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일 전 K스포츠재단 부장이 공식 직함을 달았다. 사단법인 대한청소년체육회 이사장이다. 12월1일이면 초등학생 4명, 중학생 1명으로 이뤄진 유소년 배드민턴 팀이 훈련에 들어간다. 최순실씨가 K스포츠재단 시절, “그거 하려면 나가서 따로 재단 만들어서 하든지”라며 핏대를 올렸던 기획안이 결국 현실이 됐다. 촛불집회 1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과한 뒤 벌어진 일이다. 10월23일 오후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대한청소년체육회 사무실에서 노 부장을 만났다. 그는 스스로를 “꼴통”이라고 했다. 거침이 없었다. 지난해 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장을 들었다 놨다 했던 노승일은 여전히 뜨거웠다.2014년, 최순실과 악연의 시작 따지고 보니 최씨와는 악연의 연속이었다.
2014년 처음 만났다. 그 무렵, 난 12년 동안 증권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나름 성과가 있어서 한 외국계 회사에서 국내 회사로 이직이 확정된 상태였다. 그때 고영태씨가 갑자기 전화해 불쑥 ‘스포츠 영재를 지원하는 공익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흔들렸다. (고씨가) 평소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뭔지 알고 있었고, 오케이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전화한 것이다. 실제 별로 고민하지 않고 다 때려치우고 사무실로 갔다. 그런데 사업기획이 마무리돼 궤도에 오를 때쯤 해고됐다.
억울했다. 호소할 방법이 없었다. 원래 회사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당장 가족 생계가 문제였다. 다음날부터 저녁 7시부터 밤 10시까지 배드민턴 강습을 하고 경기도 구리시 농수산물시장에 가서 밤 11시부터 다음날 오전 11시까지 생선 상자를 날랐다.
2015년 7월 여름휴가 첫날이었다. 낯선 번호가 떠서 전화를 받아보니 (고)영태였다(그는 고영태씨와 대학 동기다). “독일에서 일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최순실씨가 하는 사업이라는 말을 듣고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태가 한번 만나보자는 말에 결국 움직였다. ‘스포츠매니지먼트’라는 말에 또 솔깃했다. 8월에 바로 독일로 갔다.
독일에 간 지 보름 정도 되는 날(8월26일)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인터콘티넨털호텔에서 삼성과 계약한 당일, 최씨가 묵는 호텔로 함께 가는 자리에서 갑자기 원래 주기로 한 월급을 다 못 줄 거 같다고 했다. 그만두라는 얘기였다. 그때 영태가 “미안하다, 그냥 (같이) 나가자”고 하더라.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나니 화가 좀 가라앉았다. 그러고 나서 “그냥 하겠다”고 했다. 그때는 이미 내가 쓴 주유 영수증부터 커피 한잔 값까지 모든 서류를 모아두고 있었다.
처음 해고된 뒤 새벽 시장에서 일하다 뉴스를 보는데, 정윤회씨랑 ‘십상시’ 얘기가 나오더라. 아, 내가 만약 조금 더 회사에 있었으면 도움을 줄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했다. 불쑥 그때 기억이 났다. 그래서 그냥 일하겠다고 했다.
약속한 350만원 중에 당장 150만원밖에 주지 않는다고 하는데도 일을 계속 한다는 말에 좀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금방 잘 부탁한다’고 하더라. (최씨의 국정 농단을 입증할) 자료를 한꺼번에 입수한 것은 아니었다. 며칠 뒤 (최씨와 가깝던) 박원오 대한승마협회 전무가 USB 하나를 건넸다. 정유라씨가 승마대회에 나갈 때 필요한 자료가 들어 있었다. 본인이 일일이 챙기기 힘들 때 나에게 절차를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그 안에도 정유라씨와 관련된 중요한 자료가 있었다.
증권 일을 할 때부터 몸에 배어 있었다. 남의 돈을 다루는 일이다보니 적은 금액도 다 챙겨야 했다. (주식) 종목을 추천하면, 다 오르는 게 아니다. 매도하라고 한 뒤에 오르는 일도 있고. 별별 항의가 들어온다. (노씨가 모은 자료 가운데는 삼성이 코어스포츠를 통해 정유라씨 지원을 약속한 계약서, 최씨와 나눈 카카오톡 메시지, 최씨가 증거인멸을 지시하는 내용 녹취 등 다양했다. 이를 통해 최씨의 국정 농단이 상당 부분 입증됐다.)
9월 중순 지나, 박원오 전무가 지금까지의 비용을 정산하고 서류를 다 넘기라고 했다. 그때 모든 자료를 정리했다. 정산에 이틀 정도 필요하다고 했고, 날을 새워 사무실에 있는 모든 문서를 스캔해 USB, 외장하드, SD카드 이렇게 세 군데에 나눠 담았다. 일단 몸수색을 하기 전 자료 제출을 따로 요구하면 외장하드를 내고, 몸수색을 하면 USB를 뺏기고 나서, SD카드는 무조건 남긴다는 생각이었다. 카드는 구두 굽에 감췄다. 주요 서류가 한 뼘이 넘게 있었는데 일부만 남기고 다 파쇄했다. 그것을 들고 한국으로 돌아온 게 2015년 11월이었다.
그만큼 영태를 믿은 게 우선이었던 거 같고, 두 번 (해고된 뒤에도) 아무 잡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만났다. 미안하다더라. 다 잊고 잘해보자고 그러던데….
사실 같이 일한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폭로를 한 번 더 계획했다. 그때 재단에서 태권도 시범단을 만들었는데, 최씨가 어느 날 갑자기 해체하라고 했다. 지도교수뿐 아니라 부감독, 단원들까지. 영상을 한번 보더니 그만하라고 하는 것을 보고, 이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을 그냥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그때도 영태를 찾아갔다. 힘을 좀 실어달라고. 결국 (통로를 찾지 못해) 잘 안 됐지만.
내가 왜 그랬는지 그때는 잘 몰랐다. 그냥 악에 받쳐 있었다. 때려치울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새벽 시장에서 생선 나를 때를 떠올렸다. ‘그냥 나가면 아무것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박근혜 대통령 시정연설이 있던 날 저녁, 서울 중앙지검에서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2016년 10월24일). 저녁 7시30분쯤이었다. 태블릿PC 보도가 나오기 전이었다. 다짜고짜 나오라고 했다. 아마 도주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두 번 전화가 왔는데, 두 번째 전화가 온 검사실이 있는 10층으로 다음날 출석했다.
건너편에 앉은 검사가 믿을 만한지 판단하기까지 12시간30분이 걸렸다. 처음에는 믿을 만한 사람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내 목숨을 걸었다.
물론 그때는 그런지 몰랐다. 지금 와서 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냥 꼴통이었다.
9월 후반 국정 농단 사태가 국회를 중심으로 터져나오면서 ‘노승일 출국 금지’라는 기사를 봤다. 당연히 조사받을 거고, 어떤 태도를 취할지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했다.
그 기사보다 보도가 나간 뒤 한 시민단체가 고발했다는 기사가 더 반가웠다. ‘아, 검찰에서 나를 부르겠구나’ 생각했다.
그런가? 나는 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영태를 위해서도 면회는 하지 않고 있다. 연락 자체를 안 한다. 이번 사태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영태는 늘 내 편이었다. 영태의 구속은 억울하다. 사실 영태가 돈을 받았다고 하는데, 인천세관장 승진 청탁을 받았다는 사실은 검찰이 수사를 통해 안 것이 아니라 영태가 자진 출석한 첫날, 스스로 그 일을 제보한 것이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10월27일 고영태씨의 보석 신청을 받아들였고, 고씨는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받게 됐다.)
자금 운영만큼은 투명하게 해 문제없도록 하겠다. (웃음) 돈이 없어 운동을 하지 못하는 어린 친구들을 먼저 돕고, 나중에는 낙후 지역에 스포츠센터를 세워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게 하고 싶다.
글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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