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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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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시민들의 승리

19차례 열린 탄핵집회에 모두 참여한 ‘개근 시민’ 9명이 말하는 ‘촛불의 힘’
등록 2017-03-14 21:23 수정 2020-05-03 04:28
촛불이 이겼다.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권력이 광장의 함성으로 무너졌다.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로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결정했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 문제가 아니었다. 민주공화국의 헌법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상식의 승리였다.
은 이 승리를 위해 가장 애써온 무명의 이름을 찾았다. 추운 날, 눈 오는 날, 진눈깨비 날리던 날 가리지 않고 상식이 이길 것이란 소박한 믿음으로 200여 일을 기꺼이 버텨낸 사람들. 거리에 나오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고 거리에 서는 것이 당연했던 우리의 이웃들을 만났다.
취재 김선식·홍석재·김완·김효실 기자, 편집 허윤희·송채경화 기자, 디자인 장광석
지난해 11월26일 서울 광화문에 ‘박근혜 탄핵’ 촛불이 켜졌다. 불의한 대통령에 분노한 촛불은 3월10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끝내 권력자의 무릎을 꿇게 했다. 박승화 기자

지난해 11월26일 서울 광화문에 ‘박근혜 탄핵’ 촛불이 켜졌다. 불의한 대통령에 분노한 촛불은 3월10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끝내 권력자의 무릎을 꿇게 했다. 박승화 기자

총인원 1567만3천 명. 2016년 10월29일부터 2017년 3월4일까지 진행된 ‘박근혜 탄핵 촛불’ 참가 인원(주최 쪽 추산)이다. 첫 집회 때 3만 명에 불과했던 시민들이 20만, 100만 명으로 늘었다. 많게는 하룻저녁에만 전국에서 232만 명이 거리로 쏟아졌다. 100만 명 이상 참가한 집회만 7차례에 이른다.

이들의 목소리는 하나였다. “촛불이 이긴다.” 이들은 자신이 위임한 권력을 악용해 사익을 취하고,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린 대통령을 파면시키겠다며 단호했다. 구시대적 정경유착, 국민의 생명을 앗아간 공권력, 사회적 불평등, 무능한 정치권, 낡은 사회 시스템도 이번 기회에 갈아엎겠다며 나섰다. “믿을 것은 국민밖에 없다”며 촛불을 켰고, 불의한 대통령은 결국 무릎을 꿇었다.

3월10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선고 직후, 19차에 걸친 탄핵 촛불집회에 빠짐없이 참여한 ‘촛불 개근 시민’ 9명을 이 전화 인터뷰로 만났다. 김이하(1959년생·시인), 김준동(1965년생·회사원), 김은실(1986년생·보육교사), 이은영(1975년생·학원 강사), 이영기(1960년생·자영업), 이승기(1969년생·자영업), 남영신(1962년생·전업주부), 이욱종(1974년생·대학원생), 이광수(1971년생·자영업)씨가 그들이다.

“국정 농단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

촛불을 든 사연은 저마다 달랐다. 박근혜·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직접적 이유가 된 경우도 있었지만, 이광수·남영신씨처럼 “박근혜가 대답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7시간’ 동안 세월호 아이들이 희생됐다는 생각에 가슴이 너무 아팠다.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광화문을 떠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백남기 농민이 경찰 물대포에 맞아 숨진 사건이나 한·일 ‘위안부’ 졸속 합의 같은 불합리한 일들을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촛불을 든 경우도 있었다.

이영기 대통령의 국정 농단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무임승차하지 않고 행동하는 촛불이 되고 싶었다.

김이하 백남기 농민이 돌아가시고 분노가 컸다. 무자비한 공권력과 이를 통제할 생각이 없는 정부 권력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문화계 블랙리스트에도 분노했다.

남영신 어젯밤(3월9일)에도 청와대 근처까지 걸었다. 박근혜의 ‘세월호 잃어버린 7시간’이 우리 아이들의 목숨값이 됐다.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김은실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 파업 당시 경찰의 강제 진압은 잘못된 공권력 행사의 전형이었다. 이번 게이트는 더 극단적 상황인데도 반성할 줄 몰랐다. 참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분노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전말이 드러날수록 커졌다. 박근혜의 잘못은 컸다. 거짓말하고, 윽박지르고, 잘못을 감춰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촛불 시민들은 청와대 비선 실세, 대기업과 정경유착, 세월호 참사 때 국민을 보호할 책임을 방기한 것 등 박근혜의 잘못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이은영 최순실이라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비선 실세를 이용해 대기업과 뇌물수수 등 범죄행위를 했다는 이야기는 듣고도 믿기 어렵다. 역사를 거꾸로 쓰려는 국정교과서 문제, 굴욕적인 ‘위안부’ 합의는 국민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까닭조차 알기 어려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 등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문제가 많았다

이욱종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한테 뇌물을 받은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박근혜와 친하다는 이유로 최순실 딸 정유라는 이화여대에 부정 입학했다. 최태민의 딸 최순실이 박근혜와 얽힌 것은 박정희 정부 시절의 적폐가 지금까지 이어져 생긴 잘못이다.

남영신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모교가 정유라를 통해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에 얽혔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동문회에 가면, ‘고구마 줄기(정유라) 캐려다 무령왕릉(박근혜) 발견했다’는 우스갯소리를 한다. 박근혜의 잘못으로 ‘헬조선’의 부당함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알려준 계기가 됐다.

이광수 세월호 사건이야말로 박근혜 정부의 모든 문제점을 집약해 보여줬다. 국민을 보호하라고 권력을 위임했는데 정작 그들은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이승기 내가 들었던 청와대 연설문을 최순실이 썼다는 사실을 지금도 믿기 어렵다. 국가 기밀까지 최순실에게 흘러나갔다. 모든 게 박근혜가 대통령이란 자리를 이용해 사익을 취하려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다.

영하 10℃를 밑도는 날에도 거리로 나섰다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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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들은 촛불을 들었다. 19차례에 걸친 주말 촛불집회를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그만큼 절박했다. 최저기온이 영하 10℃를 밑도는 날도 있었다. 완전무장을 하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인파에 갇혀 끼니를 거르거나, 제때 화장실을 이용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추위도 불편함도 이들의 촛불을 꺼뜨리지 못했다.

김이하 촛불 개근을 놓칠 뻔한 일 자체가 없었다. 2008년 미국산 광우병 소고기 촛불집회와 2014년 세월호 집회 때도 ‘이런 일을 모른 체하면 사회에 큰 빚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집회에 조금만 늦으면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촛불집회 일정과 겹치는 난감한 부탁이나, 참석이 불가피한 모임은 아예 듣지도 않고 잘랐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너희가 광장으로 나오라’고 말하면 다 해결됐다.

이광수 사업을 10년 동안 하면서 얻은 교훈이 ‘중요한 일에는 핑계가 없다’는 것이다. 집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는 건 이번 탄핵 사태가 나와 우리 사회에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썩을 대로 썩은 나라를 바꿔야 한다.

이욱종 이전에 목사일을 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목사 신분으로 여러 집회에 참여하는 게 어려웠다. 사회적 문제로 고통받는 이웃에게 무심한 삶을 산 것을 참회하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탄핵 촛불집회가 힘겨운 싸움이었지만 아름다운 기억도 많이 남겼다. 100만 명 넘는 인파가 촛불을 든 광경은 장관이었다. 비가 와도 꺼지지 않는 LED 촛불, 아이들 머리에 ‘빨간 뿔’을 만든 촛불도 있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면 무릎을 적셔가며 쓰레기를 치우는 촛불도 있었다. 전인권, 양희은, 신대철, 이승환 같은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촛불의 밤을 적셨다. 촛불 개근 시민들은 이런 장면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김이하 중고생들이 ‘촛불아 고맙다’는 펼침막을 들고 행진하는 장면을 봤다. 참새처럼 고음으로 맑은 소리를 내면서 걷는 모습이 흐뭇했다. 이 학생들이 우리의 미래로 자랄 것이기 때문이다.

이광수 200만 명 이상 모인 밤이었다. 선한 의지의 사람들이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모였던 그 장면 자체가 감동이었다. 아름다운 기억을 꼽으라면 솔직히 이번 촛불집회가 전부 그랬다.

“주변의 아픔을 돌이켜보는 기회가 됐으면”

결국 탄핵이 인용됐고 대통령은 파면됐다. 촛불의 힘은 셌다. 3월10일 때마침 봄이 오고 있었다. 이들은 “어떤 힘센 권력자도 이제 국민을 상대로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걸 여실히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김이하 안도감이 봄을 느끼게 한다.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줄줄 난다. 그러나 박근혜 파면된 거 빼면 적폐가 아직 많이 남았다. 이제 시작이다. 촛불집회에는 계속 나갈 거다.

김준동 헌재의 박근혜 파면 선고를 텔레비전에서 가족과 식사하며 봤다. 점심은 잔치국수였다. 시민들이 권력자를 늘 감시하고 지켜본다는 걸 말하고 싶다. ‘힘 좀 있다고 국민한테 까불지 말라’는 것이다. 이번 탄핵이 궁극적으로 노동자 권리를 회복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이승기 순간 눈물이 났다. 국민들이 권리를 더 잘 행사하기 위해 뽑은 대통령이 오히려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었다. 그가 파면됐다니 울컥했다. 주변에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돌렸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청산할 것이 많이 남았다.

이욱종 8 대 0 만장일치 판결이어서 더 기뻤다. 거리에서 고생하시는 분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얼싸안고 춤췄다.

이은영 헌재 앞에서 선고 결과를 들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고 국민이 주권자가 맞구나 생각했다. 눈물이 났다.

촛불은 끝나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언제 완전히 끝날지 모를 촛불집회에 꾸준히 참석할 것이라고 했다. 과거 비슷한 방식으로 권력자를 상대한 경험에 비춰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번 탄핵 선고를 통해 모두가 더 깊은 성찰을 갖고, 주변의 아픔을 돌이켜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서로 다른 촛불 시민들에게 전했다.

남영신 함께 만들어낸 결과에 대해 자축하는 의미로 서로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면 좋겠다. 정치는 우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으면 좋겠다. 지난 10여 년 동안 정권은 과거처럼 마음에 안 든다고 잡아가는 게 아니었다. 밥줄을 끊고 희망을 내치게 만들었다. 앞으로는 희망을 만드는 과정을 하나하나 만들어가면 좋겠다.

이욱종 우리 삶과 동떨어졌다고 생각한 국민주권 문제, 인권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스스로 권리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광수 탄핵 인용 선고로 즐거워졌다. 다음주에도 촛불 들고 나와야 할 것 같다. 촛불의 힘이 완전히 자리잡은 것 같다. 시민들이 공감대를 이룬 일에 대해 이렇게 늘 힘을 모았으면 한다.

새로운 대통령에 거는 기대
5차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해 11월26일, 연인끼리 가족끼리 탄핵 촛불을 든 모습이 정겹다. 정용일 기자

5차 촛불집회가 열린 지난해 11월26일, 연인끼리 가족끼리 탄핵 촛불을 든 모습이 정겹다. 정용일 기자

새 대통령 선거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이들은 새 대통령에 거는 기대를 통해 다가올 희망을 말했다.

김이하 새 대통령에게 남북 문제를 말하고 싶다. 북쪽에 햇볕정책을 펴고 화해 무드로 가야 한다. 정경유착과 노동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서민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다.

김준동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람, 국민을 상대로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사람, 국민을 섬기는 사람이 필요하다.

김은실 거짓말을 안 하면 된다. 약속한 것을 꼭 지키는 대통령이면 더 좋겠다.

이은영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친일 문제를 청산해야 한다. 해묵은 과거를 청산하지 않고는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 받는다는 인식을 심는 것도 중요하다.

이영기 검찰이 국가권력을 흔들어왔다. 검찰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아야겠지만, 정부도 검찰 중립성을 확보할 대책을 내놔야 한다. 이번 국정 농단 사태에서 보듯 공무원 비리를 막을 고위 공직자 비리 수사처도 필요하다.

이승기 다시는 이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새 정부가 사회 시스템을 제대로 갖춰야 한다.

남영신 권력자들이 현장에 있어야 한다. 자신을 지지해준 국민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새 대통령에게 바라기보다 내가 할 일을 하고 싶다. 주변 시민들과 함께 힘을 모으고 싶다.

이욱종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혀서 이제라도 유가족의 한을 풀어줬으면 좋겠다. 과거 독재정권의 적폐가 이번 게이트의 원인이기도 하다. 잘못된 과거 유산을 청산하는 것도 꼭 필요하다.

이광수 이번 사건을 통해 시민사회 전체가 공감대를 만들고 인식 수준을 높인 것 같다. 대통령이 사익을 추구하려 언론을 장악하지 말고, 국가정보원이나 검찰도 깨끗하게 물갈이했으면 좋겠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꺼지지 않는 촛불을 드립니다. 탄핵/대선 특대호 1+1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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