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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주고 채찍질하는 회사”

대한항공 전·현 승무원들 “업무상 다쳐도 산재 내면 인사 불이익”…

회사 “병가를 인사평가에 반영하는데 이를 오해”
등록 2018-06-12 14:58 수정 2020-05-03 04:28
교육에 참가한 대한항공 객실승무원들이 기내 서비스 실습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교육에 참가한 대한항공 객실승무원들이 기내 서비스 실습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일하다 다친 것만으로도 억울한데, 쉰다고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회사가 있다면 어떨까.

대한항공이 최근까지 자사 승무원들의 산업재해 신청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업무와 관련해 다쳤더라도 산재나 공상(공무 중 부상)을 내면 인사평가 점수가 깎였고, 이로 인해 산재·공상 대신 연차휴가·병가·휴직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대한항공의 전·현직 승무원 10여 명은 과 통화를 하거나 만난 자리에서 공통적으로 이같은 이야기를 했다. 산재와 공상은 부상 또는 질병이 업무와 관련 있다고 인정해 근로복지공단이나 회사에서 치료비와 휴업급여 등을 지급하는 제도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산재 내면 진급·호봉승급 어려워</font></font>

대한항공에서 30년간 근무하며 팀장(중간관리자)을 맡았던 A씨는 “몇 해 전까지 근태가 포함된 항목(현재 ‘비행손실방지’ 항목)의 배점이 25점이었다. 팀원들 대부분은 27~28점으로 점수를 초과해 받는데 산재나 공상, 병가 5일 이상을 쓴 경우 22~23점을 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팀 점수도 깎였다. 팀 점수는 팀원 전체 인사 점수에 반영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같은 팀원들의 점수가 모두 깎였다”고 말했다.

A씨의 말이 맞다면 산재·공상으로 일을 못한 승무원은 5점가량 점수가 깎인 것이다. 전체 100점 만점 중 5점에 불과하지만 그 차이는 크다. A씨는 “승무원은 업무의 질을 정량화하기 힘든 탓에 주로 고객불만·칭송과 근태관리에서 점수가 갈린다. 5점 깎이면 다른 데서 아무리 잘해도 뒤집기 힘들다. 사실상 진급이나 호봉 승급이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개인의 인사 점수가 깎이는 것보다 팀 점수가 깎이는 게 더 무섭다. 누가 나서서 산재 신청을 막지 않더라도, 팀장과 다른 팀원들의 눈치를 보다가 자발적으로 포기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현직 객실승무원 B씨는 몇 해 전 업무를 하다 허리를 다쳤다. 공상을 내면 팀 점수가 깎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바로 위 팀장은 “괜찮으면 비행 같이 가자”고 말했다. 본인도 진급을 앞두고 있는데 공상을 내면 진급을 못한다고 생각해 고통을 참고 다시 비행기를 탔다. 제때 치료를 못해 악화됐고 병가와 병휴직을 반복해서 낼 수밖에 없었다. B씨는 대한항공을 “(병 주고 약 주는 게 아니라) 병 주고 채찍질하는 회사”라고 비꼬았다. 다만 “2015년 박창진 사무장이 산업재해 신청을 할 무렵부터는 상황이 바뀌어서 현재는 공상을 써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이런 주장에 대해 “산재와 공상은 절대 인사평가에 반영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병가를 개인 인사평가에서만 반영하는데 이를 오해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산재를 썼다고 인사평가에 불이익을 주는 건 명백한 불법이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산재를 은폐하다 적발된 사업주는 형사처벌 대상이 돼 1년 이하 징역이나 1천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공상은 어찌어찌 써도 산재는 쓰기 힘들다는 증언도 나왔다. 산재는 고용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에서 관리하는 공적 보험이다. 일을 하다 다친 사람이 생기면, 사업자들이 십시일반 모은 보험료에서 치료비와 휴업급여를 지급한다. 공상은 개별 회사가 직원과 합의를 통해 피해액을 보상해주는 것으로 사인 간의 거래다. 지위가 엄연히 다르다.

현직 직원인 C씨는 몇 해 전 비행 중 난기류로 카트와 부딪쳐 다쳤다. 비행기 안에서 100kg이 넘는 카트와 함께 공중에 떴다가 내려앉으며 부딪친 것이다. C씨는 이 사고로 골반뼈를 다쳤고 회사의 안내를 받아 공상을 냈다. 요양 기간이 길어져 산재를 신청하려 하자 노무팀에서 전화가 왔다. ‘너는 딴 회사에 가도 산재자라고 남기 때문에 엄청 손해고 신체 이상자로 낙인찍히는 거다’라는 협박 전화였다. C씨는 결국 쉬지 못하고 복직할 수밖에 없었다. 난기류로 목디스크가 생긴 적 있는 D씨도 “대한항공은 4주까지 공상으로 처리하고 그 이상 넘어가야 산재를 해줬다”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대한항공 “산재 원할 경우 적극 지원”</font></font>

대한항공 쪽은 이런 주장에 대해 “직원이 산재를 원할 경우 관련 부속 서류 작성과 제공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또 “사내 공상의 경우 절차의 간소성과 급여, 치료비 지원이 산재보다 유리한 점을 고려해 직원들이 선호하고 있으며, 회사는 그중 재해 정도가 중하거나 요양 기간의 장기화가 예상되는 경우에는 산재 신청을 통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지속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제는 대한항공이 공상으로 처리한 업무상 재해를 관할 노동청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한항공은 2017년 한 해 102건의 공상 처리를 했고, 이 중 상당수는 3일 이상 휴업이 필요한 부상 또는 질병이지만 관할 노동청에 보고하지 않았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산업재해로 3일 이상 휴업이 필요한 부상을 입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이 발생한 경우, 요양 신청 여부와 관계없이 사업주가 1개월 이내에 ‘산업재해조사표’를 작성해 관할 노동청에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상당수 산업재해가 공상으로 묻힌 탓에 노동자들의 추가적 부상을 예방할 기회가 사라진 셈이다. 김승현 노무사(노무법인 시선)는 “산재 제도는 피해를 입은 노동자에게 금전적 지원을 해주는 목적도 있지만, 산업안전 문제를 조사하고 예방 활동을 하는 데도 목적이 있다”며 “돈으로 해결하면 문제가 없다는 건 맞지 않다”고 말했다.

20여 년 전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급정거해 크게 다친 E씨도 공상을 썼다. 그는 환자가 나와도 바뀌지 않는 대한항공의 고질병을 지적했다. “법적으로는 ‘Fasten seat belt’(좌석벨트 착용) 표시가 점등되면 승무원도 돌아다니지 못하지만, 실제로는 일을 시킵니다. 저도 그러다 다쳤어요. 그 뒤에도 바뀌지 않았고요. 승객들의 무거운 짐을 선반에 올려주려다 손목 등을 다치는 일이 많은데 그것도 안 바뀌어요. 승객 불만이 나오면 올려주란 업무 지시가 내려오고, 그러다 부상자가 많아지면 올려주지 말란 지시가 내려오길 반복합니다.”

공상은 재요양이 전적으로 사업자의 의지에 달렸다는 문제도 있다. 산재는 다친 부위가 나은 뒤 시간이 지나 다시 나빠지거나 병이 재발했을 때 요양급여(치료비)를 다시 받을 수 있다. 법적으로 보장돼 있다. 치료 뒤 장애가 생겼을 때 장해급여가 나오고 사망시 유족급여도 나온다. 공상은 기본적으로 사인 간의 거래이므로 재요양을 해줄 의무도 없다. 대한항공 쪽은 “재요양도 공상 처리를 해줄 수 있다”고 밝혔지만 실제 직원들의 증언은 다르다.

F씨는 “함께 일하던 승무원 중 한 명이 항공성 중이염이 심해져 한쪽 청력을 잃었다. 남은 한쪽 귀를 지키려고 회사를 관뒀다”고 말했다. 항공성 중이염으로 공상을 받은 적이 있어 뒤늦게라도 산재 신청을 할 수 있긴 하지만, 이 승무원은 회사와 싸워야 한다는 부담에 결국 포기했다. 만약 중이염이었을 때 산재를 받았다면 장해급여를 쉽게 신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직업병 의심돼도 산재 엄두 못 내</font></font>

직업병으로 의심되더라도, 비행 중 다쳐서 인과관계가 명확한 경우가 아니라면 산재나 공상을 신청하기 힘들다. 대한항공 승무원으로 일하다 2007년 퇴직한 F씨는 회사를 다니던 2006년 치질수술을 받았다. 국제선을 타며 시간대가 계속 바뀌다보니 생체리듬에 맞춰 밥을 먹을 수 없고, 화장실을 제때 못 가서 생긴 문제였다. 실제 상당수 연구에서 위염과 변비 등은 항공 승무원이 가장 많이 앓는 질환 중 하나로 나온다.

F씨는 승무원들이 많이 가는 서울 강서구 발산역 사거리의 한 대장항문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대장내시경 끝나고 의사가 말했어요. ‘혹시 승무원이에요?’ ‘네.’ ‘어휴, 말할 것도 없네요.’ 승무원들이 하도 찾아와서 고통을 호소하니까 의사도 이력이 난 거죠. 위가 밑으로 내려앉았대요. 산재 신청은 당연히 신청할 엄두를 못 냈죠. 병가 내고 호주머니 털었어요.”

대한항공의 산재율은 비교적 낮은 편이다. 은 국회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의원실을 통해 2008년부터 2017년까지 대한항공의 산재 처리 현황을 입수했다. 2017년 한 해 대한항공에서 사고·질병으로 산재 신청을 한 사람은 28명이었다(산재 승인 25명). 같은 해 대한항공의 정규직 직원은 1만7192명으로, 대한항공 직원 1천 명당 산재는 1.45명에 불과했다. 백분율로 환산하면 0.14% 수준이다. 2017년 대한민국 전체 산업군의 산재율이 0.49%인 데 비해, 대한항공은 이 비율이 3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셈이다. 2008년부터 2017년까지 10년 평균을 내면 산재율은 훨씬 더 낮게 나온다(산재 신청 18.7명, 산재 승인 16.2명).

산재율 수치만 놓고 보면 대한항공이 일반 사업장보다 훨씬 안전하다. 그런데 해외 항공 승무원 자료와 비교해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미국 경제 전문 리서치 기관 투웬티포세븐 월스트리트(24/7 Wall St.)가 올해 1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미 항공사 조종사와 엔지니어는 2016년 기준 미국의 공공과 민간 부문을 통틀어 ‘가장 위험한 직업’ 3위로 나타났다. 이보다 더 위험한 직업은 벌목노동자(1위)와 어부(2위)뿐이었다.

항공노동자는 죽기도 많이 죽었다. 2016년 미국에서는 정규직 노동자 10만 명당 3.6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같은 해 조종사와 항공기 엔지니어는 총 75명이 숨졌고, 10만 명당 치명상은 55.5명, 비치명상은 470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원인은 대부분 과로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건설노동자보다 많이 다친 항공노동자</font></font>

통상 산재율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건설노동자보다 많이 다쳤다. 미국 노동통계국(BLS)의 자료를 보면 1998년 미 항공사 소속 노동자의 부상·질병률은 14.5%로, 건설노동자(8.8%)보다 5.7%포인트나 높게 나타났다. 농업노동자(7.9%)나 광업노동자(4.9%)보다는 각각 6.6%포인트, 9.6%포인트 높았다. 해외 자료와 대한항공 직원들의 말을 신뢰한다면 결론은 비교적 뚜렷하다. 산재가 은폐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제보를 기다립니다<font color="#C21A1A">대한항공에서 일하다 부상이나 질병을 겪으신 분들을 찾습니다. 이메일(dr@hani.co.kr 또는 ph@hani.co.kr)이나 텔레그램(@tea343 또는 @futurnalist)으로 연락주세요.</font>변지민 기자 d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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