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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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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야 하고,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왔다”

제작부 스태프… 2013년 연극 <귀향>을 만든 호서대생들 수익금 5만원 보내 첫 인연
등록 2016-02-03 06:12 수정 2020-05-03 04:28

이건 위안부 문제를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어떤 인연에 관한 이야기다.
2013년 여름, 호서대에서 연극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연극 한 편을 올려보자는 데 뜻을 같이했다. “사회문제로 실험극을 만들어보자”던 이들이 가닿은 곳은 위안부 문제였다. 이들은 이 아픈 역사에 관한 증언집, 사진집, 시집을 찾아서 읽다가 울다가 멈추었다가 다시 보기를 반복하며 공동으로 희곡 한 편을 완성했다.
이 연극을 연출하고 배우로도 출연한 노영완씨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 분씩 돌아가셨고, 무엇보다 이 일을 잊지 말자고 생각해 연극을 올리게 됐다”고 했다.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어떤 인연

호서대 학생들이 만든 연극 <귀향>의 장면들(왼쪽). 이들은 이제 영화 의 제작 스태프로 뛰고 있다. 영화사 지하 사무실에 모인 마슬기, 주민희, 노영완, 김예지, 김은나씨(왼쪽부터).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호서대 학생들이 만든 연극 <귀향>의 장면들(왼쪽). 이들은 이제 영화 의 제작 스태프로 뛰고 있다. 영화사 지하 사무실에 모인 마슬기, 주민희, 노영완, 김예지, 김은나씨(왼쪽부터).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연극은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연극은 할머니가 된 ‘순이’의 과거를 따라간다. 순이와 함께 위안소로 끌려간 여성들, 그곳에서 먼저 죽은 소녀를 붙잡고 터뜨리는 눈물, 해방을 맞아 누군가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지만 돌아가는 게 두렵다는 어느 소녀의 절망, 고향으로 온 순이를 냉대하는 사람들의 차가움. 연극은 할머니가 된 순이가 자신의 어린 시절 순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장면으로 무대를 닫는다.

1시간여의 극이 끝나고 무대에 선 배우들의 눈이 뜨거워졌다. 연극을 본 학교 학생들의 눈이 똑같이 빨갛게 뜨거워져 있는 것이 무대에서도 보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 연극을 들고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세계대학연극축제(2014년 5월)로 갔다. 연극 한 편이 끝나면 각국의 학생들이 그 연극에 대한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데 호서대 학생들의 연극이 끝난 날엔 일정상 그 시간을 갖지 못했다. 무대를 정리하고 아쉬움을 안은 채 숙소로 돌아와 버스에서 내리던 순간의 감흥을 그들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각국의 학생들이 숙소 앞에서 기다리다 이 연극을 올린 한국 학생들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이들은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의 손을 잡아주며 눈물을 흘려줄 때 우리가 할머니들을 대신해 위로를 받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이들은 그해 7월 세계대학연극학회의 초대로 벨기에에서도 이 연극을 올렸다.

이 연극은 학생들에게 또 하나의 변화와 인연을 안겨주었다. 학생들은 2013년 가을 이 연극을 학교에서 올려 ‘5만원’의 수익금을 얻었다. 위안부 문제를 잊지 않는 일에 쓸 수 있도록 자유롭게 정성을 보태달라고 부탁했는데, 연극을 보러 온 학생들이 몇백원, 몇천원씩 낸 것이다. 큰돈은 아니지만 의미 있게 쓰고 싶었던 학생들은 우연히 자신들의 연극 제목과 똑같은 영화 한 편을 인터넷에서 발견했다. 호서대 연극 전공 학생들이 만든 연극 과 조정래 감독이 2002년부터 준비하던 영화 이 인연을 맺는 순간이었다.

절박해 보이는 감독… ‘할 일이 생겼구나’

2013년 가을엔 영화 이 언론에 소개된 적이 없었을 때이고, 투자자를 찾지 못해 이 영화를 같이 준비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감독 곁을 떠나갔던 시기였다. 연극 을 만든 학생들이 조정래 감독에게 5만원을 보낸 건 영화 이 흔들거리던 시점이었다.

연극 에 출연한 김은나씨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께 드리는 것도 생각했지만, 할머니들 가까이에서 이 이야기를 만들어 널리 알릴 수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또 다른 전쟁의 피해자들을 만나기 위해 베트남에 갔다가 그곳 하노이에서 거리극을 진행해 모은 6만원도 영화 팀에 보냈다.

연극 과 영화 이 다시 만난 건 2015년 초였다. 연극 을 이끈 노영완씨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수요집회에서 영화 의 조정래 감독을 보게 된 것이다.

“그날 감독님이 손을 잡으며 인사를 하는데 절박해 보였어요. ‘이 사람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겠구나’라고 생각했죠. (연극 에 출연했던) 친구들에게 연락했어요. ‘애들아, 우리가 할 일이 생긴 것 같다’고.”

연극 에 참여한 노영완, 김은나, 정부경, 마슬기, 김예지, 그리고 이들과 같은 과인 주민희 등이 영화 의 제작부 스태프로 합류했다. 비교적 위안부 문제를 잘 이해하는 이들의 참여는 영화 에 큰 힘이 되었다.

제작부는 배우와 스태프가 촬영 현장에서 밥을 먹고 숙소에서 자는 문제, 배우와 스태프들의 이동, 촬영장에서 주민들의 동선 통제 등 촬영 전반에 관한 모든 잔무를 담당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일을 “촬영 과정에서 구멍이 나지 않도록 하는 모든 일”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은 영화에서 동사무소 직원, 위안부 소녀 등 단역으로 출연도 했다.

이 후원자를 위한 1차 전국 시사회를 할 때도 이들은 티켓 발부, 자리 안내 등을 맡아 사고 없이 시사회를 마무리했다. 민희씨는 “후원자분들이 일반 영화를 보러 올 때의 표정으로 극장에 들어갔다가 영화를 다 보고 벅찬 감동의 눈빛으로 나오는 모습을 봤을 때 나도 큰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어떤 할머니는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돈을 주려고 해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은나씨는 지난해 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있는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에게 이 영화를 상영한 날을 특별하게 기억했다.

“할머니들이 영화에서 소녀들이 끌려가는 장면이 나오면 입을 막으시고, 위안소 장면에선 눈을 가리시기도 했어요. 영화에서 (위안부로 끌려간) 주인공이 ‘이제 집에 가자’라고 말하면 할머니들이 ‘집에 어떻게 가. 못 가’라고 말씀도 하고, (일본군이 칼을 휘둘러 생긴) 상처를 직접 보여주시기도 했어요. 그날 찢어질 듯한 마음으로 많이 울었어요.”

“함께 꿈을 이뤄가는 행복한 시간”

대학을 졸업한 직후이거나 졸업을 앞둔 이들은 20대 중반을 통과하는 뜨거운 청춘의 한 토막을 이 영화에 모조리 투자했다. 슬기씨는 “(영화 완성이란) 꿈을 같이 꾸고 함께 꿈을 이뤄가는 이 시간이 값어치가 있고 행복하다”고 했다. 예지씨는 2월 졸업을 앞두고 이 영화에 시간을 쏟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어머니가 시사회에 다녀간 뒤 “(최근에) 다른 영화도 봤는데 이 훨씬 낫더라”고 한 말을 전하며 눈물을 보였다. “엄마랑 다시 얘기할 물꼬를 틀 수 있게 한 이 영화가 너무 고맙다”고 했다.

이들은 연극을 전공하며 배우, 연극심리치료사 등을 꿈꿔왔다. 아픈 역사,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극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이들은 지금 영화 의 스태프로 참여한 것에 대해 “내가 해야 하고,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왔다”고 얘기했다. 자신들이 제자리를 찾았듯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 피해자 할머니들도 모든 한이 풀려 “제자리로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에  동참한  다른  배우와 스태프들


“개처럼  일했지만  뿌듯하다”


정무성·류신(일본군 역)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정무성(위쪽)씨는 재일동포 2세, 류신씨는 재일동포 3세다. 극중 주인공 ‘정민’(위안부 피해 소녀) 역을 맡은 재일동포 4세 강하나(실제 나이 16살)와 함께 이 영화에서 주요 배역을 맡은 재일동포 배우들이다. 일본 배우들이 민감한 소재의 영화라며 출연을 꺼리자 ‘우리가 일본군을 맡으면 어떻겠느냐’고 감독에게 의사를 전했다고 한다. 연기 경험은 없지만 시사회에서 관객이 원성을 내지를 만큼 잔혹한 일본군을 연기했다. 촬영과 연습을 위해 한국에 올 때 제작비 부담을 줄이려고 자비를 사용했다. 제작비도 후원했다. 정무성씨는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무시당하며 살았는데 에 출연하며 모든 분들이 한국 사람으로 대해줘서 처음으로 한국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영화를 통해 우리가 ‘귀향’한 것 같다”고 했다.


강상협(촬영감독)
조정래 감독의 전작 에 이어 촬영을 맡았다. 2014년 가을 하루 동안 경남 거창에서 의 짧은 소개 영상을 찍었을 때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촬영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시민 후원이 이어져 2015년 4~6월에 모든 촬영을 마쳤다. “자극적인 장면을 만들기보다 (위안소에서 겪은) 끔찍한 일을 거부감 없이 보여주면서 영화 이미지로 어떻게 각인시킬까 많이 고민했다”고 했다. 영화에선 위안소의 방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카메라 시선이 움직이는 장면이 나온다. 제작진이 ‘지옥도’라고 이름 붙인 장면이다. 그는 “소녀들이 같은 공간에서 고통받는 것을 시각화한 장면”이라고 말했다.


박주현(조명감독 겸 PD)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영화 에서 조명감독을 맡았다. 3년 정도 영화 일을 하지 않다가 의 조명감독으로 복귀했다. 그는 “7살 딸이 있는데 딸이 나중에 아빠가 어떤 영화를 했는지 찾아봤을 때 을 만들었다고 하면 아빠를 자랑스러워할 것 같았고, 딸이 학교에서도 볼 수 있는 영화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빛(조명)을 통해 위안부 피해 소녀들의 내면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촬영이 끝난 뒤엔 PD까지 맡아 영화 개봉에 힘쓰고 있다.


이여원(기획팀장)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한 ‘나비’라는 제목의 졸업작품을 진행하며 심적으로 지쳐 있었을 때 위안부 소재의 영화 이 만들어지는 걸 알고 큰 힘을 받았다. 이후 귀국해 조정래 감독을 찾아가 “내가 생각하는 월급 정도만 주면 개처럼 일하겠다”고 말하고 기획팀장 일을 맡았다. 팸플릿 등 각종 디자인 업무, 엔딩 크레디트 작업 등을 했다. 지난해 미국 연방의회 의원회관에서 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틀었을 때 영어 자막 작업 등 번역도 맡았다. “한국에 10년 만에 돌아와 이런 프로젝트에 참여해 뿌듯하다”고 했다.


이승현(배우 겸 후반작업 조연출)
대학교에서 원예·조경 쪽 전공을 하다가 배우의 길로 진로를 바꿨다. 에서 총을 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일본군 ‘다나카’를 맡았다. 전장에 투입된 이런 청년들도 전쟁의 피해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감독이 중요하게 설정한 인물이다. 을 시사회에서 본 일본인이 “진짜 일본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할 만큼 일본어를 완벽히 구사했다. 촬영이 끝나고도 조감독을 맡아 컴퓨터그래픽, 색보정, 자막 등 후반작업을 돕고 있다.


*사진: 제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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