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원 무용단원인 ㄱ씨는 지난 8월부터 전통 무용 전공자로서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살았다. ‘국립국악원 무용단 갑질·인권탄압 사태 비상대책위원회’에 속한 뒤부터 연습복 위에 ‘갑질행위 근절하라 인권존중 요구한다’고 적힌 조끼를 입는 일이 잦았다. 매일 아침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국립국악원 입구에서 30분씩 1인시위를 했다. 점심에는 단원들과 함께 집회를 했다. 토요일에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위를 했다. 지난 5월 2009년 국립국악원 입사 이래 상급자에게 당한 성희롱을 고발한 #미투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ㄱ씨 말고도 성희롱을 당했거나 술자리 접대를 종용당했다는 다른 단원들의 고발이 쏟아졌다.
“지속적이라 하려면 20년은 당해야 하나요?”미국의 크리스틴 포드가 30년 전 고등학교 친구의 성폭행 미수 사실을 그가 대법관으로 지명됐을 때 고발한 것처럼, 가해자로 지목된 상급자가 국립국악원 무용단 감독 공모에 지원한 게 국립국악원 #미투의 계기가 됐다. 단원 41명 중 38명이 상급자의 감독 선임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호소문에 서명했다. 김청우 비상대책위 위원장은 “무엇이 성폭력인지, 무엇이 위계 폭력인지 무지했다. #미투를 통해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일이 우리 무용단 내부에선 늘 겪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미투가 아니었으면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위계 문화에서 일어나는 성폭력과 조직 내 갑질을 없애고 ‘새로운 세상’을 열려던 국립국악원 #미투는 지난 11월7일 벽에 부딪혔다. 문화체육관광부 감사관실은 이날 “성적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낄 수 있는 부적절한 발언으로 판단되지만, 징계 시효(2년)가 경과되고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할 때 징계를 요구할 정도의 비위로 보기 어렵다”는 감사 결과 보고서를 국립국악원에 통보했다. 국립국악원은 즉시 공간 분리를 해제했고, 현재 단원들은 가해자로 고발한 상급자를 직장에서 대면하고 있다. 박성락 국립국악원 기획관리과장은 “감사 결과가 성희롱이 아니라고 해서 왔다. 공간 분리는 성희롱에 대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체부 감사 결과에서 성희롱 관련 부분은 외부 조사위원의 조사 의견과 정반대다. 외부 조사위원들은 “‘남녀고용평등법’과 ‘국악원 성희롱, 성폭력 예방 규정’에서 정의하는 성희롱으로 판단된다”고 적었다. ㄱ씨를 비롯한 단원들이 4개월여간 폭염을 견디며 집회하고 대중에게 노출되는 위험을 무릅쓴 일을 물거품으로 만든 게 지도 감독기관인 문체부의 감사다.
12월3일 만난 ㄱ씨는 2시간 동안 차분히 인터뷰를 하다가도 갑자기 눈물을 쏟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단원들의 진술을 ‘제3자’라는 특정할 수 없는 이의 진술로 모조리 배척한 문체부의 감사 결과와 달리, 그에게 ‘성희롱’의 상흔은 현재진행형으로 보였다. 이번 조사에서 2009년부터 9년 동안 가해자로 지목된 상급자로부터 언어적 성희롱 등을 당해왔다고 진술한 ㄱ씨가 보여준 2010~2018년 일기장에는 거의 매일 상급자로부터 당한 일의 고통을 토로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9년 전 일을 들춰낸 게 아니에요. 9년 전부터 #미투 직전까지도 계속된 일을 얘기한 거예요. 징계 시효가 지났다고요? 지속적으로 당했다 하려면 20년은 당해야 하나요?” 단원들의 #미투 이후 달라진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국악원의 박성락 과장은 “공연 문화의 전반적인 개선을 위해 팀을 꾸릴 계획”이라고 했으나, 그는 팀 발족 시기조차 말하지 않았다.
성폭력 발생 기관에 의한 2차 피해 많아은 지난 3월 정부가 설치한 ‘공공부문 성희롱·성폭력 특별신고센터’ 접수 사건의 피해자 직접 지원을 위해 운영한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성폭력피해자집중지원팀’ 관리 사례 36건을 전수 분석했다.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뒤 진행된 일을 포함한 ‘#미투 사건 처리 결과 분석’ 자료다. 자료를 보면, 전체 피해자 58명 가운데 2차 피해를 경험한 이는 55명(95%)이었다.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권력형 성폭력은 사실상 ‘원피해+2차 피해’로 진행되며, 2차 피해 대책이 필수 불가결함을 시사한다. 또 ‘가해자에 의한 2차 피해’(45명·82%)보다 ‘성폭력 발생 기관에 의한 2차 피해’(51명·85%)를 경험한 이가 더 많았다.
국립국악원 단원들은 11월20일 국립국악원장에게 보낸 ‘이의제기서’에서 “사태의 중점을 파악하지 못하는 일방적이고 위계적인 사건 처리 과정으로 2차 피해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무조건적인 공간 분리 해제가 다수의 단원들에게 업무 능력의 상실 및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야기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4월 특별신고센터에 접수된 천안시 충남국악관현악단의 #미투는 아예 ‘2차 피해’에 대한 신고였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 7년 동안 예술감독을 지낸 조아무개씨가 2017년 10월 대전지방법원으로부터 강제추행과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으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은 뒤 벌어진 일이었다. 상반기 #미투 국면에서 단원들이 고발한 상급자는 법원에서 실형이 선고된 사건에 대해 “보기 나름인 것 같다” “사실 여부가 드러난 상태가 아니다” 등 가해 사실을 전면 부정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11월29일 열린 ‘미투 증언대회… 전통예술계는 응답하고 있는가’에서 낭독된 호소글에서 피해자는 “왕으로 군림하며 피해자들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예술감독에게서 벗어나면 끔찍한 악몽의 기억을 지울 수 있을 거라는 우리의 생각은 너무도 어리석은 치기였다”며 “예술감독은 쉽게 떠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분신을 남겨놓고 갔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말한 법의 심판이 나왔는데도 끊임없는 2차 가해로 굴욕감과 모욕감에 숨이 막힌다”고 적었다. 2차 피해를 초래한 상급자의 징계 권한을 가진 천안시청은 이들의 고발이 있은 지 7개월여가 지난 12월4일에야 징계위원회도 아니고 징계위원회 회부 여부를 결정하는 ‘성희롱심의위원회’를 열었다.
왜 조직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편에 서는 것일까. 가해자가 조직 내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분석 결과 36건 가운데, 관계가 밝혀진 33건 모두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상위에 있었다. 특히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수행비서 성폭력 사건처럼 대표이사-인턴, 극단 대표-배우, 부회장-팀장, 교장-교사 등 조직 내 최상위 권력인 경우가 33건 중 거의 절반(16건)에 이르렀다. 가해자의 지위에서 단일 직업으로는 ‘교수’가 10건으로 가장 많았는데, 규모는 작지만 위력이 작동하는 범위를 고려할 때 학과 내 교수의 지위도 ‘최상위’로 판단했다.
대학의 경우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교수를 징계하는 데 소극적이다. 단순히 대학의 ‘의지’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바탕에 ‘구조’ 문제가 깔려 있다. 김엘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교수의 논문(‘교수의 성희롱에 관한 법적 분쟁’)을 보면, 성희롱 혐의를 받는 교수가 원고로서 재판받은 것이 103건으로, 피해자가 원고인 44건의 두 배를 웃돌았다. 이 논문은 “교수의 성희롱에 대한 법적 분쟁은 거의 남성 교수에 의해 제기되고… 교수들이 성희롱 혐의를 받으면 고소, 소송, 소청심사 청구 등의 법적 분쟁을 통해 적극 부인하는 경향이 크고 또한 법적 분쟁을 추진할 시간, 경제력,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인권위 징계 권고, 하 교수 “행정소송 내”지난 3월 피해 학생의 #미투가 나온 하일지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에 대한 학교 쪽의 처분은 전면 중단 상태다. “동백꽃은 처녀가 순진한 총각을 성폭행한 내용이다. 얘도 미투 해야겠네” “안희정 성폭력 사건은 피해자의 질투심 때문에 생겼다” 등 #미투 폄하 논란을 부른 바로 다음날인 3월15일, ㄴ씨는 2015년 12월 하 교수로부터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발했다.
국가인권위는 7월 하 교수의 성희롱을 인정해 학교에 징계를 권고했으며, 성추행의 경우 형법상 강제추행에 해당할 수 있다며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ㄴ씨는 “하 교수가 인권위에 대해 행정소송을 낸 것으로 안다. 인권위 결정이 나오면 거기에 맞춰서 징계를 내리겠다고 했던 학교는 이제 검찰 수사 결과를 기다리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은 최근 하 교수의 행정소송 여부에 대해 법률대리인과 학교에 확인했으나 회신이 없었다. 인권위 쪽은 “성폭력 사안은 공식적으로 확인하지 않는 것이 내부 방침”이라고 했다.
동덕여대 관계자는 학교가 학생들의 요구대로 파면이라는 최고 수위 징계를 내려도 법원에서 처벌 수위가 낮으면 하 교수가 제기할 ‘역고소’를 우려하고 있었다. “당연히 교육부 교원소청심사위원회나 소송을 통해 학교로 소송이 들어올 거라 예상한다. 미지급 임금 등 학교가 치러야 할 비용이 있을 것 같다. 이 경우 거의 다 학교를 상대로 소송하는 것으로 안다.”
누구 탓을 할 수 없고, 어디서부터 뜯어고쳐야 할지 막막한 구조는 그 자체로 성폭력 피해자들의 피해를 키운다. 하 교수 #미투 이후 ㄴ씨는 학업보다 조사받고 수사받는 일이 ‘업’이 됐다. 박아무개 시인이 ‘꽃뱀’이라며 ㄴ씨의 얼굴과 실명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개해 그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기도 했다. 박 시인은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뒤 경찰에서 무혐의 판단을 받은 것을 근거로 피해자들을 ‘무고’라고 모욕해 논란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ㄴ씨는 학교를 영영 떠나게 될까봐 휴학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2015년 피해 이후 나타났던 학교에 가면 온몸에 땀이 나는 ‘신체화 증상’이 재발했다. 위염과 장염도 낫지 않는다. 수면제, 안정제, 항우울제 복용량이 늘었다. 체중이 자꾸 늘어서 걱정이다.”
공공부문 성폭력피해자 집중지원팀이 지원한 36건을 보면 검찰 수사 결과와 법적 판단이 피해자에게 미치는 직접적인 악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에 대해 검찰 수사가 완료된 사례 20건 가운데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4건에 불과했다. 8건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2건은 무죄판결이 났다. 나머지 6건은 재판이 진행 중이다.
성평등센터 “센터 발족 이전은 해당 안 됨”KBS 카메라 기자의 계악직 직원 성희롱 사건의 경우 직장 내 성희롱을 인정한 민사 판결이 지난 2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는데도 “징계시효(2년)가 지났다”는 이유로 징계하지 않았다. KBS는 피해자 ㅊ씨가 3개월이 지난 5월 서울서부지방고용노동청에 △2014년 6월 가해자의 강제추행 사실을 경찰에 신고한 일에 대해 적절한 조사와 징계 또는 이에 준하는 조처를 하지 않은 점 △2018년 2월 직장 내 성희롱을 인정한 확정판결 이후 징계 조처 요구를 이유 없이 거부한 점으로 KBS를 고소한 뒤에야 해당 기자를 타 부서로 전보 조처했다.
조직이 자체 조사 없이 수사기관에 해결의 책임을 떠넘긴 후폭풍은 역시 피해자의 몫이다. 같은 카메라 기자로부터 ㅊ씨 피해 바로 한 달 뒤 술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소한 부현정씨(제1202호 표지이야기 ‘누가 성폭력 피해자 부현정을 무고죄로 몰았나’ 참조)는 경찰 고소에서 성추행 무혐의 처분이 나온 뒤 무고죄 역고소를 당했다. 부씨는 2심까지 유죄판결을 받았다. 부씨 사건에서도 KBS의 자체 조사나 처분은 없었다. KBS가 성평등 조직으로 쇄신하겠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한 KBS ‘성평등센터’는 해당 기자 사건의 경우 “센터 발족 이전에 생긴 일이므로 맡지 않는다”고 밝혔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본지는 지난 12월7일자 “가해자 떠나니 분신이 남았네” 제하의 기사에서 국립국악원 전직 감독대행이 단원들에게 성희롱 발언을 하고 술자리를 강요했다는 국립국악원 무용단원의 발언을 보도했습니다.
이에 대해 해당 감독대행은 단원들에게 성희롱 발언이나 술자리 강요를 한 바 없으며, 문체부 조사 결과 징계를 받은 것은 성희롱 발언이나 술자리 강요와는 관련 없는 사안이라고 알려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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