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거짓이 탑처럼 쌓이고 모욕이 강처럼 흘러

2005년 12월5일~2015년 10월 초고압 송전탑 69개 이고 살게 된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들의 10년 싸움… 주민·활동가 69명 사법처리, 경찰 83명 표창·특진
등록 2015-10-29 17:01 수정 2020-05-03 04:28

2015년 10월, 경남 밀양시 5개 면에 걸쳐 765kV 초고압 송전탑 69개가 꽂혀 있다. 그 아래 사람이 산다. 지난해 1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서는 송전탑 주변에 사는 주민 317명의 건강을 조사했다. 주민 87.3%가 심한 우울감, 81.9%가 심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밀양에서는 함부로 할 수 없다. 거짓, 협잡, 은폐, 폭력에 송두리째 내몰린 주민들의 10년을 추리고 뽑아 기록한다.

[%%IMAGE7%%]1. 고통의 시작

2000년 1월 정부는 제5차 장기 전력수급계획을 확정했다. 밀양과 초고압 송전탑이 정부 문서에 처음 등장했다. 같은 해 8월 765㎸ 초고압 송변전 설비계획이 만들어졌다. 이듬해 5월 한국전력공사는 초고압 송전선이 지나가는 ‘경과지’ 선정과 환경영향평가에 들어갔다. 2002년 9월에는 예정 경과지가 선정됐다. 2003년부터 실제 측량작업도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주민들은 머리 위로 괴물 같은 송전탑이 열차처럼 늘어져, 산이며 논에 때려 박힐 줄은 전혀 몰랐다. 정부·한전은 정확한 사업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공사를 하기 전 토지 측량(2004~2005년) 등을 위해 낯선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는 주민 증언이 있다. 2005년 2월 송전선로 경과지 설계와 토지 측량이 끝났다.


<i>송전탑 주변에 사는 주민 317명의 건강을 조사했다. 87.3%가 심한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i>

2. 첫 시위

2005년 5월 ‘신고리~북경남 765㎸ 송전선로 건설사업’ 환경영향평가서가 세상에 나왔다. 6월5일까지 공람이 이뤄지면서 사업의 전체 뼈대가 알려졌다. 같은 해 8월 한전은 주민설명회를 열었다. 하지만 주민설명회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당시 주민설명회에 참석한 인원은 126명이다. 이는 5개 면의 당시 인구 2만1069명 가운데 0.6%였다. 이계삼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반대대책위) 사무국장은 “이러한 한전의 비밀주의와 주민 배제가 이 싸움을 10년의 장기적인 투쟁으로 만드는 데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그해 12월5일 오전 상동면 여수마을 주민들이 버스를 타고 한전 밀양지사로 향했다. 주민 50여 명은 미리 준비한 북·꽹과리를 두드리며 “송전탑 안 된다!”소리를 질렀다. “부산에서 이사 온 여자 두 분이 마을에 계셨는데, 그분들이 765㎸ 송전탑은 안 된다고 주민들에게 알려줬어예. 큰 송전탑 들어오면 못 산다고 하데예. 그래서 데모라도 한 번 해보자 이래 돼가지고 한전에 간 거라예.”(김영자 반대대책위 총무)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리지 않은 이날 시위가 밀양 송전탑 반대 10년 투쟁의 공식적인 출발점이다.

3. 사라진 명분

이 사업은 5175억원을 들여 울산시 울주군에서 경남 창녕군까지 90.535km에 걸쳐 초고압 송전탑 162개를 건설하는 게 뼈대였다. 밀양시 구간은 5개 면을 가로지르는 39.157km에 송전탑 69개다. 애초 정부는 이 송전선로를 수도권으로 잇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2006년 북경남-신충북 노선이 폐기됐다. 초고압 송전선로의 수도권 연결 계획이 사실상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한전은 사업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초고압 송전탑 건설의 명분이었던 전력 수요 예측도 문제였다. 정부가 예측한 현행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는 해마다 전력 수요가 2.2% 늘어나는 것으로 돼 있다. 앞으로 15년 동안 39.7%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전력 소비량은 정부 예측과 어그러진다. 2010년 10.1%로 최고점을 찍은 소비량은 매년 줄고 있다. 지난해에는 0.6% 증가에 머물렀다. 국회 예산정책처 분석에서도 2013~2014년 실제 수치가 계획치보다 1.1~2.8%포인트 낮다고 지적했다.

2012년 1월 이치우 할아버지의 분신 뒤 오열하는 유족. 연합뉴스

2012년 1월 이치우 할아버지의 분신 뒤 오열하는 유족. 연합뉴스

4. 대안도 거부

대안이 있었지만 한전은 ‘없다’고 일관했다. 초고압 송전선로에서 나오는 전자파는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지정한 발암가능물질(그룹2B)이다. 엔진 배기가스(휘발유)와 같은 항목에 묶여 있울 정도다. 재산상 손해는 물론 건강을 치명적으로 위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선로를 땅속으로 보내는 지중화를 한전에 대안으로 요구했다. 2012년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당시 김중겸 한전 사장은 “기술적으로는 (지중화가) 가능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후 한전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지중화 대안을 끝내 거부했다. 법률도 가혹했다. 한전이 사업을 강행한 최대 무기는 전원개발촉진법이다. 주무 장관의 승인만 받으면 19가지 법률의 인허가를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주민들의 토지에 대해 강제수용까지 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이 법률은 박정희 유신정권 때인 1978년 제정됐다. 2009년 이해당사자 사이에 원만한 협의가 이뤄지도록 일부 조항이 개정되긴 했지만, 밀양에선 주민 갈등을 부추기고 마을공동체를 파괴하는 데 악용됐다.

5. 첫 죽음

2012년 1월16일 74살 노인(이치우)이 제 몸에 불을 놓아 숨졌다. 분신 당일 보라마을 할아버지의 논에 젊은 용역들이 밀려들었다. 송전탑이 세워질 논바닥이었다. 이날 할아버지와 주민들은 이들에게 욕설을 듣고 폭력에 시달렸다. 용역들은 “내일 또 오겠다”는 비아냥을 던지고 떠났다. 할아버지의 수치심과 분노가 논바닥에 타올랐다. “내가 죽어야 이 문제가 해결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끝내 몸에 불을 붙였다.


<i>할아버지의 수치심과 분노가 논바닥에 타올랐다. 그는 끝내 몸에 불을 붙였다.</i>

죽음의 원인은 현실적인 모욕과 비현실적인 보상에 있었다. 그와 두 동생의 논 시세는 6억9천만원이었다. 한전 보상금은 당시 8700만원뿐이었다. 헌법은 “공공 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헌법재판소 판례는 ‘정당한 보상’의 의미를 “피수용 재산의 객관적인 재산 가치를 완전하게 보상하는” 것으로 판시한 바 있다. “정부와 한전이 동네를 파괴하고 재산을 강탈한다”는 주민들의 통탄은 이유가 명확했다.

밀양경찰서는 이치우 할아버지의 죽음을 ‘깻단 실화’로 왜곡하기도 했다. 경찰은 유가족·주민들의 항의와 증언이 이어지자 뒤늦게 ‘분신 자살’로 고쳐 발표했다.

2012년 송전탑 공사를 막으려고 산길을 오르는 노인들. 류우종 기자

2012년 송전탑 공사를 막으려고 산길을 오르는 노인들. 류우종 기자

6. 첫 연대

앞서 2011년 한전과 주민들 사이에 보상 협의가 무산됐다. 한전은 그해 11월부터 송전탑 공사를 강행했다. 곳곳에서 충돌이 벌어졌지만 밀양 투쟁은 전국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치우 할아버지의 분신은 초고압 송전선로 공사의 문제점을 전국에 알리는 불씨가 됐다.

이치우 할아버지의 분신 보름 뒤인 2012년 2월1일, 밀양시청 앞에 전국 시민사회단체와 정치권, 밀양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4개 면 주민대책위원회 등이 모였다.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고 이치우 열사 분신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이들은 정부·한전이 주민을 무시하고 강행하는 송전탑 공사를 규탄했다.

두 달 뒤인 3월17일 1차 ‘탈핵 희망버스’가 전국에서 모였다. 1200여 명이 희망버스를 타고 밀양을 찾았다. 밀양 탈핵 희망버스는 이후에도 수시로 밀양으로 모여들었다. 2013년 11월30일 희망버스에는 3천여 명이 동행하기도 했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고로 일어난 사회적 관심과 엮이면서 송전탑 투쟁이 탈핵 운동으로 지평을 넓혔다”는 게 반대대책위의 평가다.

2013년 12월 유한숙 할아버지 음독 사망 뒤 서울 한전 본사 앞에서 상경투쟁하는 모습.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2013년 12월 유한숙 할아버지 음독 사망 뒤 서울 한전 본사 앞에서 상경투쟁하는 모습. 한겨레 김봉규 선임기자

7. 또 죽음

2013년 12월2일 상동면 고정마을 유한숙(74) 할아버지가 집에서 농약을 들이켰다. 그는 나흘 뒤 12월6일 새벽 눈을 감았다. 숨지기 전 그는 가족과 대책위 활동가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아이들 공부도 시키고 결혼도 시켰다. 그런데 11월경에 한전 과장 1명과 또 다른 1명이 찾아와 (우리 집이) 송전선로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게 되었다. 150m인지 200m인지 가까이에 철탑이 들어선다는 사실을 알았다. 철탑이 들어서면 아무것도 못한다. 살아서 그것을 볼 바에야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의 장례는 322일 만인 지난해 10월22일 치러졌다. 그사이 송전탑이 다 들어섰다.

2014년 6월11일 행정대집행 당시 경남 밀양시 상동면 고답마을에서 주민들이 통곡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2014년 6월11일 행정대집행 당시 경남 밀양시 상동면 고답마을에서 주민들이 통곡하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8. 6·11 행정대집행

2014년 6월11일 경찰은 2천여 명을 동원해 새벽 4시부터 움직였다. 101·115·127·129번. 밀양을 지나는 69개 송전탑 가운데 주민들이 끝까지 막고 있던 지점이었다. 주민들은 공사 예정 터에 마련한 움막에서 버텼다. 경찰은 출입을 봉쇄했다. 변호사들조차 가로막았다. 경찰은 몸에 쇠사슬을 묶고 저항하던 할머니들의 목에 절단기를 들이대고 쇠사슬을 끊었다.

행정대집행 당일 4명이 골절상을 당하는 등 모두 18명이 병원에 실려갔다. 아비규환의 땅에서 노인들은 ‘고향의 봄’ 노래를 불렀다. “그날 강제철거된 것은 움막이 아니라 ‘사람’이었다”고 밀양인권침해감시단은 규탄했다.

2009년 7월 첫 공사에 들어간 지 5년 만에 진행된 이날 행정대집행으로 송전탑 공사를 더는 막을 수 없게 됐다. 주민·반대대책위는 ‘시즌2’를 선언하고 지속적인 투쟁을 다짐했다. 지난해 12월28일 한전은 공사가 마무리된 765㎸ 송전선로에 시험송전을 시작했다.

9. 참과 거짓

6·11 행정대집행 뒤 한전이 발표한 보도자료는 주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다수 주민들의 국가 공익사업에 대한 대승적 결단으로 합의가 이루어져 주민들과 큰 충돌 없이 움막을 철거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됐다. 특히 공사를 진행하면서 경과지 마을 일손 돕기, 지역 특산물 구입 등으로 주민들의 마음을 얻고, 주민들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국책사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힘으로써 당초 우려와 달리 현재까지 큰 마찰 없이 순조롭게 공사를 진행해왔다.”


<i>“‘그 안에 사람이 있다’며 울부짖는 소리에 아랑곳 않고, 경찰들은 움막 위로 올라 칼날을 들어 거침없이 지붕을 찢어냈다.”
-밀양인권침해감시단
</i>

밀양인권침해감시단은 한전의 주장을 반박했다. “6월11일 밀양에서 국가는 법치, 공공의 이익과 안녕이라는 온갖 교설과 가면 속에 가리고 있던 폭력성을 숨김없이 보여줬다. ‘그 안에 사람이 있다’며 울부짖는 소리에 아랑곳 않고, 경찰들은 움막 위로 올라 칼날을 들어 거침없이 지붕을 찢어냈다. 지칠 대로 지치고 아플 대로 아픈 할머니들을 상대로 “빨리 해치워버렸다”고 낄낄거리며 자축하는 경찰 간부들도 있었다. 인권이 있을 수 없는 ‘물건’이 된 순간, 현장에 있던 이들에게 경찰은 조직된 폭력집단에 불과했다.”

10. 처벌과 포상

경찰·검찰은 지금까지 주민 44명과 연대 활동가 25명 등 모두 69명을 사법 처리했다. 이들 가운데 70~80대 고령의 노인들이 14명에 이른다. 14명이 집행유예, 51명이 벌금형을 받았다. 무죄는 단 1명뿐이다. 재판에서 변호인단은 주민들의 투쟁이 부정의하다고 확신하는 법이나 정책을 두고 비폭력적 방법으로 저항하는 행위인 ‘시민 불복종’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행정대집행과 공사의 불법성을 호소하며 주민 등이 낸 헌법소원이나 행정소송은 묵묵부답이다.

임수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의 자료를 보면, 최근 2년간 집회·시위 대처로 표창을 받은 경찰관은 113명이고, 이 가운데 73명(64.6%)이 밀양 송전탑 투쟁을 진압한 경찰관이다. 10명은 특진도 했다, 10년 동안 경찰·한전에 의해 다친 밀양 주민은 100명을 훌쩍 넘는다.

[%%IMAGE6%%]



밀양 10년 투쟁 일지


2000년
1월  제5차 정부 장기 전력수급계획 확정. ‘밀양 송전탑’ 처음으로 언급
2001년
5월  한국전력공사, 신고리-북경남 765kV 송전선로 경과지 선정 및 환경영향평가 용역 착수
2005년
8월  한전, 주민설명회 개최. 밀양시 5개 면 주민 가운데 0.6%만 참가
12월5일  상동면 여수마을 주민들, 한전 밀양지사에서 첫 집회
2006년
12월  정부, 북경남변전소에서 수도권 연결계획 사실상 폐기
2007년
12월  정부, 신고리-북경남 765kV 송전선로 건설사업 실시계획 승인 고시
2008년
10월  청정 밀양 지키기 범시민대회 개최. 모두 3천여 명 참여
2009년
12월  국민권익위원회 주관 갈등조정위원회 출범
2010년
6월  보상제도 개선을 통한 갈등 해소안 합의. 제도개선위 출범
8월  한전, 합의사항 깨고 단장면 공사 강행했다 철수
2011년
4월 한전, 철탑 부지 5곳 공사 추진, 주민들과 대치
11월  한전, 5개 면에서 공사 강행. 2012년 1월까지 주민들과 충돌
2012년
1월16일  산외면 보라마을 주민 이치우(74), 분신 사망
3월  밀양 탈핵 희망버스 처음 개최, 1200명 참여
6월28일  반대 주민 100여 명, 밀양시청에서 시장 면담 요구하며 항의 농성
11월9일  주민·연대활동가들,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로 이름 변경
2013년
1월  반대 주민들, 부산 한진중공업과 평택 쌍용차 농성장 등 찾는 희망순례 시작
3월  대책위, 천주교인권위원회 주관 ‘이돈명 인권상’ 수상
4월24일  밀양 송전탑 반대 촛불문화제 100회 행사
5월20~28일  한전, 송전탑 공사 강행으로 부상자 수십 명 속출
6월  밀양 송전탑 전문가 협의체 발족
7월  765kV 송전탑이 주민 건강 위협한다는 한전 내부 보고서 공개 파문
10월1~8월  한전, 기습적인 송전탑 공사 재개, 주민들과 충돌
11월  밀양 희망버스 행사에 전국에서 3천여 명 참여
12월  상동면 주민 유한숙(74), 음독 뒤 3일 만에 사망
2014년
1월  2차 희망버스 전국 46곳에서 출발, 4천여 명 참여
2월  주민 300여 명, 불법 사업 승인 행정소송 제기
6월11일  경찰·한전, 행정대집행
6월22일  대책위, 밀양 송전탑 시즌2 선언. 계속 투쟁키로 발표
8월  6·11 행정대집행 헌법소원 제기
9월  서울에서 밀양법률기금 마련 후원 주점, 하루 만에 수익금 7천만원
10월  송전선 관련 법 헌법소원 제기
12월  밀양·청도 주민들, 3일 동안 전국 다니며 72시간 송년회 개최
12월28일  한전, 신고리-북경남 송전선로 시험 송전
2015년
3월  주민·연대활동가들, ‘탈핵 탈송전탑 원정대’ 원정 시작
5월  4차례 원정 결과 담은 책 출간
7월  송전탑 반대 촛불문화제 200회 기념 문화제 개최
9월  형사 기소된 주민·연대활동가들, 1심 선고
12월3일  밀양 송전탑 10년 투쟁 백서·사진집 발간 및 기자회견(예정)



*자료: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참고 문헌 (반대대책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2014), (김제남 의원실·2013), (김제남 의원실·2013), (밀양법률지원단·2015), (밀양인권침해감시단·2014), (엄은희·2012), (장하나 의원실·2013), (장훈교·2014)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