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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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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을 기다려 한 달을 남기고…

9월4일 심근경색으로 숨진 버마 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 대표 내툰나잉의 생애… 1994년 산업연수생으로 와 민주화운동가로 살며 11월 버마 총선거 기다려, 비통한 사람들 “민주화돼서 주한 버마대사를 했다면…”
등록 2015-09-17 17:22 수정 2020-05-03 04:28

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하지만, 감히 훼손하지 못하는 마음도 있다. 1988년 8월8일, 그날의 약속을 지키며 살아온 사내의 심장이 2015년 9월4일 멈췄다. 그의 심장이 항상 향하던 랑군까지 3742km 떨어진 서울 하늘 아래서 멈췄다. 1994년 6월23일, 버마(미얀마)를 떠나 한국에 온 지 21년이 흘렀다. 기나긴 세월, 한 번도 원칙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슬쩍 국경을 넘어 고향에 가보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끝내 랑군 공항으로 당당하게 귀향하길 원했다. 그의 이름은 버마인 내툰나잉(46)이다.

버마 민주화, 아시아 평화를 위해 생애를 바쳤던 내툰나잉의 장례는 9월11~13일 경기도 부천 석왕사에서 치러졌다. 추모위원 명단에 버마인뿐 아니라 한국 국회의원, 시민사회 활동가 등 다양한 이들이 포함됐다.

버마 민주화, 아시아 평화를 위해 생애를 바쳤던 내툰나잉의 장례는 9월11~13일 경기도 부천 석왕사에서 치러졌다. 추모위원 명단에 버마인뿐 아니라 한국 국회의원, 시민사회 활동가 등 다양한 이들이 포함됐다.

난민 인정보다 시민사회의 인정

지난 9월4일, 버마 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활동가 조샤린은 버마∼타이 국경의 매솟에 있었다. 새벽에 전화를 받았다. 내툰나잉 NLD 한국지부 대표가 숨졌단 것이다. 그렇게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가다니, 믿기지 않았다. 바로 항공권을 마련해 오니 차가운 주검이 있었다. “같이 갔다면… 같이 갔다면…” 통곡이 멈추질 않았다. “2015년에 함께 버마로 가서 총선거 운동을 하자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NLD 한국지부 모두 가기 전에는 못 간단 거예요. 그래서 혼자 갔던 건데….” 조샤린이 며칠을 울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몇 해 전, 어머니 부고를 받고도 내툰나잉은 버마∼타이 국경을 넘지 않았다. 왜 망설임이 없었겠는가. 그렇게 견딘 21년의 기다림을 끝낼 날이 오고 있었다.

2015년 11월8일, 버마 총선거 날이다. 그는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NLD의 압승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백프로! 백프로! 이길 거예요. 이길 거니까… NLD 정권이 들어서면 저도 백프로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2014년 중앙대 문화연구학과 석사과정을 하는 이혜영씨의 생애사 구술 인터뷰에선 그의 설렘이 생생하다. 이씨가 “행복하냐?”고 묻자 그는 “정권 교체도 할 수 있고, 우리 아버지나 다른 친척들, 친구들, 선생님들 만날 생각만 하면 행복하죠”라고 답했다. 그렇게 21년을 기다리던 날이 2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 지인들은 더욱 비통하고 애통하다.

내툰나잉은 1994년 6월23일,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너는 버마에 있으면 우리가 머리 아프다.” 그가 여권을 신청하면서 들었던 말이다. 1986년 버마 랑군대학 심리학과에 입학한 내툰나잉은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8888혁명’으로 불리는 1988년 8월8일 전국적 시위에 가담한 이후 3개월 동안 투옥됐다. 버마 군사정권이 저지른 학살에 저항한 88세대인 것이다. 그는 등을 보면서 ‘87년 6월항쟁’ ‘5·18 광주민중투쟁’에 관심을 가졌다. 마침 누나의 친구가 한국으로 갈 산업연수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한 나라에 가기로 결심했다.

‘가난한 자급’을 자긍심으로

2000년 5월19일, 난민 신청을 한 날이다. 한국어 한마디도 가르치지 않고 일만 시켰던 공장에서 억울한 일도 당했다. 산업연수생제도는 2년이 지나면 체류를 연장해주지 않아 내툰나잉은 미등록 신분이 됐다. 버마에서 불법이었던 사람, 한국에서도 불법이 됐다. 다행히 버마 민주화운동을 함께할 동지들을 한국에서 만났지만 불법이 문제였다. 당시의 불안을 녹취록은 이렇게 전한다. “강제로 추방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때 어떻게 했느냐면, 가방에 옷을 서너 벌 정도 넣고 책도 다섯 권 정도 넣어요. 만약에 체포당하면 우리 버마에 보내지 말라고, 한국 감옥 생활 하려고 준비하는 거예요.”

버마 군사정권이 해외 조직을 불법으로 규정해 돌아가면 7년형에 처해질 위험이 있었다. 더구나 1999년 NLD 활동가 조샤린이 불법체류로 체포됐다가 시민사회의 항의로 풀려나는 일이 생겼다. 2000년 신청한 난민 자격을 2003년에 얻었다. 그러나 난민 인정에 연연하지 않았던 이유를 그는 이렇게 생애사 구술에서 말했다. “난민 인정은 한국 정부에서 해주는 거잖아요? 그것보다 우리는 NLD가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서 열심히 한다는 것을 한국 시민사회가 인정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i>“강제로 추방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때 어떻게 했느냐면, 가방에 옷을 서너 벌 정도 넣고 책도 다섯 권 정도 넣어요. 만약에 체포당하면 우리 버마에 보내지 말라고, 한국 감옥 생활 하려고 준비하는 거예요.”
- 내툰나잉, 생애사 구술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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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법률은 그를 불법체류자로, 난민으로 ‘분류’했지만, 그는 언제나 버마 민주화운동가였다. NLD 한국지부는 버마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스님들이 앞장선 사프란 혁명이 벌어진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매주 화요일 서울 종각역 인근에서 ‘프리버마’ 캠페인도 했다. “버마인들을 만나면 우리가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고 돌이킨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의 추모사는 이렇다. “지도자였다. 부드러운 힘을 보여주었다. 몸과 마음은 바빴지만,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조국은 가난했지만, 비굴하지 않았다. 자선과 온정은 거부했지만, 연대는 환영했다. 훌륭한 지도자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의 죽음이 너무 서럽다.” 그는 ‘가난한 자급’을 자긍심으로 삼았다. NLD 한국지부 회원들은 매달 10만원 이상의 회비를 냈다.

2007년 봄은 따뜻했다. 그는 성공회대 아시아시민사회 NGO 대학원에 입학했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아시아 시민사회의 변화를 이해할 기회를 얻었다. 박은홍 성공회대 아시아비정부기구학 교수는 “내툰나잉 대표는 제게 버마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지적, 실천적 자극을 준 친구이자 스승이었다”고 애도했다. 버마와 한국을 잇는 가교 역할도 했다. 2009년 당시 투옥 중이던 민꼬 나잉이 광주 인권상을 받고, 2013년 아웅산 수치 NLD 의장이 한국을 방문한 것도 그가 없었으면 어려웠을 일이다. 박 교수는 “진짜 민간 외교를 했다”며 “민주화돼서 주한 버마대사를 했다면…”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나현필 국제민주연대 활동가도 “그가 한국에서 경험한 민주화 이후의 불평등 문제 등은 귀중한 자산”이라며 “서구에서 활동한 운동가들과 다른 관점에서 버마 사회에 기여할 것으로 믿었다”고 말했다.

“88세대의 의무는 끝나지 않았어요”

이주민의 정체성은 세월에 풍화되기 마련이고, 시간은 인간의 다짐을 녹슬게 한다. 적잖은 해외의 88세대가 그렇게 변했다. 생애사 구술에서 이혜영씨가 “배울 만큼 배웠고, 다른 삶을 살 수 있는데 굳이 민주화운동가로 사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음… 이유가 좀 많을 것 같은데, 제일 큰 생각이 우리 세대의 의무는 끝나지 않았어요. 88세대 있잖아요? 우리가 시작한 민주투쟁, 끝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그는 영원한 청춘을 살았다. 조샤린 NLD 활동가는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80살이 넘은 (내툰나잉의) 아버지가 누나한테 ‘아들과 관련된 것 하나라도 가져오면 나는 죽는다’고 하셨대요. 유골을 제가 보관할 거예요. 버마에 돌아가면 가장 좋은 자리에 묘지를 만들 거예요. 비석도 세우고요.”

그의 누나가 입국해 치른 사회장은 버마 공동체와 한국 시민사회가 함께했다. “한국에서 20년 정도 그렇게 열심히 살았잖아요. 내년에 버마에 들어가겠다고 하니까 좀 기대도 많고 새 삶을 시작하겠다고 생각이 드는 거예요.” 생애사 구술 녹취록에 그렇게 쓰여 있다. 오는 11월8일, 부디 그가 환하게 웃기를.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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