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에 대비하는 고대사 개설서는 더러 나와 있다. 그러나 딱딱한 사실이 나열돼 있어 재미가 없다. 전문적 연구서들은 서점에 넘치지만 일반 시민이 읽기에 벅차다. 하지만 이 책은 한국 고대사의 요모조모를 여러 주제로 나눠 쉽게 설명한다.
고조선·삼국·통일신라·발해를 포함한 고대문화를 44개의 테마로 나눠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엮었다. 일반인들은 흔히 ‘영광스런 고대사’란 주장에 이끌리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류의 주장 등을 위서라고 판단하는 근거, 오늘날 민족 관념의 잣대로 고대의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해선 안 되는 이유, 영광스런 고대사를 강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 등을 담담히 전한다. 또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 처용이 과연 아라비아인일까 등 흥미로운 주제를 이해하기 쉽게 썼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설화에 깃든 역사적 배경을 흥미롭게 재구성한 것이다. 온달 전기에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는지를 탐구하듯 서술한 것이 대표적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가 그리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에 실린 경문왕 이야기에도 있다고 책은 소개한다. 경문왕과 그 딸 진성여왕에 얽힌 이야기도 신라가 멸망해가는 과정을 곁들여 설명한다.
하일식 연세대 교수(사학)고대사, 역사 분쟁 해법의 실마리 이성시 지음, 박경희 옮김, 삼인 펴냄, 2001동아시아 역사 분쟁의 쟁점 중 상당수는 고대사다. 고대사를 둘러싼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이해가 그만큼 다르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역사 연구는 대부분 국민국가를 단위로 했다. 국가의 역사, 즉 국사(國史)가 역사학을 지배했다. 그런 만큼 근대에 성립된 국민국가의 시각이 연구에 투영됐다. 한국·중국·일본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국민국가가 고대의 민족에서부터 이어져왔다고 여겼고, 고대 민족사의 영광을 지금의 것처럼 자랑하고자 했다. 역사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는 학문 구조다.
이 책은 부제처럼 지금의 고대사 연구가 근대 국민국가의 이야기였음을 지적하고 반성을 촉구한다. 나아가 고대사는 고대인의 시각에서 이해하자고 제언한다. 물론 그 시각을 완벽히 재현하긴 어렵지만 노력은 할 수 있다. 가령 국민국가의 관점에서 배제된 역사의 다양한 주체를 찾아볼 수 있다. 변경 지대의 이종족, 이주민, 국경을 넘나든 상인집단 등 역사 속에서 중요했지만 국민국가의 이야기에 포섭되지 못한 이가 적지 않다.
그들의 관점을 복원할 때 국민국가에 갇힌 국사를 뛰어넘어 고대인의 시각에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역사 분쟁 해법의 실마리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투쟁과 대립이 아닌 화합과 공존의 장으로서 고대사를 재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의 일단이다.
이정빈 경희대 연구교수(한국고대사)■ 중세사 교과서에 박제된 이색을 구출하다 이익주 지음, 일조각 펴냄, 2013당신의 일생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가?
성리학을 익힌 사대부였으나 조선 개국에 반대한 온건파. 고려 말의 대표적 정치가인 이색의 일생에 대한 교과서적 서술이다. 저자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이 전부일까?
저자의 눈은 이색이 스물한 살 청년 시절부터 예순여덟 노인이 됐을 때까지 쓴 4천 편 이상의 글이 실린 문집으로 향했다. 이 작품들에는 이색의 일상, 고민, 현실 인식 등 다양한 모습이 파편화돼 담겨 있다. 저자는 애정 어린 손길로 끈기 있게 퍼즐을 맞춰간다. 조각의 아귀가 잘 맞지 않는 건 당연하다. 필자는 고려 후기에 대한 오랜 연구로 축적된 시대상 이해를 아교 삼아 조각들을 연결한다.
이렇게 맞춘 퍼즐은 비로소 원·명 교체기라는 국제 질서의 변화에 대처해야 했던 고려인들의 고민, 새로운 학문인 성리학을 통해 세상을 바로잡고자 했던 사대부들의 꿈,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개혁을 둘러싸고 격론을 벌인 동지와 숙적의 애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정몽주·이성계·정도전 등과 때로는 동지로, 때로는 숙적으로 뒤엉켜 한 시대를 풍미한 이색. 최신 학문인 성리학의 고려 전파에 기여했고, 스스로도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했던 당대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이색. 교과서에 박제화됐던 중세인은 생기를 되찾아 온전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선다. 그리고 묻는다. 지금 당신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
김우택 서울대 국사학과 강사 조선 후기 지식인의 고민은 무엇이었을까이경구 지음, 푸른역사 펴냄, 2009
그간 망국과 식민지배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이해됐다. 그중에서도 조선 후기 성리학은 실학과 대비되면서 민생을 외면한 채 공리공담에 매달린 망국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연구자들 사이에선 조선 후기 사상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어느 정도 극복됐지만 대중은 여전히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특히 조선 후기 사상사를 성리학의 소멸과 실학의 등장이라는 단순 도식으로 서술하는 일부 대중사가들 때문에 성리학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한 시대를 이끈 사상에 대한 전적인 부정 혹은 긍정이 올바른 해석인지는 고민해봐야 한다.
책은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사상사를 설명한다. 단순한 결론을 제시해 이해를 강요하기보다 해석이 내려지는 과정을 보여주며 역사적 안목과 비판의식을 높이려고 시도한다. 사문난적(유교 윤리에 어긋난 이들을 비난하는 데 쓴 말)으로 지목돼 희생된 윤휴, 조선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 유형원 등 11명의 사상가를 총 9편으로 나눠 새롭게 해석했다. 조선 후기 지식인의 고민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여러 각도로 조명해 당대의 실정과 현재 ‘일정하게 굳어진 결론’의 차이를 보여준다. 조선의 사상적 흐름과 변화를 조망하고자 한다면 일독을 권한다.
유현재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조선왕조 마지막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정숭교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11
대한제국기의 고관대작 대부분은 일제의 조선 강점에 순응하고 귀족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하지만 개화파의 핵심 인사였던 김가진은 작위를 뿌리치고 74살의 노구를 이끌고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명문가 이회영 등 6형제는 전 재산을 처분해 현재 시세 600억원에 이르는 거금을 만들어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들었다. 경북 안동의 명문가 종손인 이상룡도 노비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만주로 떠나 집안 3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 책의 마지막 특강 ‘조선왕조 500년, 그 마지막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책은 크게 ‘제1장 개항, 조심스러운 선택’ ‘제2장 청과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제3장 자주독립국, 대한제국’ ‘제4장 식민지화의 위기와 민족의 발견’으로 구성돼 언뜻 평이해 보인다. 그러나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사진, 사료, 참신한 주제들의 특강이 본문에서 펼쳐진다. 조선과 일본의 중간 지대로서 쓰시마섬, 동아시아의 황제 등을 다룬 특강을 읽다보면 한국사가 세계사의 한 부분임을 알 수 있다. 국가·민족 중심의 서술 방식을 취하면서도 세계사와의 연관성, 개별 사건과 인물들의 행위에 대한 세밀한 설명을 결합해 한국 근대사를 생동감 있게 전한다.
도면회 대전대 교수(역사문화학)■ 근대사 황국신민을 꿈꾸던 청년은 왜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나 배경식 지음, 너머북스 펴냄, 2008올여름 극장가에서 화제가 됐던 영화 에는 ‘속사포’라는 인물(조진웅)이 등장한다. 그는 그 유명한 1910년대 독립군 양성의 상징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지만 신념보다는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생계형 독립군’으로 관객 앞에 다가온다. 딱딱한 교과서의 지식만으로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이 낯설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소개하고 싶은 책이 이다. ‘기노시타 쇼조’라는 이름은 생소하지만 이봉창이라면 많은 이들이 안다. 비록 실패했지만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31살 청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잘 모른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무엇 때문에 폭탄을 던질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저자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역사가 서술될 때 비로소 영웅과 지사의 인간적인 면모와 삶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봉창은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던 방황하는 식민지 청년이었다. 그는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인 이름을 사용하며 차별받지 않는 ‘황국신민’이 되기를 꿈꿨다. 그랬던 평범한 한 인간이 제국의 심장인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지는 독립운동가로 변신하게 된 사연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고태우 연세대 박사과정(사학) ·대림대 강사 실패한 친일 청산의 역사를 복기하다 허종 지음, 선인 펴냄, 2003‘반민특위’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친일 청산을 목적으로 활동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줄여 부른 말이다. 그러나 그 활동은 미완으로 종결됐다.
세계사에서 20세기는 잔인한 시대였다. 냉전과 제3세계 독립국가들의 수립이 맞물렸고, 숱한 군부정권이 민간인의 생명을 위협했다. 탈냉전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시작으로 어두웠던 시기에 대한 ‘과거사 청산’이 시작됐다. 2005년 한국에서 생겨난 위원회들도 세계사적 흐름과 연관이 있다. 청산의 목적은 ‘처벌’이 아닌 기억과 사죄, 용서와 치유에 있다. 과거사 청산에서 가장 중요한 범죄는 진실을 외면하는 행위다.
사실 과거사 청산은 어느 나라에서나 쉽지 않았다. 정부 수립 직후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기억과 치유를 위해 서로의 입장을 양보했던 것, 그리고 다소간의 흠결 역시 덮어둔 것이 정부 수립 직후의 친일파 청산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 미약한 발걸음마저 멈춘 것은 권력자의 노욕 때문이었다.
역사학자 허종은 실패한 치유의 과정을 복기한다. 친일파의 정의, 처벌 수위, 당사자들의 역학 등 친일파 청산을 둘러싼 모든 사실이 이 책에 있다. 역사학자 한 명의 이야기여서 편협하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이미 이강수 선생이 같은 주제로 같은 시기에 책을 낸 바 있다. 함께 읽고 비교하길 바란다. 역사학은 원래 그런 학문이다.
한봉석 성균관대 박사과정(한국현대사)■ 현대사 분단은 우리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홍석률 지음, 창비 펴냄, 2012한반도는 상시적인 국지전을 경험하고 있고, 국제사회가 ‘악의 축’이라고 부르는 북한과 휴전선을 경계로 마주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주민들의 평화로운 삶을 여러 차원에서 훼방 놓는다. 교전이 발생하면 ‘전쟁 불사’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이제는 “사상적으로 북한의 지배를 받는 기막힌 상황”을 막기 위해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한다고 한다.
한반도에서는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할까? 전쟁을 경과한 분단 상태는 남북한 주민들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 책은 이런 질문을 화두처럼 잡고 집요하게 추적한다. 홍석률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 “여기에 관여된 주체들에게 과도한 흥분, 분노, 공황 상태를 항시적으로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고, 그것을 ‘분단의 히스테리’라고 명명한다. 우리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분단의 정신병증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반도 분단 문제를 이해하려면 전 지구적 차원, 한반도적 차원, 분단국가 내부적 차원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한반도의 주변 환경에 남북 정권이 대응하는 방식에 주목하고, 베트남전과 푸에블로호 사건, 미-중 데탕트와 유신·유일 체제 형성, 미-중 수교와 판문점 도끼 살해 사건 등을 대비시켜 설명한다. 이를 통해 국제적 화해 무드에 역행하면서 남북이 군사적·외교적 대결 구도를 강화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정진아 건국대 HK교수(통일인문학연구단) 비밀국가 북한의 최근사가 궁금하다면 와다 하루끼 지음, 남기정 옮김, 창비 펴냄, 2014“내부 정보를 완전히 비밀에 부치는데 성공한 예외적 국가”인 북한을 이해하기란 까다로운 일이다. 자료 접근의 제약에 따른 곤란에 더해, 북한이 겪어온 변화의 폭은 북한 최근사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 북한을 둘러싼 오해와 무지가 좀처럼 가시지 않는 시점에 와다 하루끼의 가 출간됐다. 그는 북한사 연구의 개척과 발전에 기여해온 가장 주목할 만한 해외 학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이 책은 그가 이제까지 축적한 연구 성과를 통사의 형태로 종합한 북한사 개설서다.
이 책은 논쟁을 촉발할 수 있는 새로운 가설을 제기하거나 생산적인 연구방법론을 제안하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밝히기보다 일반인들에게 북한사를 소개하는 대중서로서 유용한 길잡이가 될 만하다. 그럼에도 날카로운 통찰을 담은 이 저작은 북한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북한의 최근사가 어떠한 테마와 관점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지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아울러 그는 남북관계, 외교관계, 경제위기, 군사정책, 핵개발을 활용한 대외 협상 전략 등 다양한 테마들을 어떻게 북한 현대사에 녹여낼 수 있는지 다각적인 실험을 시도한다. 외국인이란 제3자의 시각에서 북한을 바라본 그의 작업은 북한 현대사의 객관성을 더욱 담보하고 있다. _김재웅 고려대 강사(한국사)
■ 역사일반1991년 영국의 역사학자 케이스 젠킨스가 역사학에 대한 입문서로 출판한 는 원제목 ‘Re-thinking History’에서 엿볼 수 있듯이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1장 역사란 무엇인가, 2장 역사 담론의 기본 문제들, 3장 포스트모던 세계의 역사 연구 등 3개 장으로 구성된 짤막한 이 단행본은 기존 역사를 다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묘사하면서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인다.
책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루는 첫 장에서부터 매력적인 주문을 한다. 먼저 역사와 과거를 구분하라고. 이 양자를 명확히 구분할 때 비로소 과거를 다루는 담론으로서 역사의 본질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책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하나의 역사=진리’라는 모던의 세계를 뛰어넘는 ‘역사 담론’ 개념을 사용한다. 이를 통해 ‘역사’란 사실상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 ‘역사들’이라는 본질을 명료하게 파악할 것을 제시한다.
역사란 역사가에 의해 만들어진 언어적 구성물로서 역사가의 인식론, 방법론, 이데올로기적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에는 ‘지식과 권력의 메커니즘’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역사는 실증주의자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이 된다. 즉, 과거로서 역사는 결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 그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이제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로 대체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명제는 역사의 본질과 관련해 제기되는 기본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열게 한다. △‘진실’은 역사 담론 안에서 어떠한 위상을 갖는가 △객관적 역사란 실재하는가 △편견은 버릴 수 있는가 △역사에서 감정이입은 가능한가 △‘증거’와 ‘자료’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등등.
저자는 과거의 진실은 실제로 알 수 없다고 단언한다. 역사 담론 안에서 진실은 그것을 참인 것으로 만드는 권력을 지닌 사람들에게 의존할 뿐이다. 푸코가 에서 강조한 것처럼, 진실 개념은 하나의 검열관처럼 기능하게 된다. 따라서 편견을 완전히 초월한 객관적 입장이란 있을 수 없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과의 감정이입도 절대 불가능하다. 역사가가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이 일어났는가라는 사실만이 아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왜 일어났는가, 당시 상황에서 그 일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며, 나아가 그것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일이다. 이것은 해석의 차원이다. 이때 절대 중심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역사 서술적으로 구성된 국지적 유형의 지배와 주변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주장한다. “과거는 단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며 증거란 항상 역사가의 담론의 산물”이라고. 각각의 사실들은 ‘사실의 연대기’라고 불리는 역사적 담론의 일부분만을 건드릴 뿐이다.
역사의 본질을 역사 담론으로 설명하는 이러한 견해는 역사에 대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문화 전반에 걸쳐 회의주의가 팽배해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의 결과를 민주적 해방이라는 방향에서 적극적으로 펼칠 것을 전망한다. 민주적 해방은 ‘역사의 본질’을 더 명확히 밝혀주는 동시에 벌어진 틈새를 비집고 수많은 장르의 새로운 역사를 탄생시킬 수 있다. 그리고 도덕적 상대주의나 인식론적 회의주의는 ‘다름’(differences)에 대한 사회적 관용과 적극적 인정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 때문에 저자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반성을 통한 적극적인 회의주의’(a positive reflexive scepticism)를 통해 역사를 사고하고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민주화된 비판 지성을 발전시키는 방안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저자는 반성적 방법론과 역사의 철저한 역사화를 제시하고 있다. 반성적 방법론은 과거와 역사 간의 창조적 구분을 가능하게 하고, 역사의 역사화는 역사 연구·이해를 위한 각자의 입장을 계발하는 출발점이 된다. 역사(history)는 역사서술사(사학사)적으로 구성됐을 뿐이며, 반드시 역사서술(historiography)적으로 읽혀야 하는 것이다. 반성적 방법론을 적용해 역사를 상대화하고 역사화할 때, 역사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고 역사 공부의 지적 즐거움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이지원 대림대 교수(한국사) 평범한 개인이 역사의 민낯과 마주쳤을 때 노마 필드 지음, 박이엽 옮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5최근 한국·일본 양국에서 역사 교과서에 대한 정부와 권력의 개입과 통제가 점차 심해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검정 강화’를 통해 사회 교과서와 역사 교과서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서술을 지워가고,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 정부와 여당은 국민의 광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예 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정권의 입맛에 맞는 역사 교과서 편찬을 강행하고 있다. 두 나라에서 역사를 정치적 도구로 만들고, 또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원리를 망각한 채 역사의 독점과 사유화를 통한 기억의 통제와 조작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양국의 시민사회가 역사교육에 대한 권력의 부당한 개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여가면서, 한국 사회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운동은 이제 우리 사회의 민주적 가치와 인권을 지켜내기 위한 범국민적 불복종 운동으로 확대되고 있다. 양국의 시민사회와 교육계, 학계가 정부와 권력의 역사에 대한 부당한 개입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한 시도는 실패할 것이 뻔하지만 한 번쯤 그 현상을 역사 인식 측면에서 성찰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마 필드의 저서 는 평범한 세 주변 인물의 이야기를 빌려 전통과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그로 인해 그들이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일본 사회의 ‘벽’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벽’은 단순히 전통의 문제가 아닌 비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모순의 모습임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본 오키나와의 한 슈퍼마켓 주인 치바나 쇼오이치는 죽음이 임박한 히로히토 천황의 용태가 전국적으로 생중계되는 시기에 국민체육대회의 개회식에서 일장기를 끌어내리고 불태운 ‘불경스러운’ 사건의 주인공이다. 또 남편에 대한 추모를 기독교식으로 하려는 나카야 야스코는 남편이 자위대에 근무했다는 이유로 호국신사에서 추모를 받아야 하는 사실에 모순을 느낀다. 그녀는 이를 거부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법적 분쟁까지 불사한다. 마지막으로 나가사키 시장 모토시마 히토시는 히로히토 천황의 죽음에 즈음해 태평양전쟁에 대해 천황에게 명백한 책임이 있음을 밝히고 전쟁 당사자로서 천황이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는 요지의 발언을 한다. 히로히토 천황의 투병으로 전국적인 ‘자숙’ 기간에 터져나온 천황의 전쟁책임론은 엄연한 사실을 말한 것이었음에도, 우익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노마 필드가 그녀의 책에서 묘사한 이 세 개의 일화는 모두 히로히토(쇼와) 천황의 죽음이 임박한 1987∼89년에 일어난 일이다. 노마 필드는 개인과 역사의 문제를 제3자의 시선으로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대신, 일본인과 미국인의 혼혈이라는 자신의 특수성을 살려 일본 사회에 깊숙이 들어가 개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았다. 세 사람은 모두 일본 사회가 기꺼이 또는 불편해하면서도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관행에 용감하게 반대했다.
치바나는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강요하는 우익 세력의 국가주의적 요구에 반대해 일장기를 불태웠다. 나카야는 일견 일본의 전통신앙으로 포장돼 있지만 군국주의의 망령이 스며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법으로 개인에게 강요하는 관행에 저항했다. 또 모토시마는 집권여당인 자민당의 공천으로 시장에 취임했지만 천황이 전쟁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해 일본 사회의 역사적 망각증에 경종을 울렸다. 그러나 자신의 소신과 양심에 따른 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보답은 우익 세력의 빈번한 공격이었고, 그들은 목숨을 빼앗길 뻔한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 일본에 체류 중이던 노마 필드는 평범한 개인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과거사, 역사의 민낯과 대면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담담히 그려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과거사에 대해서 개인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할까?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의 역사에 대해서 책임의식을 공유할 때 개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정부와 여당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할 때,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가 발생했을 때, 부재했던 국가를 떠올리는 것은 그저 내 혼이 비정상이기 때문에 일어난 불경한 일일까?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공동체의 역사에 대한 개인의 책임의식과 화답이야말로 우리가 역사와 대면할 때 계속 곱씹어보아야 할 첫 번째 덕목이 아니겠는가.
정용욱 서울대 교수(국사학)·한국역사연구회장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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