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나흘 앞둔 5월5일 어린이날. 국민의당 선거대책위원회 5층 브리핑실에서 김인원 공명선거추진단 부단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김 부단장은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아들 준용씨의 한국고용정보원 특혜 입사 의혹을 제기했다.
그 근거로 준용씨와 함께 2008년 9월부터 2년 동안 미국 파슨스 디자인스쿨 대학원을 함께 다녔다는 ㄱ씨의 육성 증언 녹음파일과 카카오톡 갈무리 화면을 공개했다. 녹음파일에 “(준용씨로부터) ‘아빠가 원서 좀 보내라고 해서 (고용정보원에) 보냈더니 프리 패스했고 자리를 하나 빼놓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빠(문재인 후보)가 얘기해서 어디에 이력서만 내면 된다고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는 등의 ㄱ씨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김 부단장은 “문(준용)씨 스스로가 주변에 특혜 취업에 대해 자인했기 때문에 문씨의 취업은 더 이상 허위 사실이 아닌 진실임이 백일하에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정치 생명까지 위협한 역대급 ‘헛발질’
이 시간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대선 후보는 부산에서 배낭을 메고 뚜벅이 유세를 벌이고 있었다. 국민의당 내부에선 소문으로만 돌던 문준용씨 취업 특혜 의혹의 ‘꼭지를 제대로 땄다’(분명한 물적 증거를 확보했다는 의미)는 분위기가 돌았다. 문재인 후보 캠프 쪽에서 “ㄱ씨의 발언은 가짜”라며 검찰에 고발 조치했지만, 국민의당은 관련 논평을 30개가량 쏟아내며 대선 막판 이 문제에 화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당시엔 아무도 이 기자회견이 당의 존립과 안철수 전 대표의 정치 생명까지 위협하는 역대급 ‘헛발질’이 될 줄 예상하지 못했다.
6월26일 박주선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이 국회 정론관에서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열었다. 마이크 앞에 선 그는 “지난달 5일 국민의당은 준용씨의 미국 파슨스 디자인스쿨 동료의 증언을 근거로 준용씨의 고용정보원 입사 관련 당시 문 대통령의 개입 의혹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국민의당에 제보된 내용은 모두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문 대통령과 준용씨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박 위원장의 이날 발표는 더불어민주당의 고발로 인해 검찰 수사가 진행되자 압박을 느낀 녹음파일, 카카오톡 갈무리 화면 조작자 이유미(38·구속)씨가 범행을 자백하면서 이뤄졌다.
이씨는 준용씨의 파슨스 디자인스쿨 동료 ㄱ씨의 육성이 자기 동생을 동원해 허위로 녹음한 것이라고 실토했다. ㄱ씨는 사건이 불거진 뒤 언론을 통해 “준용씨와는 일면식도 없고, 특혜 채용을 뒷받침하는 이야기를 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 이 증언이 완벽한 조작임이 드러난 것이다. 이씨는 카카오톡의 갈무리 화면 역시 자신, 회사, 아들 소유의 휴대전화 3대를 갖다놓고 3명이 대화를 나눈 것처럼 조작했다고 했다. 이유미씨는 조작 자료를 이준서 국민의당 전 최고위원에게 전달했고 이 자료는 5월5일 기자회견에 그대로 이용됐다.
사과의 진정성 의심케 하는 특검 도입 주장
국민의당은 검찰 수사망이 좁혀오자 당이 사과하는 형식으로 조작 사실을 먼저 실토했다. 검찰 수사 발표로 사실이 밝혀질 경우 닥칠 타격을 최소화하려는 포석이다. 김동철 원내대표는 6월27일 원내대책회의에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국기문란 사범으로서 법정 최고형으로 다스려주시길 바란다”고 자세를 낮췄다. 그러면서도 김 원내대표는 “젊은 사회초년생들이 대통령선거에서 증거를 조작해 무언가를 얻어보겠다는 끔찍한 발상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경악스럽고 기가 막히다”며 당 차원의 개입과는 무관한 이들의 단독 범행임을 강조했다.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당 지도부의 바람과 달리 윗선이 연루된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유미 씨는 의혹 제기 사흘 뒤 이준서 전 최고위원에게 “사실대로 모든 걸 말하면 국민의당은 망하는 거라고 하셔서 아무 말도 못하겠어요”라는 메시지를 보낸 사실도 확인됐다. 이씨는 검찰 조사를 받기 전 지인들에게 “당이 기획해서 지시하고 꼬리자르기를 하려 한다”는 호소를 남기기도 했다.
당내에서도 대선 캠페인에서 가장 공들인 ‘네거티브 전략’을 지도부를 완전히 배제한 채 실행하긴 어려웠을 것이란 ‘합리적 의심’이 팽배한 상황이다. 이씨가 공명심만으로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의 아들 취업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 조작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김태일 국민의당 혁신위원장은 과의 통화에서 “이번 사태로 국민의당은 존립 위기까지 와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당의 대응은 아주 안이하다. 잘못을 해놓고 특검 도입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정당은 정치적 기구이기 때문에 정치적 책임을 고민해야 하는데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당이 재창당 수준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 대선 평가위원회의 한 핵심 간부도 통화에서 “선거 결과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이렇게 검증한 것은 도덕 불감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선거 승리에만 급급해 민주주의 원칙을 완전히 파괴한 용납할 수 없는 행위다. 이에 관련된 사람은 정치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호남 출신이 다수인 당내 의원들 사이에 이대로는 당의 존립이 힘든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크다. 일각에선 국민의당발 정계 개편이 시작되는 것 아니냐는 예측도 나돈다. 황주홍 의원은 통화에서 “당장 주변에 탈당하겠다는 의원은 없지만 어떻게 공당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다”며 “화도 나고 부끄럽고 면목이 없다. 전국 민심이나 호남 민심이나 사납기는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국민의당으로선 당장 대여 협상력이나 투쟁력 상실이 불가피해 보인다.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은 만큼 여당과 보수 야당 사이에 캐스팅보트를 쥐며 정국을 주도하는 역할을 감당하긴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이상일 아젠다센터 대표는 “(장관 후보자) 청문회 국면 등에서 국민의당이 후보자의 도덕성이나 청렴성을 두고 정부를 공격하는 부분에서는 화력이 소진될 것 같다”고 말했다.
입장 표명 없이 상계동 자택에 칩거
그리고 문제가 남아 있다. 다름 아닌 안철수 전 대표다. 문준용 의혹 조작 사건의 여파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인물이 안 전 대표라는 것에 정치권 내에서 큰 이견은 없다. 안 대표는 제19대 대선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에게도 밀려 3위로 처지며 타격을 입은 뒤 재기 기회를 노리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대형 악재로 안 대표의 무릎이 꺾이게 됐다. 정치권에 입문한 뒤 줄곧 ‘새정치’를 주창해온 그가 ‘선거 공작’ ‘공작 정치’에 연루됐다는 것 자체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이라는 평가다. 안 전 대표 쪽은 이번 사태에 입장 표명 없이 상계동 자택에 칩거하고 있다.
안철수 책임론은 이미 임계점을 향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안 전 대표가 정치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상돈 국민의당 의원은 “일단 안 전 대표가 대선 후보였잖은가. 자신의 광팬들이 대형 사고를 쳤는데 침묵하는 것은 참 웃긴 일이다”라고 비판했다. 김태일 혁신위원장도 “대선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최종 책임을 지는 일은 후보에게 있다. 본인이 (조작 사실을) 알았건 몰랐건 (연루된 인물이) 가까운 사람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안 후보가 책임져야 할 것은 법적인 것도, 도의적인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것이다. 분명한 대답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작에 가담한 이유미씨와 이준서 전 최고위원 등이 모두 안 전 대표와 가까운 인물이라는 점도 안철수 책임론에 불을 지핀다. 이유미씨는 안 전 대표의 카이스트 교수 시절 제자로 2012년 대선 때 진심캠프에서 활동했다. 이후 그는 이란 책을 펴냈고, 대선 때 온국민멘토단에서 워킹맘 멘토로 활동했다. 현재 구속 상태인 이씨의 변호인은 안철수 전 대표의 최측근이 활동하는 로펌 소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준서 전 최고위원은 안 전 대표가 ‘인재 중의 인재’라고 추어올린 인재 영입 1호다. 그는 현재 당의 청년 몫 최고위원이다. 지난 대선에선 선대위 ‘2030 희망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정치권 안팎에선 안 전 대표가 사실상 재기하기 불가능해진 것 아니냐는 전망까지 나온다. 안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당 기반인 호남에서 27% 득표율을 기록했다. 61%를 얻은 문재인 대통령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6월30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 역시 암울하다. 녹취 조작 사건의 여파로 국민의당의 지지율은 5%를 기록했다. 원내 의석을 확보한 정당 가운데 바른정당(9%)은 물론 정의당과 자유한국당(7%)에도 뒤처지며 꼴찌를 기록했다. 호남만 놓고 봐도 6% 지지율로 더불어민주당(68%)의 1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그의 장고가 길어지는 이유는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지난 대선에서 호남에서 안 전 대표가 문 대통령에게 더블스코어로 진 것은 호남이 더는 안 전 대표를 개혁 세력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번 사건으로 안 전 대표는 지지 기반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상일 아젠다센터 대표는 “안철수 전 대표로서는 1년 뒤 지방선거에서 현 정부의 대안 세력으로 주목받기를 기대하며 재기 기회를 모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떠받치던 깨끗한 정치라는 하나의 큰 기둥이 무너졌다. 과연 안철수 브랜드로 수도권이나 호남에서 선전을 기대할 수 있을지 난망해졌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당직도 없고 현역 의원도 아닌 안 전 대표가 내놓을 것이 없는 만큼 정계 은퇴 말고 책임질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그의 장고가 길어지는 것도 ‘최후의 수단’까지 염두에 두고 선택을 저울질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사면초가에 몰린 안철수 대표는 이번 사태에 어떤 입장을 내놓을까. 전 국민의 이목이 안 전 대표를 주시하고 있다.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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