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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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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사 노동자, 백혈병 걸릴 확률 4배 이상 높다”

캐나다, 덴마크 항공사 조종사 연구 결과…

유방암은 야간 근무와 관계성 증명해 산재 인정받기도
등록 2018-06-12 16:34 수정 2020-05-03 04:28

“항공 기장과 승무원 등에서 백혈병이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대한직업환경의학회가 정리한 교과서는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외국에서는 일반인보다 방사선에 노출될 가능성이 큰 항공사 노동자들이 급성골수성백혈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을 입증하는 연구도 다수 진행됐다.

1996년 에어캐나다 조종사 274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6명이 급성골수성백혈병에 걸려 일반인보다 발병 위험이 4.72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덴마크 항공사의 조종사 3877명을 연구한 결과도 급성골수성백혈병 발병률이 4.6배 높았고, 5천 시간 이상 비행한 조종사로 대상을 한정하면 발병률이 5.1배까지 높아졌다. 하지만 아직 국내에서 항공사 노동자가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산업재해 인정을 받은 경우는 없다.

덴마크에선 승무원 유방암 직업병으로 인정

국내에서 백혈병이 산재로 인정된 경우는 없지만 승무원의 유방암은 2009년 덴마크에서 산재로 인정받았다. 덴마크 직업병판정위원회는 야간 근무가 ‘2군 발암물질’이라는 국제암연구소(IARC)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20년 넘게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야간 근무를 한 여성 노동자가 유방암에 걸리면 이를 직업병으로 인정해 산재보험으로 보상하기로 했다. 덴마크 당국은 비행기 승무원, 간호사 등 야간 교대근무를 했던 38명에게 산재 보상했다.

한국에서는 9년이 지난 뒤인 2017년 처음 야간 근무로 인한 유방암의 발병을 직업병으로 인정했다. 서울 성수동의 한 반도체 공장에서 1987년부터 일한 이미자(사망 당시 46살)씨는 22년 동안 반도체 웨이퍼 절단 작업을 하다 2009년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수술받았지만 2011년 재발했고, 2015년 암이 뇌까지 전이돼 그해 11월 숨을 거뒀다.

승무원이 일반인보다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승무원이 쐬기 쉬운 우주방사선과 유방암 발병 사이의 인과관계는 드러나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발표된 자료는 미국 국립산업안전보건연구소(NIOSH)가 지난해 6월 발표한 ‘여성 승무원의 유방암 연구’다. 연구 자료를 보면 팬아메리칸월드항공(팬암)에서 일하는 여성 승무원 6093명 중 344명이 유방암에 걸려 일반인보다 유병률이 37%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연구소는 고고도 우주방사선 노출량과 유방암 유병률을 연결하는 것은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임신 횟수가 적고 첫 임신 시기가 늦으면 유방암 발병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승무원은 일반인보다 임신 횟수가 적고 첫 임신이 늦은 경향이 있었다.

대만, 암 발병률 높은 직업군 ‘승무원’

승무원이라는 직업과 유방암의 발병 사이에 상당한 인과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기에는 두 가지가 부족했다. 첫째, 오랜 기간 승무원으로 일한 사람이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둘째, 고고도 우주방사선에 노출된 횟수가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보다 유방암 발병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

유방암뿐만 아니라, 승무원은 피부암의 발병률도 일반인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국립산업안전보건연구소가 지난해 연구소 누리집에 올린 글을 보면 항공 승무원은 흑색종 같은 피부암에 걸릴 가능성이 일반인보다 컸다. 남성 승무원은 ‘카포시 육종’이나 ‘비호지킨 림프종’과 같은 암에 걸릴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암에 걸리면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감염될 가능성도 커진다고 연구원은 설명했다.

하지만 이 연구 자료도 암 발병률이 높아지는 원인을 명확하게 밝히지는 못했다. 우주방사선에 노출되면 피부암 발병률이 높아지고, 시간대를 넘나드는 승무원의 노동과 야간 근무가 암 발병률을 높인다는 가능성만 보여줬다.

대만에서는 암 발병률이 가장 높은 직업이 항공 승무원이라는 보고서도 있었다. 대만 노동부의 산업안전보건연구소(IOSH)가 2014년 발표한 ‘대만 10대 암질병 노출 직종 보고서’를 보면 항공사 비행 승무원이 암 발생이 잦은 직업 1위였다.

연구소는 승무원들이 근무 여건상 우주에서 대기권으로 들어오는 우주방사선에 일반인보다 자주 노출돼, 근속 시간이 길수록 적혈구 내 산소 운반 기능을 하는 헤모글로빈의 수치가 떨어지고, 혈액암·림프샘암·골수암 발병률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대한항공 승무원 건강 자료 제공 협조 안 해”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조류인플루엔자가 유행할 때 감염이 의심돼 강제 입원됐는데 단순 감기로 판정받아 입원비와 검사비를 개인 부담하고 병가 처리했어요.”(대화명 ‘사직서’, 객실 승무원)

대한항공 총수 일가의 갑질에 분노를 느낀 회사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카카오톡 ‘대한항공 갑질불법비리 제보방’에는 일터에서 다친 승무원들 이야기가 넘쳐난다. 하지만 국내에는 승무원의 건강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 연구 자료가 거의 없다.

2014년 말에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승무원에게 ‘땅콩 갑질’한 것이 논란이 되면서 승무원의 감정노동이 주목받았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이 2015년 발표한 ‘항공사 승무원 감정노동, 무엇이 문제인가’를 보면 승무원들은 출근하기 전부터 퇴근할 때까지 강도 높은 스트레스를 지속해 받았다. 이들은 업무 강도가 높은 기내식 제공 중에 피로감을 드러내면 안 된다. 항상 밝은 얼굴을 유지하도록 강요받는다. 미국의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가 ‘감정노동’이라는 단어를 고안할 때의 연구 대상도 승무원이었다.

한국 항공사는 승무원의 복장과 장신구, 심지어 속옷까지 규제하기로 악명 높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승무원의 인권침해를 개선하기 위해 2013년 아시아나항공에 “여성 승무원이 유니폼으로 치마 외에 바지를 입을 수 있도록 할 것”을 권고했다.

승무원이 일반인보다 여러 질병에서 높은 유병률을 기록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국내 자료는 없다. 불충분한 자료를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지난해 윤관석 의원실(더불어민주당)이 아시아나항공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2016년 병가를 쓴 승무원은 351명으로, 전체 승무원(3469명)의 10.12%였다. 이는 병가를 쓴 조종사 36명(2.62%)과 일반직 2명(0.04%)을 크게 웃도는 수치였다.

이기일 항공안전정책연구소장은 “승무원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국회의원실에서 자료를 요청해도 대한항공은 내용을 제출하지 않고 버텼다. 승무원의 건강 문제는 비행기에 탑승하는 승객의 안전 문제와도 직결되므로, 장기적으로 깊이 있게 관찰하고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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