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에서 발간한 의 일부분이다. 학생 김의겸은 30여 년 뒤 기자로 다시 역사의 무대에 올랐다. 최순실을 세상에 등장시킨 첫 보도( 2016년 9월20일치 1면 ‘대기업돈 288억 걷은 K스포츠재단 이사장은 최순실 단골 마사지 센터장’)부터 정유라 이화여대 학사 비리 보도, 삼성 등 재벌과 미르·K스포츠재단 편법 지원, 문화체육관광부 블랙리스트, 박근혜 대통령 ‘올림머리’ 등이 그의 손을 거쳐 특종 보도됐다. JTBC 보도로 또 하나의 변곡점을 그린 ‘태블릿PC’도 그의 취재 영역 안에 있었다. 그를 10월25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최순실 게이트’ 어디까지 번질지 겁났다”1년 전 오늘, 첫 촛불이 타올랐다. 이를 보는 심정은 어땠나.
박근혜 대통령이 시정연설에서 개헌 카드를 꺼낸 게 10월24일이다. 시정연설 내용은 엠바고(보도 유예)가 걸려 있어, 우린 이미 알고 있었다. 팀원에게 ‘오늘은 좀 놀자’고 했다. 사실 9월20일 첫 보도를 내놓은 뒤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렸다. 사람들은 꽤 많이 아는데, 내가 원래 성정이 게으르다. 과부하가 걸렸다고 할까. 개헌이 한동안 이슈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 그날 첫 회식을 했다. 팀원들에게 미안했다.
회식 자리에서 태블릿PC 보도를 보고 다들 깜짝 놀랐다.하하하, 그날도 사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다음날 (가 취재한 뒤 보도하지 않고 있던) 이성한 미르재단 사무총장과의 7차례 인터뷰를 모두 실었다( 1면 ‘최순실, 정호성이 매일 가져온 대통령 자료로 비선 모임’). 그와는 ‘오프더레코드’를 약속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해, 보도 금지를 깨는 이유를 따로 기사화했다. 이후 정현식 K스포츠재단 사무총장의 단독 인터뷰를 연이어 내보냈다.
그날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하며 ‘최순실 게이트’가 다른 국면으로 넘어간 느낌도 있었다.둑이 무너졌다. 그때까지 관망하던 매체들이 모두 취재에 나섰다. 경쟁도 치열해졌고.
촛불집회 참석 인원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흠, (한참 침묵) 어느 날 류이근 기자가 물었다. “선배 어디까지 번질 거 같아요?”라고. “나도 겁나”라고 말했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지금은 탄핵이 현실이 되고 박근혜 대통령이 감옥에 있지만, 그때는 ‘탄핵’이란 말 자체를 개념적으로나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지 감히 입 밖에 꺼내기 어려웠다.
기자는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촛불은 이미 1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촛불이 100만 명, 200만 명으로 번질 때 또 두려웠다. 물론 자신감도 생겨났다. 이렇게 하면 모든 게 이뤄지겠구나. ‘대통령 물러나라’만 아니라 뭐든 바꿀 수 있겠구나.
“내 인생 최고의 클라이맥스” 결국 이뤄낸 건가.대통령은 바뀌었다. 또 당시만 해도 (한국 사회의 이념 지형은) 진보-보수 사이에 보수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진보나 개혁에 유리한 정치 지형이 되거나 최소한 동등해졌다. 다만 현실 변화를 보면…, 여전히 그 벽은 두껍고 개혁은 지난한 일임을 느낄 수 있다.
촛불집회는 직접 가봤나.초반에는 가보지 못했다. 주말 없이 일했으니까…. 촛불 참가자가 100만 명이 넘었다는 말을 듣고 한번 나가봤다. 좀 놀랐다. 내가 30년 전 거리에 섰을 때는 독재정권에 짱돌이라도 든다는 심정이었다. 내가 꿈꾸는 것이 현실이 될 수 있다기보다 내 울분을 발산하는 것이었지. 돌이켜보면 현실 변화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촛불집회에서 본 것은 시민들의 밝고 느긋한 모습이었다. 이미 도덕적, 지성적으로 박근혜 대통령보다 우위에 있었다. 또 현장을 보니 주역은 언론이 아니었다. 촛불시민이었다. 좀 느긋하게 일하자고 했다. 점화자로서 역할을 했으니 이제 촛불이 잘 타오르도록 연료를 공급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데? 오히려 “하어영 더 없나?” “(류)이근아, 하나만 더 가자”며 팀을 더 채근했다.하하하. (침묵) 듣고 보니 그렇다. 촛불이 타오르면서 오히려 결실을 한번 맺어보자는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그때 잠을 잘 못 잤다. 잠을 자다가도 한번 깨면 벌떡 일어났다. 깊은 잠을 못 잤다. 자다가도 취재와 현 상황에 관련된 꿈을 꾸고. 그러면 눈이 떠지고 또 잠을 못 이루고. 내 인생에서 최고의 클라이맥스, 흥분된 상태였다.
스스로 이 정도면 됐다, 하는 순간을 떠올려본다면?12월9일이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의결될 때, ‘이제 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탄핵소추안 국회 의결이 되기 전 뭔가가 필요했다. 그때 ‘대통령의 7시간’을 파기 시작했고,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시간에 ‘올림머리’를 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는 기사가 나왔다(이 보도 이후 정치권에서 “여당도 탄핵열차의 승차권을 끊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 나왔다).
6월 항쟁 때 2년6개월 감옥생활 최순실 보도를 쏟아낼 때 27년차 기자, 나이는 이미 50대 중반이었다. 촛불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기점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김의겸은 멈추지 않았다. 동료들에게는 그게 더 인상적이었다. 쉬어도 될 법한데….그때 쓴 칼럼이 ‘문재인-안철수 양자대결은 허상이다’였다. 안철수 후보로도 정권 교체가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이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촛불을 시민 2천만 명이 켰는데 그 결실을 민주개혁 세력이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색채가 불분명하고, 어디로 갈지 모르는 쪽은 안 된다, 안철수라는 상징은 보수까지 껴안는 ‘반문재인 전선’의 연합체였다. 거기로 가는 것은 정권 교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기계적 중립을 말하는 동료들도 있었다.1987년 6월 항쟁 때 감옥에 있었다. 7년형을 받고 2년6개월 동안 징역을 살았으니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몰랐다. 그런데 6월 항쟁의 결실을 결국 노태우씨가 가져갔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안에 있던 나는 더 절박했다. 사면을 받지 못하면 4년 넘는 시간을 감옥에서 더 보내야 했다. 엄청난 좌절이었다. 돌이라도 던지고, 나가서 욕이라도 실컷 했으면 모르겠는데. 감옥에서 그날 아침, 좌절감과 무력감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개인 김의겸이 처음 현실에서 목격한 (촛불)항쟁과 대선이었다.좀 거칠게 말해서 ‘죽 쒀서 개 주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맞다. 30년 전 그 느낌이 있어서 그때도 잠을 못 이뤘다. 30년 전만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의 다짐도 있었다. 사실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86세대들의 공통된 정서가 아니었을까. 개인별로 온도 차이는 있었겠지만. 나같이 게으른 놈이, 지난해부터 대선까지 전력 질주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경험이 켜켜이 쌓여 폭발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경오’ 프레임, 복합적 감정 투사된 것” 노 전 대통령 서거 때의 다짐이라면?(침묵) 엄청 조심스럽네. 정치부 기자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 어쩌다 이런 일까지 벌어졌을까…, 내가 너무 나태했던 것은 아닌가, 그런 반성이 있었다.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침묵) 분노가, 분노가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는 분노가 있었다.
그 안의 분노는 스스로를 태웠다. 이제 그는 기자가 아니다. 지난 5월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청와대 진용의 앞선 순위에 김의겸 대변인이 올랐다. 문 대통령이 직접 지목했다고 알려졌다. 당시 는 이른바 ‘한경오’( ) 프레임 안에서 거센 비판에 노출돼 있었다. 김 기자는 고심을 거듭한 끝에 고사했다. 그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촛불집회, 탄핵, 그리고 문재인 정부, 모든 것은 1년 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촛불이라는 큰 격랑이 일었고, 나도 그 속에서 한 방울의 포말로 휩쓸렸다는 느낌이 있다. 회한 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회한은 없다고 했지만) 이런 성과를 일궈낸 김의겸 개인이나 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또 조심스럽네, 하하. ‘한경오’라는 프레임, 잘 봐야 한다.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이렇게 뜨거운데…, 가장 가까운 친구가 뜨겁지 않으면 서운하고 나아가 밉기까지 할 수 있다. 복합적 감정이 투사되는 거지. 그게 ‘한경오’에 대한 질타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특히 독자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졌고, 로 접한 정보가 금과옥조였던 시절은 지났다. 예전 방식으로 기사를 만들어서는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답은 없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다. 다만 신영복 선생이 쓴 글을 보면, 나침반이 한 곳을 가리킬 때는 늘 떨림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한 곳만 바라보는 것은 교조주의다.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그런 자세로 다양한 시도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어렵다.
그는 아직도 천생 기자였다 인터뷰 중간에 그는 “(지금 쓰는 기사의) ‘야마’(주제)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노승일씨를 인터뷰하고 왔다는 말에 불쑥, “실은 내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본격화되기 전 노승일 부장을 접촉했다. 연락이 잘 안 되다, 어느 날인가 전화를 받은 노 부장이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그때는 반반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때 노 부장을 설득할 수도 있었는데 방법이 없었을까”라고 물었다. 그는 아직도 천생 기자였다.촛불 1년, 앞으로는?돌이켜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개혁은 단번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 지난한 과정임을 알고 대비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1년은?감옥에서 나와, 공장에서 일하다, 재야단체로 갔다. 그리고 1990년 기자가 됐을 때 너무 기뻤다. 내가 기자를 그만둘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게 1년 전 내 모습이기도 하고. 아, 어렵다. 모색 중이다. 기자로서의 삶은 아니지만, 그 연장선상 아닐까.
글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속보] 공수처 “윤석열 체포가 목적…자진출석 고려 안 해”
[생중계] 윤석열 2차 체포 시도 현장
공조본, 3차 저지선 넘어 관저 진입…경호처와 협의
공수처·경찰 진입 안 막은 경호처…김성훈 지휘 안 따른 듯
나경원 “법 살아 있어야”… 윤석열 쪽 ‘불법 체포’ 논리 반복하는 국힘
설 민생지원금 1인당 50만원까지…지자체, 내수경제 띄우기
[속보] 경찰 “윤석열 영장 집행에 기동대 54개 부대·3200명 동원”
‘KBS 이사장 해임 취소’ 항소한 윤석열…최상목 패싱했나
[속보] 경찰 체포조, 관저 뒷산 등산로로 우회 진입 시도
민간인 윤갑근의 경호처 직원 ‘집합’…“경호관이 경찰관 체포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