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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계엄 지침에 5·18 발포 근거인 훈령 쓰인다

현재 적용되는 국방부 <계엄실무편람> 최초 분석… 무기 사용 근거로 5·18 발포 문건 못 박아

박정희·전두환 쿠데타 미화까지… 계엄의 어두운 역사 계승한 합법적 <계엄실무편람>의 민낯
등록 2018-08-14 14:13 수정 2020-05-03 04:29
<font color="#008ABD"><font size="4">계엄의 실체 </font>
착한 계엄은 없다. 계엄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총부리다. 1980년 5월 계엄 속 광주, 군 앞에 아이들은 고개를 숙였다. 학살의 주범 전두환은 “발포명령이 있기는 했나”라고 회고한다.</font>
1979년 12월 전두환(앉은 이 중 한가운데)은 보안사령부 앞에서 쿠데타 성공을 기념해 사진을 찍었다. 전두환은 지금도 역사 앞에 “학살은 과연 있었는가” 되묻는다. 한겨레

1979년 12월 전두환(앉은 이 중 한가운데)은 보안사령부 앞에서 쿠데타 성공을 기념해 사진을 찍었다. 전두환은 지금도 역사 앞에 “학살은 과연 있었는가” 되묻는다. 한겨레

2018년 계엄이 시행된다. 총을 멘 군인이 서울 광화문 광장을 비롯한 전국 대도시 주요 길목을 지킨다. 탱크가 공포 분위기를 더한다. 시위는 멈추지 않고 1차 저지선이 무너졌다. 2선의 군인들에게 실탄이 지급된다. 그다음은?

<font size="4"><font color="#008ABD">5·18이 보여준 계엄의 본질 </font></font>

38년 전 광주로 가보자. 1980년 5월19일, 특전사 소속 차아무개 대위의 자동소총 M16이 불을 뿜었다. 시민을 향한 첫 발포였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주도하에 이희성 계엄사령관 명의로 비상계엄 전국 확대 뒤 이틀 만이다. 유탄에 맞은 김영찬씨는 당시 고3이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광주의 곳곳에서 군의 무차별 사격이 시작됐다. 5월21일 광주 도심 금남로, 한 발에 한 사람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전문 저격 요원이 등장한 것이다. 부상자를 부축하는 시민도 저격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무장헬기 코브라 2대를 광주에 내려보내니 광주 시내에 있는 조선대학교 뒤쪽의 절개지에 위협사격을 하라.”(황영시 계엄사 부사령관)

“코브라로 무차별 사격하라.”(전투교육사령부 김순현 전투발전부장) 학살의 현장에 헬기가 떴다. 위력 시위용이 아니었다. 헬기에서 지상으로 총탄이 쏟아졌다.

그 뒤 헬기 기총소사(비행기에서 목표물을 빗자루로 쓸어내듯 기관총으로 쏘는 일)를 주장하면 음모론자로 치부됐다. 사실로 드러나기까지 37년의 세월이 걸렸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공식적인 피해자 집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망자 166명은 지금까지의 수치다. 비극의 트라우마는 시대를 넘어 계속되는데, 2017년 전두환은 입을 열어 “학살은 과연 있었는가”라고 묻는다. 자신의 회고록에서다. 반란(내란)수괴로 내란·내란 목적 살인 등 유죄를 받았음에도 흔들림이 없다. 1997년 4월 대법원의 판결이니 이미 20년 전에 결론지은 일이다. 그런데도 “발포 명령이 있기는 했냐”며 조롱한다. ‘자위권 발동 문서’처럼 도저히 발뺌할 수 없는 증거가 있는데도 그렇다.

자위권 발동은 1980년 5월22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계엄훈령 제11호’로 하달했다. 하루 전 있었던 자위권 발동을 위한 회의록에 신군부 세력 우두머리 전두환의 이름이 남아 있다. 이희성 사령관은 이를 “계엄군들이 자위권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후환이 두려워서 또는 자위권 자체를 몰라서 자위권을 발동하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므로 그들에게 정당한 자위권 발동을 촉구하는 의미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희성의 ‘촉구’로 그날 전후의 군 민간인 학살은 정당화됐다. 이후 학살은 본격화됐다.

이 사령관의 궤변에서 전두환은 한 걸음 나간다. “계엄군에게 자위권 발동 지시는 불필요한 조치다. 정당방위 목적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자위권조차 필요 없었다는 식으로 자위권 발동을 정당화하는 발언이다.

다시 2018년, 합동참모본부가 펴낸 합법적 계엄 지침인 ()을 보자. 80년 광주처럼 계엄임무수행군 운용의 핵심 중 하나는 무기 사용이다. 현재 계엄 지침에서 무기 사용은 근거를 갖고 있다. 현행 계엄에서는 “계엄임무수행군의 무기 사용은 관계 법령과 계엄 선포시 하달되는 계엄사령관의 훈령에 의한다”고 돼 있다. 중요한 것은 관계 법령과 훈령인 것이다. 이어 “계엄임무수행군이 치안질서 유지, 불법 시위·단체행동의 진압 등 국민과 접촉하는 분야에 있어서의 무기 사용에 관하여는 계엄사령부에서 하달하는 무기 사용에 관한 훈령/지침에 의한다”는 규정도 마련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훈령’이다.

그런데 문제는 에서 교범으로 삼는 훈령의 사례가 다름 아닌 38년 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내놓은 자위권 발동 문서, ‘계엄훈령 제11호’라는 것이다. ‘이희성’이라는 이름은 지워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1980년 계엄도 ‘합법적’ 의 근거 </font></font>
1980년 5월 광주에서 헬리콥터는 비무장 민간인을 향해 기총소사했다. 이를 승인한 것이 지금도 을지훈련에서 쓰이는 계엄 발동 문건이다 한겨레

1980년 5월 광주에서 헬리콥터는 비무장 민간인을 향해 기총소사했다. 이를 승인한 것이 지금도 을지훈련에서 쓰이는 계엄 발동 문건이다 한겨레

그런데도 1980년 5월22일이라는 발령 날짜와 정의, 대상, 시기, 방법, 사후 보고 등은 문서 그대로다. 38년 전 신군부 쿠데타의 내란 목적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쓰인 문서라는 성찰이 있을 리 없다. 이 문서가 들어간 시기는 정확지 않다. 다만 문서가 실제 계엄 훈련에 쓰인 시기는 추론해볼 수 있다.

1984년 을지연습이 종합적인 전국 단위 훈련으로 편성된 이래 군을 중심으로 한 주요 정부 부처 및 지방자치단체는 1년에 한 번 계엄을 훈련해왔다. 을 근거로 해서다. 1984년, 대통령은 전두환이었다. 하지만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나 김대중 국민의 정부, 노무현 참여정부 등을 거치면서도 ‘학살 문건’은 국민을 상대로 한 훈련에 근거로 쓰인 것이다.

훈령과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현행 계엄 지침인 안에 계엄군의 무기 사용에 대한 법규 자체가 없다. 계엄 수행 과정에서 국민의 건강과 생명에 직접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핵심 법규가 공백인 셈이다. 다만 “경찰관 직무집행법에 있는 무기 사용 내용은 계엄임무수행군의 무기 사용 훈령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무기 사용은 경찰법령에 준하여 훈령에 따른다”는 대목이 있다. 달리 말해, 경찰법령은 참고사항일 뿐 훈령을 원칙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1980년 5월22일 ‘자위권 발동’ 문건이 훈령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 계엄의 역사를 다루는 방식과 내용을 보면 자위권 발동 문건 사용이 왜 심각한지 알 수 있다. 우선 5·16 쿠데타의 배경으로 “급속히 악화돼가는 정치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군 내에서 개혁 의지가 분출해 5·16 군사정변이 발생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민주적 기본 질서를 훼손하고 군사독재 정권의 막을 연 군부 쿠데타를 ‘개혁 의지’에 빗댄 것은 역사 왜곡을 넘어선 범죄에 가깝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시도하기 1년 전 벌어진 ‘정군운동’을 고려해도 당시 군부 쿠데타를 개혁의 가치로 포장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기무사 계엄 문건만 문제? 쿠데타 미화하는 합참 계엄 편람</font></font>
지금은 없어진 광화문 앞 중앙청 앞에 탱크가 들어선 모습. 1979년 10월27일의 일이다. 2017년 광화문 앞에도 탱크가 진입할 뻔했다. 기무사 계엄 문건을 작성했거나 그 관련자들은 현재 ‘내란’ 혐의로 수사받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지금은 없어진 광화문 앞 중앙청 앞에 탱크가 들어선 모습. 1979년 10월27일의 일이다. 2017년 광화문 앞에도 탱크가 진입할 뻔했다. 기무사 계엄 문건을 작성했거나 그 관련자들은 현재 ‘내란’ 혐의로 수사받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군부독재 미화는 유신을 위해 단행된 1972년 10월 비상계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군은 이를 두고 “유신헌법 제정을 배경으로 사회질서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했다”고 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집권을 위해 계엄으로 국회를 해산한 뒤 비상국무회의에서 유신헌법을 의결한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은 사회 혼란이 예견돼 있었으니 계엄이 내려진 것은 당연하다는 해괴한 논리를 동원했다. 에서도 계엄의 본질에 대해 “국가적 비상사태가 발생하였을 때”라고 시기를 한정하고 “회복”을 목적에 둔다. 그런데도 1972년 계엄에서 쓰인 불법적인 의미 확장은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왜곡은 계속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인한 10·26 사건 직후인 1979년 10월27일 계엄을 “대통령 유고로 인한 안전보장과 사회질서 및 치안 유지를 회복하기 위해”라는 이유를 달아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12·12 사태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신군부 세력이 단행한 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왜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는지, 5·18 민주화운동에서 희생이 어느 정도였는지 언급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전두환의 당당함은 바로 현재의 군이 바라보는 계엄에 대한 평가에 기대고 있었던 셈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7월 국군기무사령부의 불법 계엄 문건(‘대비계획 세부자료’)이 공개됐을 때, 청와대는 해당 문건이 합참의 과 다르다는 점만 강조했다. 이 합법이라는 점을 전제로 기무사 계엄 실행의 불법성을 질타한 것이다.

합법적이라는 이 에는 역사 왜곡을 넘은 조작도 있다. 제주4·3 당시 공비토벌사령부가 계엄 조치 이전에 설치됐음에도 흡사 계엄 절차에 따라 설치된 조직으로 보이도록 ‘(계엄사령부)’를 덧붙였다. 여수·순천사건(여순사건)의 반군토벌사령부도 마찬가지다. 제주4·3과 여순사건에서의 ‘토벌’은 법령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를 합법화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비상계엄인 ‘합위지경’을 뒤늦게 가져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4·3의 계엄령 선포는 토벌사령부 설치 한 달 뒤, 여순사건의 경우 나흘 뒤였다. 1948년 10월22일의 계엄포고령처럼 아예 포고자의 이름을 바꿔놓기도 했다. 당시 포고자는 육군대령 김백일이었다. 그런데 에는 송호성 준장으로 돼 있다. 굳이 역사상 존재하는 문서를 왜곡한 것을 납득하기는 어렵다. 계급을 따졌을 때 실제 포고자인 김 대령이 아니라 송 준장으로 하는 게 적법성을 높이는 사후적 판단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에 실수로 보기 힘든 오류도 보인다.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는 헌법 규정이 생긴 것은 1972년 유신헌법에서다. 그런데 1980년 헌법에서 신설된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학계에서 통용되지 않는 개념을 당연한 것처럼 꾸며 서술한 대목도 있다. 계엄은 군정이 아니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대목이다. 5·16 쿠데타에 이은 계엄도, 80년 신군부 세력이 주도한 계엄도 모두 군정이다. 나아가 군부독재라고 명명한다. 그런데도 “계엄은 전쟁이나 반란 등 국내의 비상사태를 군사력을 통해 극복하고 정상적 헌법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며 “자국의 영토라는 범위가 군정과 구별되는 계엄의 특성”이라고 설명한다.

군정과 계엄을 구분하려는 것은 절차적 정당성을 위한 것이다. 김득중 성균관대 강사는 “계엄의 시작인 여순사건도 그렇지만 5·16 계엄이나 5·17 계엄까지 모두 군정이라는 것은 상식에 가까울 정도로 이견이 없다. 군이 을 통해 군정과 계엄을 구분하려는 것은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기무사 계엄이 아니라 모든 계엄이 위험하다</font></font>

왜곡의 더께가 켜켜이 쌓인 현재의 계엄을 그대로 둬야 할까. 기무사의 불법 계엄 문건은 역설적으로 십수 년 동안 공개되지 않은 국방부의 을 공개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현재 군인들이 수십 년 동안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광주의 민간인 학살을 교범으로 삼거나 30년 군부독재를 일으킨 5·16 쿠데타를 정당화해온 사실이 확인됐다. 외부의 견제 없이 군이 밀실에서 주도하는 계엄이 왜 위험한지를 이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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