이 아파서 정상적으로 일하지 못하는 상태인 ‘프리젠티즘’은 노동생산성을 떨어뜨린다고 알려져 있다. 2014년 영국 경제분석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의 연구에 따르면 병가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 작업장은 결근율은 낮아졌지만, 결과적으로 더 많은 노동자가 아파도 일터로 나오게 되면서 생산성이 떨어졌다.

2010년 국제노동기구(ILO)에서 나온 논문에는 “일하면서 아플 때의 생산성 손실이 질병 관련 결근으로 인한 생산성 손실보다 최대 3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구체적으로 분석돼 있다. 또 유급병가를 주는 회사의 산업재해 발생률이 그렇지 않은 회사보다 낮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원종욱 연세대 보건대학원장은 “산업재해로 인한 질병은 전체의 10%도 안 되고 나머지는 개인 질병”이라며 “인구 감소 국면에서 노동력을 확보하는 측면에서도, (업무 외 부상·질병에 대한) 유급병가를 통해 노동자가 조기에 제대로 치료받고 노동시장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아픈 노동자가 감염 확대시켜

프리젠티즘은 사회적 비용을 키우기도 한다. 2009년 미국에서 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H1N1)로 700만 명이 감염된 사례가 대표적으로 제시된다. 유행성 전염병과 경제위기가 함께 발생했을 때 유급병가를 사용할 수 없었던 대다수 아픈 노동자들이 무리하게 출근하다가 감염이 확대됐다는 분석 결과가 있다. 더군다나 사회보장제도가 취약한 한국에서 유급병가의 부재는 경제적 불평등과 건강 불평등을 더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 유급병가가 노동자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의무로 인식돼야 하는 이유다.


외국에선 논의 방향이 정반대


프랑스 “과도한 병가를 줄여달라”


외국에서도 유급병가는 주요 노동 현안이다. 다만 논의 방향은 한국과 정반대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 2월 노동자의 과도한 병가 사용에 따른 사회적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방안을 발표했다. 병가 중인 노동자가 재택근무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정부가 인용한 민간 연구소의 보고서는 민간부문 노동자는 1년에 평균 17일, 공공부문 노동자는 26일 병가를 내고 있고, 이 때문에 연간 1080억유로(약 138조원)가 지출된다고 분석했다.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는 병가를 ‘특별 휴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프랑스 노동자는 연 5주의 유급휴가와는 별도로 1~3년간 병가(지난 1년간 800시간 이상 근무시)를 낼 수 있다. 이 기간 국가는 상병급여(질병수당)를 지급하고, 거기에 기업은 부족분을 채워 임금을 보장해준다. 정부 발표에 노동계는 강력 반발하고 있다.
일찍이 유급병가제도를 도입한 국가들에서는 2000년대 들어 노동자의 병가 오·남용, 근로 의욕 저하, 정부 재정 부담 등의 문제가 제기돼왔다. 이는 유급병가제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각국의 고민으로 이어진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유급병가가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국가는 한국 외에 캐나다, 아일랜드, 일본, 포르투갈, 멕시코, 미국이다. 이 중 캐나다, 미국, 포르투갈은 질병으로 해고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과 달리 무급병가를 법적으로 의무화하고 있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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