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낙태죄 폐지는 ‘끝’ 아닌 ‘시작’

미국·캐나다는 임신중절 병원 테러, 프랑스는 엄격한 임신중지 허용 기간 문제 등

폐지국에서도 고민은 계속돼
등록 2019-04-22 18:19 수정 2020-05-03 04:29
임신중지권 활동가인 메건 스콧이 아일랜드의 성녀 복장을 하고 있다. 이 사진은 2018년 세계보도사진대회 컨템포러리 이슈 부문 스토리사진 1위를 차지했다. AP 연합뉴스

임신중지권 활동가인 메건 스콧이 아일랜드의 성녀 복장을 하고 있다. 이 사진은 2018년 세계보도사진대회 컨템포러리 이슈 부문 스토리사진 1위를 차지했다. AP 연합뉴스

“임신중지 금지와 다름없다. 불과 몇 달 전, 주정부는 임신 15주 이후의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가 연방법원에서 위헌판결을 받았는데, 임신 6주 이후라는 더 강화된 법을 내놨다. 우리는 계속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완강한 임신중지 반대자가 된 위헌 제청자처럼

지난 3월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 기반을 둔 낙태권 옹호 단체 재생산권리센터(CRR·Center for Reproductive Rights)의 대표 낸시 노섭은 현지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강한 불만을 나태냈다. 이날 공화당 소속 미시시피주의 필 브라이언트 주지사는 임신부의 태아에서 심장박동이 포착된 뒤의 모든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태아의 심장박동은 임신 6주째부터 초음파로 들을 수 있다. 여성인권단체는 자신의 임신 사실조차 모를 수 있는 초기 단계의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미시시피주법이 ‘사실상 임신중지 금지’라며 반발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1973년 “낙태죄 처벌이 수정헌법 제14조에서 명시한 사생활 보호에 관한 헌법적 권리를 침해한다”며 위헌 판결했다. 당시 소송을 제기한 사람이 제인 로(본명 노마 매코비)인데, 그녀는 성폭행을 당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돼 임신중절수술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웨이드 검사는 성폭행에 대한 경찰 수사 기록이 없고, 임신부가 위독하지 않다는 이유로 임신중절수술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맞섰다. 미국에선 낙태죄를 폐지한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제소인 로와 검사 웨이드의 이름을 따 ‘로 대 웨이드’ 판결이라고 한다. 제인 로는 재판에선 이겼지만 지난한 재판 기간 동안 아기를 낳아 입양 보냈다. 낙태죄 폐지의 주인공인 로가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가 돼 완강한 임신중지 반대자가 된 것은 아이러니였다. 그녀는 201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임신중지 반대를 고수했고, 여러 반임신중지 집회에서 목소리를 냈다.

미국 낙태죄의 역사도 혼란스러운 제인 로의 삶을 닮았다. 1973년 연방대법원 판결에 따라 미국은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모든 주와 연방의 법률을 폐지해나갔지만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46년이 지난 지금까지 임신중지를 둘러싼 미국 사회의 갈등은 ‘진행형’이다. 미국 정치권에선 임신중지 찬성 여부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척도가 된다. 대개 민주당 성향 유권자는 임신중지에 찬성하고, 공화당 성향 유권자는 반대한다. 선거철이 되면 후보들은 임신중지와 관련한 견해를 밝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선 후보 당시 “나는 생명을 존중한다. 생명을 존중하는 법관을 명할 것이며, 주정부가 임신중지를 엄격하게 규제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공화당을 비롯한 보수 진영은 낙태죄 폐지 판결을 뒤집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지 언론 보도를 보면, 올해 들어서만 연방대법원의 판결 취지에 반하는 임신중지 금지법 도입을 시도한 주가 미시시피, 플로리다, 텍사스, 오하이오 등 11개 주에 이른다. 모두 공화당 주지사가 집권하고 있다.

민주당 소속 주지사가 집권 중인 주도 임신중지 논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다. 임신중절을 하는 의료기관에 연방정부 예산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캘리포니아주는 3월에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공화당 소속인 개빈 뉴섬이다.

임신중지 논란이 이렇게 뜨거운 미국에선 임신중절을 하는 의료기관과 임신중지 여성을 대상으로 한 테러 등 ‘임신중지 혐오 범죄’도 심각한 사회문제로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위협하고 있다. 2015년 11월 콜로리다주 콜로라도스프링스에 있는 ‘가족계획협회’(Planned Parenthood) 소속 한 임신중지 클리닉에 50대 남성 로버츠 루이스가 들어와 총기를 난사했다. 이 사고로 경찰을 비롯한 3명이 사망했고, 9명이 다쳤다. 앞서 다른 임신중절 의료기관에서도 임신중지 반대 시위를 한 루이스는 자신을 “태아의 생명을 수호하는 전사”라고 했다.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옹호하는 전미임신중지연합(National Abortion Federation)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1977년 이후 임신중절을 한 의료기관 관계자에게 살해 시도 17건과 살해 위협 383건이 있었다고 파악했다. 보수단체들은 물리적 공격뿐만 아니라 임신중절을 받거나 상담하기 위해 의료기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촬영하고, 개인정보를 온라인에 유포하는 등 심리적인 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미국 공화당 소속 마이크 드와인 오하이오 주지사가 4월11일 임신 6주 이후 임신중지를 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에 서명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미국 공화당 소속 마이크 드와인 오하이오 주지사가 4월11일 임신 6주 이후 임신중지를 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에 서명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임신중절 위해 네덜란드로 가는 여성들

미국 사례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명확하다. 낙태죄 폐지는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으로 한국 사회는 여성의 임신중지권과 재생산권 보장을 위한 첫걸음을 뗐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헌재 결정으로 위법과 합법의 논란은 마침표를 찍었지만, 도덕적 논란과 가치 투쟁은 미국처럼 혼란스러운 전철을 밟을 수 있다. 미국 재생산권리센터의 활동가 베로니카 세르나다스는 과 한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이렇게 조언한다. “한국 정부가 임신중지를 범죄시하는 현재의 억압적인 법을 즉각 개정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개정 법률은 여성의 재생산권과 자율권을 존중하고, 이를 해치는 모든 위협을 차단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오랫동안 유지된 낙태죄 때문에 임신중지한 여성에게 덧씌운 낙인을 줄이고, 안전한 임신중지를 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 이런 당부는 미국에서 연방대법원의 판결에도 위협받는 여성의 임신중지권 때문이다. 미국에선 2011~2016년 임신중절 의료기관 162곳이 문을 닫았다. 대부분 임신중지에 반대하는 공화당 소속 주지사가 집권한 지역에 있는 의료기관이다.

미국처럼 극렬하지는 않지만 앞서 낙태죄를 폐지한 유럽 국가들도 임신중지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1975년 낙태죄를 폐지해 임신중절 비용이 전액 국민건강보험으로 지원되고, ‘미프진’(임신중절 약)을 처음 만들어 시판한 프랑스에선 다소 엄격한 임신중지 허용 기간(임신 12주)이 과제로 남아 있다. 임신 12주가 지났지만 임신중지를 원해 임신 24주까지 임신중절을 받을 수 있는 네덜란드로 향하는 여성이 1년에 5천 명에 이른다. 프랑스 밖에선 보험 지원을 받을 수 없고 체류비까지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력이 없으면 임신중지를 할 수 없다.

임신 24주까지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네덜란드에선 임신중절 의료기관의 접근성이 낮은 것이 문제다. 네덜란드 여성은 5일의 숙고 기간을 거쳐 임신중지 결정을 내리면 국가가 승인한 전국 14개 의료기관에서만 임신중절을 받을 수 있다. 의료기관이 부족해 대기시간이 길다. 또 네덜란드에선 산부인과 전문의라고 하더라도 정부가 허락하지 않으면 임신중지 약도 처방할 수 없다. 이를 어기면 최대 4년의 징역형에 처해진다. 네덜란드 활동가들은 지정 진료소뿐만 아니라 일반 의사도 임신중지 약을 처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한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 낙태죄 폐지 운동에 동참한 ‘파도 위의 여성들’(Women on Waves) 대표 레베카 곰퍼츠는 과 한 인터뷰에서 “낙태죄 폐지를 갈망하고 헌신했던 한국의 모든 여성과 인권단체에 축하 인사를 건네고 싶다”고 했다. 산부인과 의사이자 여성 재생산 건강권 활동가인 곰퍼츠는 낙태죄 폐지 이후 한국 사회가 주목해야 할 부분을 짚었다. “향후 한국은 임신중지에 대한 모든 여성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활동 경험을 돌이켜보면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성이 낮으면 미등록 체류 여성이나,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빈곤층 여성의 건강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

루마니아, ‘부족한 성교육’ 문제

1989년 12월 낙태죄를 폐지한 루마니아에선 ‘부족한 성교육’이 문제로 떠올랐다. 루마니아에선 1966년 임신중지금지법이 제정됐지만 많은 여성이 불법으로 임신중절을 받는 과정에서 죽는 일이 급증했다. 해마다 500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고됐다. 1989년 12월 루마니아 혁명으로 독재정부를 몰아내고, 낙태죄를 폐지했다. 낙태죄로 큰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어 루마니아 사람들은 낙태죄 부활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일부 보수 성향의 종교계가 “아이들의 순수함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성교육에 반대한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선 낙태죄가 폐지된 뒤에도 정치적 이유로 낙태죄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 여성들이 직접 나서서 이 문제를 사회 의제로 끌어올렸고 헌법재판소의 헌법 불합치 결정까지 이끌어냈다. 하지만 낙태죄 폐지는 완성이 아니라 첫출발이다. 외국 사례를 보면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여성의 삶이 더욱 나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들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잘 알기 때문에 옳은 방향으로 함께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보다 앞서 낙태죄를 폐지한 유럽 국가들을 방문하고 (봄알림)을 쓴 이민경씨가 에 한 말이다.


캐나다임신중지권연대 조이스 아서 대표 인터뷰


“여성을 믿어라”


“앞으로 임신중지를 제한하는 어떤 법도 통과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한다.”
한국의 낙태죄 폐지 소식을 전해 들은 캐나다임신중지권연대(Abortion Rights Coalition of Canada)의 조이스 아서 대표는 “낙태죄 폐지는 세계적인 흐름이다. 한국이 여성의 권리와 존엄성을 인정하는 국가가 돼 너무 기쁘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감시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조이스 아서는 오랫동안 임신중지권을 위해 싸워온 활동가다. 1988년 처음 여성단체 활동가가 된 뒤 1995년부터 10년 동안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임신중지권 단체에 몸담았다. 2005년 임신중지와 관련한 여성의 법적 권리와 재생산권 향상을 위해 캐나다임신중지권연대를 만들어 현재까지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캐나다는 여성의 임신중지를 제한하는 그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서는 과 한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캐나다에서 낙태죄가 폐지됐던 1988년을 언급했다. “1969년까지 임신중지를 엄격하게 금지했던 캐나다는 임신부에게 건강 문제가 있을 때만 임신중지할 수 있도록 일부 법을 완화했다. 이 움직임은 여성의 권리 보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의료인을 위한 조치였다. 캐나다 연방대법원은 1988년에야 여성의 헌법적 권리를 침해하고 건강 불평등을 초래하는 낙태죄를 완전히 폐지했다.” 캐나다의 낙태죄 폐지는 미국보다 15년 늦었지만 지금은 가장 앞선 국가로 평가받는다.
아서는 ‘임신중지권 완전 보장’을 강조했다. “임신중지를 제한하는 모든 법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싸워야 하고, 절대 타협해선 안 된다. 현재 한국은 1988년의 캐나다와 똑같은 상황이다. 한국은 이 귀한 진보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캐나다는 31년 동안 임신중지를 제한하는 어떤 법도 없었지만 문제가 없었다. 임신중지를 처벌하는 법이 필요하지 않음을 방증한다. 임신중지는 다른 보건의료 서비스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임신중지를 범죄시하면 여성의 건강과 재생산권이 침해당할 뿐이다.”
아서는 진보의 원동력으로 ‘여성에 대한 신뢰’를 꼽았다. “임신중지가 논란이 되는 사회를 보면 여성에 대한 ‘불신’이 저변에 깔려 있다. 사회가 여성을 믿고 지지해야 한다. 올바른 피임법을 알려주고, 평등한 교육과 경제적 기회를 누리게 하면 여성은 행복한 환경에서 자녀를 낳아 기를 수 있다. 이는 가족과 사회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낙태죄가 폐지되면 임신중지가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있지만 여성들도 신체에 무리가 가는 임신중지를 원하지 않음을 믿어달라고 아서는 강조했다. 실제로 캐나다에선 1997년 이후 임신중지 건수가 지속적으로 줄었다. 캐나다 보건 당국의 가장 최근 자료를 보면 2011년 10만8844건이던 임신중절 건수는 2016년 9만7764건으로 줄었다.
이런 캐나다도 임신중지 여성에 대한 낙인과 임신중지 의료기관에 대한 폭력 행위 등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아서는 “임신중지한 여성에 대한 낙인 문제가 심각하다. 보수 종교계와 가부장적 관습에 근거한 임신중지 반대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여성들이 쟁취한 권리를 다시 앗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인권에 반하는 반동세력의 ‘백래시’(반격)로 퇴보하는 국가들도 있으므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임신중지 혐오 범죄에 대해서는 “정치권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치인들은 임신중지 혐오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동시에 가해자들이 처벌받고 대가를 치르도록 법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이 앞서서 낙태죄 폐지와 법제도를 정비한 캐나다의 사례를 잘 참고하면 좋겠다. 여성의 건강을 위협하고 권리를 제한하는 낙태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여성을 믿어달라.” 아서가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이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아래 '후원 하기' 링크를 누르시면 후원 방법과 절차를 알 수 있습니다.
후원 하기 http://naver.me/xKGU4rkW
문의 한겨레 출판마케팅부 02-710-0543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