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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셈법에 빠져 멈춰선 ‘후속 법안’

“누가 나서야겠지만…” 1년 뒤 국회의원 선거 눈치 보며 서로 미루는 정치인
등록 2019-04-24 10:53 수정 2020-05-03 04:29
4월11일 기자회견을 연 정의당 여성위원회.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4월11일 기자회견을 연 정의당 여성위원회.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1953년 제정된 뒤 형법상 낙태죄는 사실상 죽은 법이었다. 낙태 시술 7만 건당 검찰 기소가 한 번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는 이를 뒷받침했다(임웅 성균관대 교수, ‘낙태의 비범죄화에 관한 연구’). 예외적 허용을 담은 모자보건법도 사회적 규범으로 기능하기에는 흠결이 뚜렷했다. 이 법은 1973년 계엄령 아래 비상국무회의를 통해 전격적으로 제정됐다. 졸속으로 탄생한 법에는 기본적인 인권의식조차 담기지 못했다. 독일 나치의 단종법에서 출발한 일본의 우생법을 바탕으로 한 법률이었다. 일본은 1996년 우생 조항을 삭제했지만, 모자보건법에는 ‘우생학 조항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 ‘본인이나 배우자가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등 의학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폐기된 개념이 그대로 남았다.

‘신속’과 ‘의견 수렴’이 함께

껍데기만 남은 법이었지만 존재만으로도 개별의 삶을 옥죄었다. 결국 헌법재판소가 나섰다. 헌재는 4월11일 여성의 자기결정권 침해를 이유로 형법상 낙태죄 조항(제269조 1항, 제270조 1항)에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법률 공백을 우려해 2020년 12월31일까지 현행법 효력 기한으로 뒀다. 임신중지(낙태) 허용 기간을 태아가 여성의 몸에서 분리돼 생존할 수 있는 임신 22주로 하는 등 사실상 기준도 제시했다.

자연스레 공은 국회로 넘어왔다. 하지만 사법부의 결단 앞에 입법부는 주춤하고 있다. 내년 4월15일로 예고된 제21대 국회의원선거 때문이다. 특히 8할을 차지하는 양대 정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표 셈법에 갇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 헌재 결정 당일 두 정당의 대변인 성명은 당내 복잡한 상황을 짐작게 한다. 이해식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헌재의) 결정을 존중하며, 국회는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법 개정 등 신속한 후속 조치에 나서야 한다”고 논평했다. 흔한 ‘환영’의 표현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다만 ‘신속한 조치’를 명시했다는 점에서 관련 상임위원회인 보건복지위원회나 여성가족위원회에서 개정안을 발의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실제 일부 의원실에서는 개정안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헌재 결정이 있고 나흘 뒤인 4월15일, 총선 1년을 앞두고 당은 신중론으로 정리하는 분위기다. 당내 사정에 밝은 한 당직자는 “(당 대변인의 성명에서)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한다는 대목이 신속한 조치라는 문구와 같이 나왔다는 점을 봐야 한다. 의견을 수렴하겠다면서 신속하게 조치하겠다니 앞뒤가 맞지 않은 표현이다”라고 말했다.

자유한국당도 몸을 사리고 있다. 같은 날 전희경 대변인은 “각계의 의견을 경청하고 충분한 논의와 심사숙고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극우의 표심부터 단단히 결집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괜히 먼저 나섰다가 표를 잃게 된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자유한국당 한 수도권 중진 의원은 “현실적으로 보수 기독교계가 주요한 정치 기반인 한국당에서 누군가 발의하겠다고 나서기 어렵다고 본다”며 “의견 수렴 과정만으로도 최소한 올해는 넘길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거대 정당의 소극적인 태도는 2010년의 학습효과이기도 하다. 그해 4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홍일표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의원은 ‘사회·경제적 사유’를 허용 요건으로 추가하고 ‘임신 12주 이내’라는 기간을 규정하는 내용을 담아 모자보건법 제14조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하지만 당시 개정안은 심의조차 되지 못했다. 일부 산부인과 의사와 개신교계가 중심이 된 ‘낙태반대운동연합’ 등의 거센 반발 때문이었다. 결국 2년 동안 국회 계류 끝에 자동 폐기됐다. 홍 의원은 단체의 다른 이름인 ‘프로라이프’를 뚜렷하게 기억했다. 홍 의원은 “나는 천주교 신자다. 생명 존중 관점에서 봐도 모자보건법은 문제가 있었다”며 “실정에 맞게 법률안을 개정하면 오히려 무분별한 낙태를 줄일 수 있다는 뜻에서 대표 발의를 했다”고 말했다(홍 의원은 낙태와 관련해 논문을 발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홍 의원의 발의안을 보면 발의안에 이름을 올린 의원들은 강기정·유성엽·이경재 등을 제외하고 9명이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정당 소속이었다.

내년 초도 어려울지도

지역구 현장에서 낙태 이슈를 대하는 태도는 노골적이다. 내년 총선 출마 준비를 하는 수도권의 한 정치권 인사는 “낙태죄를 폐지하겠다고 나서면 종교계 눈치를 보면서 선거를 치러야 한다”며 “최근 지역을 돌아보면 교회는 무조건 반대, 여성들은 무조건 찬성이다. 결과적으로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선거 때는 찬성보다 반대 목소리가 더 크다. 치열하게 맞붙어야 하는 지역에서는 당연히 큰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당을 불문하고 지역구마다 사정은 다르지 않다. 겉으로는 몰라도 선거가 끝난 다음 처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게 인지상정이다”라고 했다. 과거 총선에서 간발의 차이로 낙선한 적 있는 그가 유달리 여론에 민감한 탓도 있지만, 낙태 이슈로 지역구 교회 표심을 잃으면 금배지를 달기 어려운 현실에서 나온 분석이다. 그 자신도 지난 총선에서 주말이면 교회 다섯 곳을 돌았다.

천주교·개신교계가 헌재 결정 당일 내놓은 성명만 보면 앞선 기득권 거대 정당의 눈치 보기는 언뜻 자연스러운 순서로 보인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이날 김희중 대주교 명의로 “낙태는 태중의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죄이며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교회의 가르침에는 변함이 없다”며 “이번 결정은 수정되는 시점부터 존엄한 인간이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존재인 태아의 생명권을 부정한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천주교계가 신자 100만 명의 서명을 헌재에 전달한 게 지난해 3월이다. 개신교계가 결집한 ‘낙태죄폐지반대 전국민연합’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존중이라는 헌법 정신에 입각해볼 때 낙태죄는 존치돼야 한다”며 “낙태죄는 태아의 생명권뿐 아니라 여성의 건강권을 지켜주고,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전적인 책임으로부터 보호하는 법이다. 낙태가 허용되면 그로 인한 의료 보건적 부작용, 정신적 피해가 더욱 전적으로 여성들에게 전가된다”고 주장했다.

수백만의 이름을 앞세운 종교계 입장 표명에 결국 낙태죄 폐지안 등의 발의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가 돼버린 걸까. 여권 내에서는 ‘여성’ ‘비례’ 등 일부 의원을 지칭하는 듯한 말이 조심스럽게 오간다. 이들이 총대를 메주기 바라는 눈치다. 본격적인 총선 체제에 들어가면 올해를 넘기는 것은 물론이고 내년 초는 더 어려울 것이라는 솔직한 전망도 나온다.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의 한 의원실 보좌관은 “상임위 차원에서 어느 누구도 먼저 나서지 않고 있다는 것만 봐도 이번 이슈가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알 수 있다”며 “단 한 표라도 도움이 됐다면 경쟁적으로 먼저 나섰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내에서 전략통으로 분류되는 한 의원은 과 한 통화에서 “누가 나서야겠지만…”이라며 말을 아꼈다. 이어 “예전 같으면 비례대표의원 중 한 사람이 총대를 멨겠지만 (비례대표) 대다수가 지역을 정해 한 표라도 얻어보려고 뛰기 시작한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나서기를 요구하기도 어렵다”며 “특히 제19대 대통령선거처럼 우호적인 여론 지형에서 총선이 치러질 가능성이 높지 않다. 선거를 치러야 하는 처지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고 덧붙였다.

1972년 미국에서 들여온 가족계획 사업용 시술 차량. 박정희 독재정권은 1973년 모자보건법 제정 뒤 1974년을 ‘임신을 안 하는 해’로 선포했다. 서울특별시 서울사진아카이브

1972년 미국에서 들여온 가족계획 사업용 시술 차량. 박정희 독재정권은 1973년 모자보건법 제정 뒤 1974년을 ‘임신을 안 하는 해’로 선포했다. 서울특별시 서울사진아카이브

양당 나서지 않으면 그만큼 혼란 불가피

하지만 양당이 나서지 않으면 그 기간만큼 낙태를 둘러싼 혼란은 불가피하다. 형법상 낙태죄 폐지 법안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준비 중이라는 복수의 민주당 의원실과 통화했다. “준비 중”이라고 할 뿐 구체적인 일정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들은 모두 지역구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양당이 정치공학 셈법에 빠져 방울만 만지작거리는 동안 정의당이 나섰다. 당대표인 이정미 의원이 낙태죄 폐지를 담은 1호 형법 개정안와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것이다. 법안에서 ‘낙태’라는 표현은 ‘인공임신중절’로 바꿨다. 모자보건법상 임신중지 허용은 임신 12주 내에는 본인 의지에 따라, 14~22주 사이에는 사회·경제적 사유로 가능하도록 했다. 특히 기존에는 배우자 동의가 있어야 했지만 이를 삭제했고, 강간과 준강간 등 성폭력 범죄의 경우 이로 인한 행위로 임신했다고 인정할 만한 이유가 있으면 임신중지가 가능하도록 개정했다. 발의안에는 이 대표를 포함한 정의당 의원 6명(심상정·김종대·윤소하·여영국·추혜선 의원)과 함께 바른미래당 김수민·채이배 의원, 민주평화당 박주현 의원, 무소속 손혜원 의원 등이 참여했다. 함께 발의한 의원은 무소속과 정당 세 곳을 아우르며, 정치 성향으로 진보와 보수를 망라했다.

이정미 의원에게 종교계의 항의를 받고 있지 않은지 물었다. 이 의원은 “당장 피부로 (압박을) 느낄 만큼은 아니다”라며 “헌재의 결정이 있어서인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헌재의 결정이 국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모양새가 되면서 종교계에서도 1호 개정 법률안에 대해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의당 “종교계 반응 직접적이지 않아”

정의당만이 아니라 법안을 공동 발의한 다른 당 의원실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당의 한 보좌관은 지역 여론을 묻는 질문에 “예전보다 종교계 반응이 직접적이지는 않다. 더 두고 봐야겠지만 지역에서도 지금까지는 크게 항의가 없었다”고 말했다.

1953년 국회에서 형법이 제정되면서 낙태죄가 포함됐다. 이 때 ‘여성의 사회적·경제적 지위 개선’을 주요 논거로 낙태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제안이 나와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다. 그때가 벌써 66년 전 일이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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