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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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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시대여 안녕!

MB식 천민자본주의 넘어 공공성과 연대의 정신 넘쳐나는

품격 있는 21세기형 사회국가로
등록 2018-03-27 14:15 수정 2020-05-03 04:28
이명박 대통령 취임 첫해인 2008년 5월 아이쿱생협연합회와 한국여성단체연합등이 서울 광화문에서 '광우병 미국소' 탈을 쓰고 한-미 쇠고기 혒아 무효를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이명박 대통령 취임 첫해인 2008년 5월 아이쿱생협연합회와 한국여성단체연합등이 서울 광화문에서 '광우병 미국소' 탈을 쓰고 한-미 쇠고기 혒아 무효를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이명박은 왜 대통령이 되려 했을까? 그 많은 돈으로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며 너그럽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대통령이 된 뒤에도 돈에 걸신들린 것처럼 청와대 공무원까지 동원해 재산을 챙기려 했을까? 무엇이 그를 계속 배고프게 했을까?

한때 그의 측근이었던 정두언 전 의원은 “우리 부모 세대가 참 어렵게 살다보니 돈의 노예가 돼서 사는 분이 많았다. 워낙 없이 사셨으니까”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의 가난과 서러움이 그를 이 지경까지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돈 버는 데 만족해야지, 왜 그렇게 꼭 대통령이 되어야 했을까?

21세기 CEO형 지도자로 착각

자녀들을 자기 회사의 ‘유령 직원’으로 취직시켜 월급을 지급하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청와대 공무원을 개인 재산 관리자로 활용하고, 외국 정상과 회담에서 자기에게 2억원을 준 건설업자 이름까지 거론해줬던 그는 과연 ‘공인’이 무엇인지, 공직을 갖는 것이 무엇인지 눈곱만큼이라도 의식한 적이 있었을까? 어떻게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5년이나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을까?

세간에서 이명박을 ‘CEO(최고경영자)형 지도자’라고 떠들자, 고 노무현 대통령은 ‘그는 통상의 CEO가 아니라 70년대 건설회사 사장이었다’는 의미심장한 평을 남긴 적이 있다. ‘70년대’와 ‘건설회사’에 강조점이 있다. 건설업은 한국의 압축성장의 상징이자 ‘경제 기적’의 견인차였다. 평사원에서 출발해 30대에 사장 자리에 등극한 그의 ‘성공 신화’는 매년 10% 이상씩 성장하던 70년대 한국 건설업의 기적과 궤를 같이한다. 그런데 당시 건설업은 어떻게 성장했던가? 관료와 결탁해 공사 부정 수주, 속임수 공사, 토지 투기, 장부 조작, 하청업체 후려치기, 용역깡패 동원 등 불법·부정·폭력·사기 없이는 존립할 수 없었다. 그런 시절에 건설회사를 운영한 사람이 시장 개척과 기술 개발에 밤낮없이 몰두하고,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외시장을 개척하는 제조업 CEO와 같은 존재일까? 사실 그는 CEO가 아니라 ‘재벌 가신’에 불과했지만, 국민은 그를 비즈니스맨이라 착각했다.

70년대식 비즈니스와 공안통치

그래서 그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은 집권 초부터 이상한 방향으로 갔다. ‘국민 성공시대’를 열겠다고 해놓고서, 어이없이 국가정보원·국군기무사령부·경찰 등 공안기구를 총동원해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자신을 비판했던 사람들을 사찰했다. 그는 ‘anything but Rho’(노무현 대통령 것만 아니면 뭐든 좋다)의 기치 아래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했던 정책 중 한-미 자유무역협상(FTA)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백지화했다. ‘잃어버린 10년’ ‘대못을 뽑자’ 같은 등 보수언론의 선동에 발맞춰 노무현 정부 때 약간 시도된 개혁을 원점으로 되돌려놓았다. 국토균형발전, 보유세 강화를 통한 불로소득 환수, 청와대의 정당정치 개입 축소, 공안기관의 국내 정치 불개입, 검찰의 독립성 강화 시도 등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성과를 묵살하고 재벌기업에 대한 출자총액 폐지 등 규제완화, 복지 시장화와 예산 삭감, 법인세·종합부동산세 인하, 공기업 사유화, 의료 시장화, 학교 일제고사 실시 등 개발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결합한 정책을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사실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 이명박이 압승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 한국이 ‘기업사회’로 전환한 데 따른 필연적 귀결이었다. 비즈니즈맨 출신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민주화세력의 ‘경제 무능’에 대한 반작용이자, 효율성과 생산성을 추구하는 기업 논리가 국가의 중심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중산층과 노동자의 경제적 불안감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990년대 후반 이후 확산된 시장주의, 즉 ‘기업은 생산적인데 정치는 비생산적이다’라는 재벌의 논리를 건드릴 수 없는 공리처럼 받아들인 국민의식의 결과였다. 이명박이 상징하는 경쟁지상주의는 빈곤층을 포함한 모든 사회 구성원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했다.

이러한 열망을 등에 업고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21세기 비즈니스’가 아니라 ‘70년대식 비즈니스’와 그 시기에 어울릴 법한 ‘공안통치’로 국가를 다스렸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이 그랬듯 반대세력을 ‘적’ 또는 ‘좌파’로 간주해 진압 대상으로 삼고, 법과 절차를 무시하며 공안기관, 억압적 국가기구, 관료조직을 총동원했다. 정권 초기부터 정부 정책 홍보를 위해 국장급 이상 공무원 모두를 중앙공무원 교육원에 집결시켜 국정을 홍보했고, 읍·면·동장 3500명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 집합시켰다. 국세청, 국토교통인재개발원 직원 등 공무원 가운데 상명하복을 거부한 자는 파면 등 극한 중징계를 내렸다. 의사표현의 자유 등 국민의 헌법적 권리는 ‘공무원’의 복종 의무 앞에서 휴짓조각이 돼버렸다. 교육계에선 비리·부정·독직·성희롱보다 명령 불복종을 더 엄하게 처벌했다.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의 파면 조처가 대표적이다.

수구보수의 정치적 몰락
2009년 11월 경기도 여주 남한강 이포보 가물막이 공사장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대형 펼침막을 들고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죽이기를 저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2009년 11월 경기도 여주 남한강 이포보 가물막이 공사장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대형 펼침막을 들고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죽이기를 저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그는 노동조합을 ‘말썽꾸러기’ 정도가 아니라 반사회적이고 부도덕한 존재로 몰아붙였다. 2009년 1월 서울 용산 참사 때 생존권을 주장하는 세입자들을 ‘떼잡이’, 심지어 ‘도심 테러범’으로 간주했다. 2008년 8·15 당시 기업가 대사면을 보고 일부 사람들은 “기업가들이 이명박 정부를 사면했다”고 평했다.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은 사법권에 대한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의 월권이다. 그와 동시에 이는 재벌이 이명박 정부의 실질적 권력자로 등극해 한국이 천박한 기업국가로 변모하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는 “미국이 달라는 대로 다 주자”라는 자세를 보이며 협상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단순히 친미적이었다기보다, 쇠고기 수입을 수익·비용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국민은 건강권과 생존권을 가진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소비자로만 간주됐다.

이명박과 그 정부 사람들은 그 이전에 그렇게 많이 해먹었으면서도 더 이상 못해먹을까봐 불안에 사로잡힌 환자들 같았다. 4대강 사업 강행, 역사 교과서 개정에서 나타난 속도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의 가혹한 진압, 용산 참사에 대한 강경 대응 등 쫓기는 방식으로 추진된 권력 행사는 모두 대통령 이명박의 ‘불안’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검찰 수사나, 정권에 대한 약간의 비판도 심각한 체제 도전으로 받아들여 제압하고, 비판자들의 기반을 아예 없애버리려는 ‘토벌 정책’은 이명박과 그 정부 사람들의 불안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이 정권 초기 촛불시위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근원적으로 전쟁과 가난, 반공 체제와 개발독재를 이끌어온 한국 수구보수의 본모습이었다.

이명박은 ‘부자 감세’ ‘기업 프렌들리’ 정책으로 20대 재벌에는 수백조원의 수익을 안겨주었지만, 가계부채를 300조원 정도 늘였고, 노동소득분배율을 낮추는 등 사회를 극도로 분열시켰다. 더 막강한 경제력을 갖게 된 재벌은 다른 경제주체와 사회 구성원을 더 일방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됐다. 이들은 중소기업의 혁신 의지를 좌절시키고 노동자의 근로 의욕을 꺾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장 강자들이 약자를 몰락시키거나 착취할 수 있는 지속적인 토대를 만들었다. 높은 자살률과 재벌 2세의 ‘갑질’은 드러난 현상일 따름이다. 세습 자본주의의 고착으로 경제 생태계의 황폐화, 소비 저하, 자영업자 몰락 등 불평등으로 인한 국민 고통과 그로 인해 사회가 치러야 할 사회·경제적 비용은 계산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는 한국 사회에 계산조차 할 수 없는 큰 짐과 깊은 주름을 남겼다.

이명박 정부는 공안기관을 동원하고, 상명하복의 관료 문화를 강화하고, 국민을 사상 검증의 대상으로 삼는 1970년대식 반공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1990년대 이후 진전돼오던 한국의 민주화와 선진화를 크게 후퇴시켰다. 이어진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제2기일 뿐이었다. 21세기에 1970년대 논리를 거침없이 구사하던 두 전직 대통령의 자제력 없는 행태와 그것에 편승해 이익을 챙기려 했던 자유한국당의 행태는 거꾸로 수구보수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왔다.

2006년 6·2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오세훈에게 압승을 안겨준 서울 시민들은 이듬해인 2007년 이명박 후보에게 ‘묻지 마’ 지지표를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국민들은 이명박이 선거운동 기간에 제기된 다스, 도곡동 땅의 실소유자라는 의혹이나 BBK 주가조작 등 범법의 의혹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당시 언론은 지금 드러난 그의 모든 거짓말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 언론, 검찰은 이 의혹에 대해 더 캐묻지 않았고, 고개를 돌렸다. 사실, 당시 이명박을 지지한 국민은 그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지지했다.

공공성과 연대 넘치는 나라로

이제 이명박은 구속됐다. 그를 적극 지지했던 국민, 그를 검증하지 않았던 언론, 그의 범법 의혹에 칼을 대지 않았던 검찰, 그의 실제 모습을 알면서도 눈감았던 우리는 한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한국 사회 전체에 큰 상처일 수밖에 없다. 이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그가 망쳐놓은 국가와 사회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우선, 이명박과 박근혜가 망가뜨린 국가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돈만 벌면 최고라는 천민적 자본주의,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분단·반공 시대의 논리와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다음으로 국가나 사회를 회사처럼 운영하고, 국민을 소비자로 간주하자는 개발주의, 신자유주의 기업국가의 논리와 결별해야 한다.

물론 이 결별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과 결별하지 않으면 우리가 안고 있는 이 심각한 불평등과 양극화의 질곡을 넘어설 수 없다. 옛 시대와의 결별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일이다. 그것은 이제 품격을 갖춘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사회국가, 즉 공공성과 연대의 정신이 국가 입법·사법·행정의 시민사회에 넘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새롭게 세워야 할 21세기 국가는 사회국가여야 한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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