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눈뜨자마자 후회한다. ‘끝까지 서명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지난달 희망퇴직 신청서에 서명하고 난 뒤로 그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고통스럽다. 회사에서, 사회에서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A씨는 한 대기업에서 10년 이상 일했다. 나름 열심히, 고분고분하게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회사는 그를 버렸다. 그것도 무자비하게. 비참하다. 억울하다. 힘들다. 불명예스럽다. 막막하다. 왜 하필 나였을까? 이제 어쩌지? 상황을 곱씹으며 되삼키는 단어들이 여전히 서걱서걱 마음을 벤다.
20~30대도 피할 수 없는 칼날
회사는 고용노동부가 지난 1월22일 전격적으로 ‘저성과 해고’ 지침 시행을 발표하자마자 칼날을 들이밀었다. 회사 임원은 A씨를 불러 ‘저성과 해고’ 지침을 언급하며 희망퇴직 신청서에 서명할 것을 종용했다. 퇴직 위로금이라도 받으려면 지금 서명해야 한다고도 설득했다. 반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몇 년 전부터 회사는 “경영 체질을 바꾸겠다”며 해마다 일정 규모의 인력을 명예퇴직시키고 있다. 30대 중반도 칼날을 피해가지 못한다. 희망퇴직자 선정 기준은 인사고과 성적이다. 회사는 매년 직원의 등급을 매겨 평가하는데, A씨가 하위 등급을 받았다는 이유였다. 고용노동부 지침에 등장하는 이른바 ‘저성과자’다.
A씨의 동료인 B씨 역시 ‘찍퇴(찍어서 퇴직)’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오른 것을 알고는 포기하듯 희망퇴직 신청서에 서명했다. 노동조합도 없는 회사에서 홀로 싸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버티다 못한 A씨도 결국 다른 동료들처럼 짐을 쌌다.
“저성과자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도 주관적이고 왜곡된 평가 결과를 근거로 희망퇴직을 강요한 것은 명백한 부당해고다.” A씨와 상담한 윤성봉 변호사는 “고용노동부가 저성과 해고 지침 카드를 들고나온 이후로, 노동조합 법률 자문을 맡고 있는 금융계를 포함한 일선 기업 내부에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널리 퍼져 있다”고 말했다.
A씨가 겪은 일은 특정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말부터 대기업들에선 ‘찍퇴’ ‘콕퇴(콕 찍어서 퇴직)’ ‘강퇴(강제퇴직)’ 공포가 번지고 있다. 장기간의 경기침체로 인력 구조조정 규모가 커진데다, 지난해 시작된 고용노동부의 해고 지침 시행 논란이 기폭제가 됐다.
두산인프라코어는 20~30대 젊은 신입사원을 희망퇴직 시켰다가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았고, 대신증권·SPC·한라건설 등도 저성과자로 낙인찍어 희망퇴직을 종용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들도 최근 월실적 60건 이하의 직원들에게 경고장을 발부하고 3번 이상 경고장을 받으면 저성과자로 분류한다고 알렸다.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노조원을 표적으로 저성과자 해고 수순을 밟으려는 의도”라며 반발하고 있다.
실제로 저성과자 해고가 늘어나고 있는 걸까? 최근 민주노총이 펴낸 ‘노동위원회 판정례를 통해 본 일반해고 지침의 위험성’ 보고서를 보면, 업무능력 부진 등을 이유로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낸 사건의 수가 2012년 107건에서 2015년 183건으로 늘어났다(그림 참조). 2015년은 정부가 해고 지침 논의를 꺼낸 시점이다. 정부가 해고 지침 논의를 꺼낸 것만으로도 기업에 ‘쉬운 해고’의 신호를 준 셈이다.
“법에 없는 해고 사유 지침으로 구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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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기준법은 사용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노동자를 해고하지 못하도록 못박고 있다. 노동위원회와 법원은 ‘정당한 이유’를 엄격하게 제한해왔다. 노동자가 질병, 부상, 구속 등으로 일할 수 없거나 회사가 긴박한 경영상의 위기로 인력을 감축해야 하는 경우 등이 ‘정당한 이유’에 해당한다.
그런데 고용노동부가 1월22일 공개한 ‘공정인사 지침’은 ‘업무능력 결여, 근무성적 부진’ 등도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정부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인사평가를 임금보상·교육훈련·배치전환 등과 연계해 직무능력과 성과 중심으로 인력을 운영할 수 있도록 산업 현장을 바꾸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해고 전에 교육훈련 기회와 적합한 업무로 배치전환 등 고용 유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그러나 노동계와 학계는 “근로기준법에 규정되지도 않은 해고 사유를 지침으로 구체화해놓은 꼴”이라며 비판한다. 그동안 법으로나 판례로나 저성과 해고는 원칙적으로 ‘금지’되고 예외적으로만 ‘허용’돼 있었는데, 마치 원칙적으로 ‘허용’된 것처럼 지침에 명시해놓았기 때문이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인사평가가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일정 비율의 직원에게는 무조건 하위 등급을 줘야 하는 상대평가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누군가는 최하위 등급을 받아 ‘저성과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면, 평가 기준을 둘러싼 회사 안팎의 갈등은 피할 수 없다. “해고를 둘러싼 갈등을 줄이겠다”는 정부의 구상과는 반대로 ‘저성과자 해고’와 관련한 법적 분쟁이 오히려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저성과자 해고’가 최근 판례의 흐름상 ‘정당한 이유’로 여겨져왔던 것도 아니다. 민주노총이 2001~2015년 부당해고 사건을 다룬 노동위원회 판례 3만5335건을 분석한 결과를 봐도, 다른 징계 사유 없이 ‘저성과’만을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한 사건 115건 가운데 ‘정당한 해고’였다고 인정된 사건은 11건에 불과했다. 나머지 대부분에 대해 노동위원회는 ‘부당해고’로 판단했다.
윤성봉 변호사는 “순수하게 저성과, 직무능력 결여만으로는 해고의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게 기존 법원 판례의 경향이었다. 회사가 근무 태만이나 다른 징계 사유를 저성과와 묶어 해고했던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노동부는 노동위원회나 법원이 마치 저성과자 해고를 정당하게 판단해온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고용노동부의 행정지침은 법률이나 시행령과 달리 법적 강제력이 없다. 하지만 법에도 없는 ‘찍퇴’ ‘명퇴’를 시행해왔던 기업들 입장에서 법적 강제력이 없다 해도 ‘저성과 해고’ 지침은 반가운 선물이다. 이미 A씨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직원을 찍어내는 새로운 무기로서 ‘저성과 해고’ 지침은 악용되기 시작했다. “지침은 쉬운 해고가 아닌 직무능력과 성과 중심의 인력 운용을 위한 신호등 역할을 할 것”(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라는 정부의 장담과 달리, 실제 산업 현장에서는 ‘쉬운 해고’의 신호등이 켜졌다.
‘쉬운 해고’ 신호탄… 기업에 새로운 무기A씨는 “막막하다”고 했다. 앞날이 캄캄해서만이 아니라 지나온 날이 “후회된다”고도 했다. “충성했던 회사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나를 이렇게 버렸다”는 생각에 자꾸만 자존감이 무너져내린다. 자신이 ‘저성과 해고’ 지침의 희생양이 된 것만 같아 “억울하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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