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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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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외종손, 일본군 악역을 맡다

일본군 악역 맡은 김구의 외종손 임성철·형·아내가 참여… 제작비 마련하다 희귀병 얻어 대수술… 그래도 "너무 행복하다"
등록 2016-02-05 02:23 수정 2020-05-03 04:28

산속 구덩이에 온기를 잃은 사람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위안소까지 끌려와 이렇게 죽어선 안 될 가여운 ‘옥분’이와 ‘순이’의 주검도 다른 위안부 피해 소녀들과 섞여 있다. 총으로 쏜 것도 모자라 일본군은 이 구덩이로 불씨 하나를 더 던진다. 이 불은 차라리 나비가 되어서라도 고향으로 날아가고 싶었던 소녀들의 날개마저 까맣게 태워버린다.
이것은 영화적 허구가 아니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인 강일출 할머니가 직접 목격하고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의 그림을 영화적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아무 의심 없이 지지하는 한 사람

<귀향>에서 일본군 역을 맡은 임성철씨가 등장한 장면이다. 조정래 감독은 7년 전, 그의 이 눈빛을 보고 일본군 역을 제안했다.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귀향>에서 일본군 역을 맡은 임성철씨가 등장한 장면이다. 조정래 감독은 7년 전, 그의 이 눈빛을 보고 일본군 역을 제안했다.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2월24일 개봉)에서 ‘죽음의 불씨’를 던지는 일본군을 연기한 사람은 임성철(39)씨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 선생의 외종손이다. 김구 선생의 사촌이 그의 할머니(김진희)다. ‘김구의 외종손과 일본군 악역’의 부조화. 이 결합은 7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미술을 전공한 그는 배우 활동을 준비하다 자문을 받으려고 한 배우를 만나러 갔고, 그 장소에 다른 일로 들른 조정래 감독과 우연히 합석하게 됐다. 성철씨의 얼굴에서 감독은 위안부 소녀들이 두려워했을 법한 눈빛을 읽어낸다. 감독은 성철씨에게 2002년부터 구상한 자신의 영화 에서 일본군 역을 맡아줄 수 있겠느냐고 제안한다. 그리고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많은 위안부 소녀들의 슬픈 이야기를 다룬 을 성철씨에게 풀어놓았다.

“머릿속에서 을 수만 번 찍어보지 않았다면 저렇게 2시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얘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감독이 그럴듯한 얘기를 지어낸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독이 말한 영화의 내용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과 실화를 토대로 한 것이었다. 성철씨는 “어린아이들까지 위안부로 끌려가 숨졌다는 것을 몰랐던 내가 부끄러웠고 화가 났다”고 했다.

감독이 성철씨를 이 영화에 이끌었지만, 점점 성철씨가 감독의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갔다. 투자를 받지 못해 촬영이 계속 늦춰지던 2013년, 영화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나갔다. 감독은 삶의 비관 속으로 자신을 깊이 밀어넣었다. 곁을 지켰던 성철씨가 감독이 쓰러지지 않도록 잡아주었다.

“나처럼 아무 의심 없이 지지하는 사람이 형(조정래 감독) 곁에 한 명이라도 있다면 성공한 거 아니야? 내가 (백만대군이 아니라) 형의 억만대군이 되어줄게. 형이 을 만들 핵심 DNA다. 그러니 을 위해선 형만 살아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아직도 지지하는 내가 있으니 이 영화를 만들 수 있어.”


아내는 이후에도 아트워크팀으로 이 영화에 계속 참여했다. 장모님은 담보 대출을 받아 이 영화의 제작비에 보탰다. 성철씨는 에 매달리면서 "좀 가난해졌다"며 웃었다.

앞서 그는 자신의 친형에게도 이 영화를 소개했다. 형 원철씨는 미술을 전공한 뒤 한옥 대목수 일을 하고 있었다. “소녀를 데려오자”는 감독의 말에 원철씨의 마음도 크게 움직였다. ‘타지에서 숨진 위안부 피해 소녀들의 넋을 영화에서나마 고향으로 데려오자’는 감독의 진심을 본 것이다. 그는 영화에서 미술감독을 맡아 합류했다. 미술감독은 영화 세트와 소품 디자인, 영화 전반의 색감 설정 등을 통해 작품의 공간과 시간(시대적 배경)을 만들어낸다.

투자자들의 외면으로 영화를 찍을 수 없게 되자, 성철씨는 그림을 보여주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미술학원을 운영하던 그는 제자, 학원강사, 후배들을 데리고 위안부 문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가 스러지는 걸 아무도 몰랐다

평소 그림 작업을 해왔던 그의 아내도 동참했다. 아내는 어린 딸과 아들이 자는 밤과 새벽을 이용해 작업을 진행했다. 2014년 10월 국회에서 의 제작발표회를 조용히 연 날, 성철씨와 아내는 이 그림들을 공개한 전시회를 열었다. 아내 이혜미씨가 그때의 작업을 떠올리며 얘기했다.

“작업하면서 나는 ‘대필화가’라고 생각했어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고통을 내가 감히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죠. 죄송하면서도 위로하는 마음을 담아 그렸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할머니들이 살아 계신 게 감사했어요. 한 분이라도 살아 계시지 않았다면 그런 역사의 아픔, 힘없이 당한 걸 우리가 알지 못했을 테니까요.”

아내는 이후에도 아트워크팀으로 이 영화에 계속 참여했다. 장모님은 담보 대출을 받아 이 영화의 제작비에 보탰다. 성철씨는 에 매달리면서 “좀 가난해졌다”며 웃었다. 미술학원에 집중할 수 없어 수입이 크게 줄어든 그는 전셋집에서 나와 월세를 내는 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또 하나, 성철씨의 건강이 급격히 스러지고 있다는 걸 그도, 아내도, 친형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지난해 4월 본격적인 촬영을 앞두고 제작비를 끌어오는 일을 책임지는 PD까지 맡게 됐다. 시민들의 제작비 후원이 급증하면서 촬영에 들어가긴 했지만, 세트 제작비 등으로 인해 촬영 초반부터 후원금이 빠르게 고갈됐다. 촬영하는 데 당장 필요한 돈을 구하는 것은 성철씨 몫이었다.

그 무렵 그의 몸은 바람이 들어간 풍선처럼 퉁퉁 부어올랐다. 몸이 살짝 부딪혀도 피멍이 올라왔고, 걸을 때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뾰족한 통증이 몸을 찔렀다. 형 원철씨는 성철씨가 아팠던 얘기가 나오자 “동생만 생각하면…”이라고 말하며 금세 눈물을 글썽였다. 당시 원철씨도 적은 제작비로 위안소 세트장을 짓는 등 미술감독으로서 바쁜 시간을 보낼 때였다.

“촬영을 시작한 지 일주일쯤 됐을 때 동생이 너무 아파해서 ‘이제 동생이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동생이 지금 너무 행복하다는 거예요. ‘네가 행복해하니 그럼 형이 끝까지 뒤에서 도와줄게’라고만 생각했죠.”

그때까지도 성철씨가 희귀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의상감독 일까지 맡은 형 원철씨는 일본군 군복 등 의상과 소품을 찾아다녔고, 동생 성철씨는 제작비를 구하러 다녔다. 성철씨는 “어느 날 배우와 스태프가 전부 촬영장에 있고 돈을 구하러 혼자 나가는데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하지만 내가 나가지 않으면 촬영을 위해 모인 배우와 스태프가 모두 분해되고 밥을 굶겠구나 생각했어요. 오히려 이렇게 아픈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죠. 불쌍해서라도 (제작비를) 도와주시지 않을까 싶어 나중엔 아픈 것도 감사했어요.”

<귀향>에 참여한 임성철 PD의 가족. 왼쪽부터 임 PD, 아트워크팀으로 참여한 아내 이혜미 씨, 미술감독을 맡은 친형 임원철씨. 송호진 기자

<귀향>에 참여한 임성철 PD의 가족. 왼쪽부터 임 PD, 아트워크팀으로 참여한 아내 이혜미 씨, 미술감독을 맡은 친형 임원철씨. 송호진 기자

통장 깨 50만원 투자한 초등학생

이런 그에게 투자의 손길을 내민 것은 거창한 기업들이 아니었다. 배관공, 동네 카센터 사장, 헬스 트레이너 등 시민들이었다. 학원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세뱃돈과 용돈을 저축한 통장을 깨서 50만원을 투자한 초등학생도 나타났다.

PD, 일본군 배역 등 1인 다역을 해낸 그는 촬영을 모두 마친 뒤 아내에게 “꿈만 같다”고 얘기했다. 많은 이들이 촬영조차 하지 못할 것이라던 영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증세가 악화돼 재입원했다. 그곳에서 ‘쿠싱병’의 존재를 발견했다. 이미 오래전에 모든 걸 중단했어야 하는 지경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됐다. 심한 스트레스는 쿠싱병의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다. 그는 종양을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았다. “남편이 수술실에 들어가니까 너무 떨려 혼자 병실에 가서 기도하며 기다렸다”고 아내 혜미씨는 말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끝났다. 당시 조정래 감독은 미국 연방의회 의원회관에서 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틀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있었다. 형 원철씨가 수술 소식을 알렸다. “수술 잘 끝났어요.” 그 한마디만 하고 두 사람은 한참 말을 못한 채 울기만 했다. 그때부터 조 감독은 “은 임성철 PD의 목숨값으로 만들어진 영화”란 말을 자주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임 PD 가족의 손길이 곳곳에 묻어 있다. 형 원철씨는 도면으로만 남아 있는 과거 일본군 위안소 관련 자료를 토대로 영화의 중요한 무대인 위안소 세트장을 지었다. 경남 거창의 폐가를 이용해 14살에 위안부로 끌려간 주인공 ‘정민’이의 집도 만들어냈다. 제작비를 끌어온 동생 성철씨는 공포스러운 눈빛을 지닌 일본군으로도 출연해 화면을 채운다.

“쿠싱병으로 많이 아팠지만 그래도 병원 침대에서 보호를 받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도 해줬잖아요. 당시 위안부 피해 소녀들은 이것보다 더 아프고 고통스러웠겠죠. 국가가 약해서 보호하지 못해 물리적 외압으로 끌려가 고통을 당한 것이잖아요. 자신이 선택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곳에서. 사실 제가 아팠던 건 그 소녀들에 비하면 호강한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성철씨는 그동안 김구 선생의 외종손이란 사실에 거의 둔감한 채 살아왔다고 했다. 조정래 감독을 만나 에 운명처럼 빠져든 그는 이 영화를 하며 조금씩 ‘김구의 외종손’이란 말의 무게를 생각해보았다고 한다.

“할아버지(김구)만큼은 아니어도 부끄럽게 살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이 영화를 만들며 힘들었을 때 위로가 되었어요. 이 영화를 만드는 게 쉬웠다면 누군가 했겠죠. 어려운 것이니 제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영화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나중에 하늘에 가서 (김구 할아버지를) 뵈었을 때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어요.”

형 원철씨는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며, 을 영화적 증거로 만들려 했던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할아버지 뵐 때 부끄럽지 않겠죠”

이 가족이 겪어온 지난 몇 년은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성철씨도, 아내 혜미씨도 “당시엔 힘들었지만 사실 지금은 기억이 안 나요”라며 웃었다. 지금 이 가족은 전국 개봉이란 믿기지 않는 설렘에 휩싸여 있다. 과연 얼마나 많은 극장에서 영화가 개봉될 것인지에 대한 걱정도 하고 있다. “많은 시민들이 후원하고 투자해 (시민들 스스로) 멋진 일을 해냈다고 생각하는데 이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극장에 많이 걸렸으면 좋겠다”고 성철씨는 말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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