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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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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의 겨울은 왜 빨리 오는가

등록 2001-11-28 00:00 수정 2020-05-02 04:22

이주노동자에서 탄광노동자까지, 떠도는 자들의 종착역 안산의 겉과 속

안산의 겨울은 서둘러 온다. 달력보다 한발 앞서 두터운 겨울 옷차림이 드문드문 거리를 흘러다닌다. 겨울 옷차림의 주인공들은 대개 피부색도 다르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온 그들의 이름은 ‘이주노동자’다. 빠른 건 계절만이 아니다. 안산의 하루는 아주 빨리 열린다. 사람들은 새벽 어스름을 뚫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시간대별로 주인공이 바뀌는 아침

11월22일 오전 5시30분, 초겨울 안개가 자욱한 안산역 광장. 뒤춤에 목장갑을 낀 초로의 노동자가 지하도를 빠져나와 왼쪽으로 꺾어진다. 한국인들만 모이는 새벽 인력시장으로 가는 날품팔이 노동자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목도리를 단단히 동여맨 아주머니 두어명이 묵묵히 안산역 뒤쪽의 유통상가로 발걸음을 옮긴다. 두터운 파카를 걸친 아저씨들도 뒤를 잇는다. 인력파견업체들이 밀집한 유통상가로 일거리를 찾아가는 중국동포들이 대부분이다. 말이 통하는 중국동포들은 공장일보다 하루 일당이 조금 높은 건설현장 일용직을 선호한다.

서류철을 든 파견업체 직원이 상가 입구에서 이들을 부른다.

“아줌마, 현장 가요. 현장!”

“일당이 얼마래요?”

안산의 아침 거리는 시간대별로 주인공이 바뀐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올수록 ‘노란’ 얼굴들의 발걸음은 점점 뜸해진다. 새벽인력시장이 끝나가는 탓이다. 먼동이 터오는 아침 7시쯤이면 안산역 건너편 버스정류장이 붐빈다. 인근의 반월공단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다. 서둘러 버스에 올라타는 이들의 얼굴은 검은색이다. 대개 아침 8시면 조업을 시작하는 공단으로 출근하는 이주노동자들이다. 뒤이어 정장 차림의 사무직들이 빈 버스정류장을 메운다. 이들이 빠져나가면 안산의 ‘노동의 새벽’은 끝난다.

안산은 ‘흘러들어온 자들의 도시’다. 수도권에서 밀려들어온 뜨내기노동자에 고국을 떠난 이주노동자까지 가세해 이 도시의 상징적인 군상을 이룬다. 이렇게 흘러들어온 자들로 인해 80년대 이후 이곳의 높은 인구증가율은 좀체 꺾이지 않고 있다. 86년 시로 승격할 당시 12만명이던 인구는 현재 58만명으로, 해마다 13.6%의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 수도권에서 밀려나 있으면서도 수도권의 어느 도시 못지않게 빠른 증가 속도다.

안산은 뜨내기노동자와 이주노동자들이 몰려들 조건을 고르게 갖췄다. 그들에겐 반월공단이 가장 든든한 언덕이다. 2000년 말을 기준으로, 3900여개 업체에 11만4천여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는 국내 최대의 공업단지다. 안산공단의 75%는 조립식 금속기계장비, 염색, 화학 등 3D업종으로 분류된다. 한창 진행중인 고잔 신도시 개발 등으로 날품팔이 일거리도 많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서울 외곽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탓에 집값도 싸다. 그래서 안산 사람들은 “안 산다 안 산다 하면서 사는 동네가 안산”이라면서도 “없는 사람이 벌어 먹고살기에는 이만한 동네도 없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안산의 산업재해율은 1.05%로 경기도내에서 가장 높고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151만원으로 경기도 평균 160만원에 못미친다. 주택보급률도 65%로 경기도 도시 중 최하위다(99년말 현재). 낮은 주택보급률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면서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흔히 ‘불법체류자’라고 불리는 미등록노동자들을 포함하면 안산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는 3만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반월과 시화공단 노동자의 12%를 차지하는 수준으로, 최대 밀집지구다. 이주노동자들이 집중 거주하는 안산시 원곡동 거리에서는 한국인이 ‘소수자’가 되는 역전현상이 드물지 않다. 11월17일 토요일 저녁, 벌써부터 두터운 파카에 목도리까지 걸친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이 원곡동의 ‘국경없는 거리’를 메운다.

주민들이 “불법체류단속 중단” 서명도

붉은 글씨의 중국식품점 간판도 자주 눈에 들어온다. 노래방 간판에는 ‘인도네시아 노래, 필리핀 노래’라고 적힌 영문 글씨도 보인다. 천천히 거리를 거슬러올라가자 서너명씩 무리를 지은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이 연이어 스쳐지나간다. 그뒤로 노란 얼굴들이 밀려온다. 언뜻 생김새가 한국사람 같다. 그러나 휴대폰을 드는 순간 중국어가 튀어나온다. 원곡본동 사무소 옆 공중전화 부스에서는 한국어가 ‘소수 언어’다. 고국의 집으로 전화를 거는 이주노동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공중전화 부스 앞 슈퍼에도 외국인 손님이 가득하다.

“고마워요. 잘 가. 굿바이.”

밀어닥치는 손님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슈퍼 아주머니는 “여기는 외국인 손님이 80%”라고 전한다. 골목의 복덕방 아저씨도 “이제 이 동네에서 외국인들은 필요악이지 뭐”라고 거든다. 이주노동의 역사가 10년 가까운 안산에는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이 부대끼며 만들어내는 풍경이 있다.

얼마 전 원곡동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인도네시아 노동자를 파출소에서 빼내오는 ‘사건’이 있었다. 동네에 살던 인도네시아 노동자 리안은 술을 마시고 고성방가를 해 파출소에 잡혀갔다. 그가 잡혀갔다가는 소식을 전해 들은 동네 어른들이 파출소로 찾아갔다. 어른들은 “착한 사람인데 술을 먹어 실수를 한 것”이라고 사정을 해 리안은 훈방됐다. 하마터면 강제출국당할 위기를 넘긴 셈이다. 지난 6월 불법체류단속기간에는 지역 주민들이 “단속을 중단하라”는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주말이면 전국의 이주노동자들이 모인다

물론 다툼도 빠지지 않는다. 11월11일 새벽 3시, 안산경찰서에는 눈이 시퍼렇게 멍들고, 머리가 깨진 청년이 들어왔다. 한국 청년들과 시비를 벌인 중국동포였다. 계속 씩씩거리는 동포 청년을 힐끔거리며 한국 청년들이 “나가면 보자…”고 나지막이 위협한다. 안산경찰서쪽은 “주말이면 이런 사건이 심심찮게 생긴다”고 전한다. 안산의 이주노동자와 한국인들은 서로 부대끼고 어울리며 하나의 ‘커뮤니티’를 형성해가고 있다.

주말이면 안산은 이주노동자의 메카로 변모한다. 안산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이주노동자들이 모여드는 것이다. 17일 저녁 9시, 원곡동 뒷골목의 인도네시아 식당에는 여기저기서 몰려든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이 테이블을 메우고 있었다.

“의정부에서 왔어요. 세 시간 걸렸어요.”

“인천에서 염색공장 다녀요.”

스물일곱 동갑인 예과, 리안도, 토니는 인도네시아 음식을 먹으며 서툰 한국말로 자신을 소개했다. 이들은 “한달에 한두번은 안산에 온다. 친구들도 많고, 인도네시아 음식도 먹을 수 있어서 좋다”며 웃는다. 원곡동에는 인도네시아 식당 두곳 외에도 우즈베키스탄 식당, 파키스탄 식당, 방글라데시 식당 등이 속속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친구들을 만나서 주말을 즐기고, 일자리 정보를 나누기 위해 이주노동자 최대 밀집지구인 안산으로 모여든다. 원곡동 파출소장이 “가끔 사고를 쳐서 들어오는 외국인 중에는 서울, 인천은 물론이고 대구, 광주에서 온 사람까지 있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다.

조선족과 한족(漢族)을 합친 중국인들은 안산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의 절반을 차지한다. 원곡동 새마을금고를 돌아나오자 한집 건너 중국어 간판이다. 중국 상점 밀집지구인 이 골목에는 중국식품점, 이불가게는 물론 중국식 개고깃집까지 들어서 있다. 원곡동 일대에만 중국 상점이 40개가 넘는다. 지난해에는 중국동포 상인들이 모여 ‘동포 상조회’를 따로 꾸렸다.

다방에서 우연히 만난 중국동포 아가씨는 “원곡동이 아니라 중곡동”이라고 농담을 건냈다. 중국 식당가를 50여m 올라가자 ‘桃華被店’(도화피점)이라고 적힌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주인 선충혁씨가 열심히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다. 선씨는 “중국동포들 사이에서는 안산이 서울 못지않게 유명하다”며 “동포들이 공항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 안산”이라고 전한다. 떠돌이 유랑신세는 외국인노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철새도 아닌데/ 뜬구름도 아닌데/ 일찍이 제 먹을 것 찾아/ 노오란 고향길 눈물 적시며/ 서울로 서울로 올라왔네’(박노해 <노동의 새벽> 중 ‘떠다니냐’)

70∼80년대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제 먹을 것 찾아’ 시골 고향을 떠나 구로공단으로 향했던 상당수의 노동자들도 안산에 와 있다. 80년대 중후반부터 수도권 정비계획에 따라 구로를 비롯한 수도권의 공장들이 반월공단으로 이주하면서 따라온 것이다. 90년대 초까지 수도권에서 이전해온 공장들이 반월공단의 90%를 넘었다. 공장 이전이 집중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 안산의 인구증가율은 평균 20%를 넘어 매우 높았다.

고향 떠나 구로공단을 거쳐…

반월공단 초입에 위치한 대열보일러 노동조합의 늙은 노동자들은 이주의 역사를 상징한다. 노조사무실에 가장 먼저 ‘서노협 88년 체육대회’라고 적힌 빛바랜 판화가 눈에 들어온다. 서울 구로구 독산동에 위치해 있던 대열보일러 노조는 89년 반월공단으로 옮겨왔다. 대열보일러 노동조합 박태순 위원장은 “노조를 만들 때만 해도 팔팔하던 조합원들이 어느새 정년을 앞둔 늙은 노동자들이 됐다”며 감회에 젖는다.

그나마 ‘정규직’ 일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열보일러 조합원들은 나은 편이다. 정규직에서 밀려나 하루벌이로 생계를 유지하는 떠돌이들도 적지 않다. 안산지역건설일용노조에는 중동에서 일하던 김씨, 탄광에서 석탄 캐던 이씨, 반월공단에서 정리해고당한 박씨. 정규직 일자리에서 밀려난 ‘김·이·박’들이 숱하게 많다.

안산지역건설노조는 2700명의 조합원을 자랑하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지역건설노조다. 안산의 건설일용노동자는 3만명에 이른다. 인력시장 또한 서울의 가리봉, 경기도 성남의 복전동 등과 더불어 수도권에서 가장 크다. 안산지역건설노조 박정수 사무국장은 구로에서 흘러흘러 안산으로 스며든 경우다. 충북 영동이 고향인 박 사무국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상경했다.

구로의 한 공장에서 일하던 박 사무국장은 86년 노조를 만들려다가 해고당한다. 상경한 지 3년 만이었다. 몇 차례 복직시도를 해봤지만 허사였다. 그뒤 생선가게를 운영했다. 그나마 실패였다. 결국 생계를 위해 날품팔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목수일을 하던 박 사무국장은 5년 전 일거리를 찾아 안산으로 스며들었다. 구로에서만 10년 넘게 살았다는 박 사무국장은 “옛 구로공단은 산업역군이라고 치켜세워졌고, 희망의 파랑새라도 있었다”면서 “오늘 안산에는 찌든 절망만이 있을 뿐”이라고 탄식한다.

안산의 날품팔이 인생은 꼭 노동자 출신만이 아니다. 이성훈(54)씨는 한때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사람이었다. 11월17일 오후 4시. 그가 사는 쪽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막걸리 냄새가 훅 끼쳐온다. 그는 차가운 방바닥에 검은 가죽점퍼를 껴입고 누워 있었다. 홑이불 옆에는 스무병이 넘는 막걸리 통이 널브러져 있다. 추석이 지난 뒤로 줄곧 막걸리만 마신 것이다. 이씨는 “천석꾼 아들인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라고 탄식했다.

태백과 안산의 질긴 인연

경남 사천이 고향인 이씨는 대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왔다. 70년대 초였다. 고향 땅을 팔아 마련한 밑천으로 서울에 제관회사를 세웠다. 한때 잘 나가던 회사는 80년대 말 부도가 났다. 회사가 망하자 아내는 그를 떠났다. 그뒤로 그는 날품팔이를 전전하며 4년 전 안산으로 흘러들었다. 일거리를 찾아서였다.

이씨는 초점 잃은 눈빛으로 “어제 꿈에서 경비를 했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같이 간 안산지역건설노조 고태환 조직부장이 “겨울 어떻게 나시려고 그래요?”라고 채근하자 눈을 끔뻑이며 “벌써 겨울이야?”라고 되묻는다. 이씨는 올 들어 서너 차례 막걸리만 마시다가 병원에 실려간 적이 있다. 고태환 조직부장은 “지난해 겨울에만 조합원 3명이 냉방에서 쓸쓸히 혼자 죽어갔다”고 전했다.

시골에서 서울의 변두리로, 서울에서 다시 안양, 부천 등 수도권 외곽도시를 거쳐 안산까지 밀려온 노동자 이동경로에는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가 녹아 있다. 이들말고도 안산을 설명하는 집단으로는 태백 출신 광부들이 도드라진다. 안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아침 7시 첫차부터 오후 5시50분 막차까지, 하루 다섯번 태백행 시외버스가 출발한다. 이 노선은 반월공단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시기와 탄광이 폐광된 시기가 맞물려 강원도의 탄광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하면서 생겼다. 70∼80년대 인생의 막장으로 불렸던 태백과 안산을 이어주는 질긴 인연의 상징인 셈이다.

11월19일 오후 1시, 안산중앙병원 201호실을 열고 들어가자 마른 기침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진폐환자 서연수(66)씨가 코에 호스를 낀 채 밭은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서씨 가족은 석탄합리화정책에 따라 탄광이 폐광되면서 안산으로 이사왔다. 강원도 고한에서 먼저 올라온 삼촌뻘되는 고향 아저씨가 유일한 끈이었다. 물론 안산에 공단이 있어서 일자리를 구하기 쉽고, 전셋값이 싸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2천만원의 전 재산으로 방 두칸짜리 전셋집을 얻었다. 몇달을 헤맨 끝에 어렵사리 공장 경비 일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서씨의 공장 경비일은 오래 가지 못했다. 94년 진폐증이 발병하면서 노동력을 잃은 것이다. 그뒤로 생계는 서씨의 부인이 파출부 일을 나가면서 근근이 이어왔다. 병상 옆에서 죽을 끓이고 있던 부인은 “강원도 골짜기에서 천지를 모르고 살다가 안산 와서 고생 많이 했지”라며 한숨을 내뱉었다.

과연 ‘약속의 땅’이 될 것인지…

넉넉지 못한 형편 탓에 가난은 자식세대에도 대물림됐다. 서씨의 첫째아들은 자동차 정비공장을 전전하고 있고, 둘째아들은 한해 넘게 실직상태다. 마침 병문안 와 있던 서씨의 둘째아들은 “안산으로 이사온 친구들이 많다”며 “얼마 전 안산에서 동창회를 했는데 동창생 60명 중 20명이 참석했을 정도”라고 전한다. 서씨도 가쁜숨을 내쉬며 “이 병원에도 태백, 사북, 고한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고 거든다. 진폐환자들이 입원한 세개의 병실마다 어김없이 태백 출신들이 입원해 있다. 대부분이 안산에 거주하는 강원도 광부들이다.

이주노동자에서 탄광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안산은 떠도는 노동자들이 도착한 현재의 종착역이다. 잊혀진 구로와 지워진 태백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안산의 오늘에 녹아 있다. 스산한 풍경의 초겨울 안산을 빠져나오며 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만난 중국동포의 푸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태를 묻은 땅에 뼈도 묻어야 행복하다고 했는데….” 안산이 그의 소박한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는 약속의 땅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안산마저도 언젠가는 떠도는 도시가 될지 모른다. 오래지 않던 시절, 구로와 태백이 그랬듯이.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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