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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이리 멀리 떨어져 있는 걸까

2부 정치. ‘유민 아빠’ 김영오씨 그리고 세월호의 정치화 1년… 피로감 호소하는 시민들과 일베 유저, 정부 그리고 10대 청소년의 속내를 들여다보다
등록 2015-04-22 14:08 수정 2020-05-03 04:28
지난해 46일간 단식했던 ‘유민 아빠’ 김영오씨는 세월호 투사인가, 정치적 선동꾼인가. 세월호 참사 1년은 그를 이 두 가지 구분으로 바라보도록 몰아간 시간이었다. 평범함에도 미치지 못한 삶을 살아왔다는 그는 딸 유민이가 참사 8일 만에 ‘젖은 6만원’(수학여행 용돈)을 품고 물 밖으로 나온 뒤 전혀 다른 삶 속으로 들어갔다. 정부의 외면, 언론의 편파 보도, 보수단체의 공격을 받으며 투사가 되기도, 선동꾼이란 음해를 받기도 했다.
‘세월호의 정치화’가 나쁜 말은 아니다. 정치권이 공론의 장에서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구실을 제대로 하는 것은 정치의 책무다. 하지만 세월호 이슈를 권력 투쟁, 진영 갈등으로 활용하는 의미의 ‘세월호의 정치화’는 사안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 한복판에서 김영오씨는 1년을 보냈다.
은 참사 1주기(4월16일)를 앞두고 나흘에 걸쳐 그와 네 차례 만났다. 여기에 더해 세월호 참사에 피로감을 느낀다는 3명을 개별 인터뷰해 이들과 유족의 간극을 살폈다. 유가족을 ‘시체팔이’란 언어로 공격한 극우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유저들의 심리, 정부가 세월호 참사를 사고 수준으로 축소시킨 방식도 분석했다. 10대들에게 비친 참사 1년의 모습도 들여다봤다.
취재 송호진·이문영·황예랑 기자, 편집 이정연 기자

저녁 8시부터 밤샘 야근에 들어갔다. 이곳 자동차 부품업체(충남 아산)는 주야간 2교대로 돌아간다. 고등학교 중퇴 이후 자장면 배달, 막노동, 여러 공장을 떠돌다 다다른 정규직 자리다. 2013년 7월, 생애 첫 정규직이 되자마자 딸 유민이에게 기쁘게 연락한 건 월급 160만~180만원을 받던 비정규직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민아, 회사에서 이제 학자금도 준다니 마음 놓고 대학 가라.” 유민이도 좋아했다. 가정 형편을 아는 유민이는 “아빠가 뼈를 팔아서라도 대학을 보내겠다”고 해도 “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그렇게 속 깊은 말을 할수록 마음을 아프게 하던 보물이었다.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지난 4월1일, 서울 광화문광장을 찾은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3월30일부터 이 광장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지난 4월1일, 서울 광화문광장을 찾은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3월30일부터 이 광장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지옥 같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듯한 그날

야근을 마친 다음날 오전 9시가 넘은 무렵, 전처로부터 전화가 왔다. “제주도 수학여행 가는 배에 유민이가 탔는데 사고가 났다”는 이상한 얘기. 용돈을 줄까봐 유민이는 수학여행을 간다는 것조차 아빠에게 말하지 않았다. 돈을 그간 아껴 모았던 건지 유민이가 나중에 ‘젖은 6만원’을 몸에 품고 물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제 울음을 제어하지 못했다. 방송 뉴스는 ‘전원 구조’란 글씨로 그를 안도시키고 있었다. 경기도 안산 단원고에서 학부모를 태우고 사고 현장인 전남 진도 팽목항까지 버스가 간다 하니, 그는 전처에게 “유민이 잘 데리고 와서 따뜻한 밥 한 끼 같이 먹자”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야근 준비를 위해 잠을 청하다 사고 소식이 꺼림칙해 뒤척이던 그는 전혀 이상한 쪽으로 뒤바뀐 뉴스에 몸을 일으켰다. 2014년 4월16일, ‘유민 아빠’ 김영오(45)씨가 딸을 잃은 유가족을 넘어 이전과 전혀 다른 삶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딸을 삼킨 현장에선 정부의 기능이 사실상 멈춰 있었다고 그는 지금도 생각한다. “뉴스는 a인데 b로 방송하고, 수많은 사복경찰이 깔리는 것을 보고”, 그는 “아, 우리가 고립되는구나”란 것도 직감했다.

“위에서 지시가 안 떨어져서 우왕좌왕하는 거예요. 구조 자체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해경청장이나 국무총리도 머뭇거리고. 국무총리는 유가족한테 ‘나도 힘이 없다’고 했어요. 빨리 구조해야 하는데, 골든타임도 놓치고.”

4월18일이 돼서야 배에 공기를 주입했다. 그러나 그날 배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딸이 살 수 있다는 기대의 빛도 스러졌다. “진짜 그때처럼 통곡한 적이 없어요. 더 이상 유민이는 못 살아온다고, 살 수가 없겠다고.”

유민이는 참사 8일 만에 떠올랐다. 바닷속에서 눈가는 까매졌으나, 오른쪽 가운뎃손가락에 점이 있는, 목에 건 학생증에 유민이란 이름이 박힌, 그의 딸이었다.

“유민이가 살아 있는 줄 알았어요. 가만히 잠잔다고 생각했어요. 설날에 봤을 땐 통통하게 살이 쪄서 좋아했는데, 핼쑥하게 말랐더라고요. 주무르면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 팔 주무르고 다리 주무르고. 계속 울면서 주무르기만 했어요. 얘가 진짜 죽었나, 아니면 살아나올까, 죽은 척하는 걸까? 조금 있으면 눈을 뜨겠지….”

“대통령에게 매달리니 식상해진 것”

A(20대): “세월호 피로도가 심해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아요. 정부에서 뭘 내놓으면 반대하니까 불통처럼 비치고요. 안전 예방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데 사고 원인만 물고 늘어지고 정치적으로 끌고 가니까요. 일부 강성 유가족이 그렇게 이끄는 것 같아요. 김영오씨가 유족처럼 보이지 않는 측면도 있어요.”
B(30대): “점점 위로의 본질을 넘어 대립하고 헐뜯는 과정이 관심을 멀어지게 하고 있어요. 재난을 책임지는 장관들이 있으니, 대통령에게 몰아서 (비판)하는 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한두 달 정도는 그럴 수 있는데 이제 이성적으로 판단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부가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하는데, 싫든 좋든 정부를 흔들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C(50대): “무조건 대통령한테 매달리고, 자꾸 특별보상을 더 받기 위해 그러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에 세월호 사고가 식상해진 거죠. 해상교통의 피해자가 피해를 봤다고 대통령을 바꾸자는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 거죠. 서민층에선 ‘나도 죽겠는데 해상사고로 팔자 고치려는 거 아닌가’란 생각 때문에 유가족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요.”

1년 전 딸을 주무르며 ‘죽음의 잠’에서 깨우려던 유민 아빠의 슬픔은 1년 뒤 세월호 참사에 피로감을 느낀다는 이런 시선과 부딪히고 있다. 이 만난 이들 3명은 김영오씨로 대표되는 일부 유가족에게 대통령을 몰아세우는 강성 이미지를 투사하며 세월호 참사를 밀쳐내고 있다. 이들은 참사 1주기를 즈음해 왜 유가족들이 다시 거리에 나앉아, 뭘 요구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들의 판단 속엔 일부 잘못된 정보와 오해가 섞여 있기도 했다.

‘세월호의 정치화’를 최전선에서 겪은 김영오씨는 3월30일부터 서울 광화문광장 바닥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세월호 특별법으로 설치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인원과 권한을 축소하는 정부 시행령을 대통령이 직접 폐기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김씨와 함께 바닥에 앉았다. ‘일부 강성 유가족들이 주도하는 저항’이란 평가부터 물었다. “페이스북에 글을 쓰면 정치적으로 선동하지 말라는 댓글이 지금도 올라와요. 가족협의회에서 유가족 모두의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지, 어떤 한 사람, 몇몇 사람 의견으로 움직이지 않아요.”

“대통령이 그날 컨트롤타워 자체를 무능하게 했다면 사과하든지 본인이 알아서 하는 거지, 우리가 끌어내릴 수도 없잖아요. 그날 (윗선의) 명령이 없어 다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다는 거예요.”- 유민아빠 김영오씨
“우리가 끌어내릴 수도 없잖아요”
세월호 유가족들이 지난 4월2일 세월호 선체 인양, 세월호 특위를 무력화하는 정부의 시행령 폐기를 촉구하며 삭발식을 한 뒤 구호를 외치고 있다. 맨 아래 오른쪽 두 번째가 김영오씨.

세월호 유가족들이 지난 4월2일 세월호 선체 인양, 세월호 특위를 무력화하는 정부의 시행령 폐기를 촉구하며 삭발식을 한 뒤 구호를 외치고 있다. 맨 아래 오른쪽 두 번째가 김영오씨.

그는 대통령을 끌어내리려는 것이 아니라고 얘기했다.

“대통령이 그날 컨트롤타워 자체를 무능하게 했다면 사과하든지 본인이 알아서 하는 거지, 우리가 끌어내릴 수도 없잖아요. 그날 (윗선의) 명령이 없어 다 죽었는데,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다는 거예요. 우린 (죽은 아이들의) 가족이잖아요. 진상 규명의 의지를 밝혀달라는 거죠. 세월호 특위가 독립적으로 출범할 수 있도록 보장해달라는 겁니다. (문제가 된) 시행령이 진상 규명을 제대로 못하도록 만들었잖아요. 이건 대통령이 폐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얘기하는 거예요.”

유가족이 진상 규명 요구만 붙잡고 늘어지거나, 보상금을 더 받으려고 떼쓰는 것처럼 비치는 것도 대표적 오해라고 했다.

“대통령도 재발 방지, 관피아 척결을 얘기했는데, 진상 규명을 해야 분명히 책임질 부분이 나옵니다. 지금 해경 123정장, 선장 등을 처벌했다는데, 이들은 책임자가 아닙니다. 또 특별법으로 설치된 특위 안에는 진상규명소위, 안전소위, 지원소위 등 3개 소위가 있어요. 특별법이 진상 규명만 밝히는 법인 줄 아는데, 안전소위가 있다는 걸 모르는 분이 많아요. 그런데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시행령은 (특위에서 안전 대책을 만드는 범위를) 선박과 해상으로 축소했어요. 예산을 아낀다고 조사관도 줄였습니다. 이러면 안전한 나라를 못 만들죠. 선박·화재·붕괴 사고 등 모든 위험 요소를 점검하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도록 정부의 시행령을 폐기해달라고 싸우는 겁니다.”

김영오씨는 투사 또는 선동꾼이란 극단의 시선을 받기도 한다. 그는 “둘 다 아니다”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생활고 탓에 ‘카드 돌려막기’에 기대어 살아왔고, “개인파산 신청까지 고려할 정도”로 힘겨운 서민이었다고 했다. “사회에 전혀 눈을 뜨지 않았고, 눈을 뜨려 하지도 않았다”며, 그래서 자신을 ‘지극히 평범하지도 않았던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방송에서 정치·종교 뉴스가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고 한다. 한 푼이라도 더 쥐려고 잔업과 특근을 하느라 총선 투표를 해본 기억이 없고, 대선 투표만 2002년, 2012년에 참여했다고 한다. 급격한 변화는 순전히 딸을 잃은 4월16일부터 시작됐다. “4월16일 이후 우리 사회가, 정부가 어떠하다는 것을 하나둘 알게 됐다”는 것이다.

딸을 떠나보내고 회사로 돌아갔던 그는 유민이를 떨치지 못해 2주 만에 분향소로 돌아왔다. 대통령이 눈물까지 흘린 5월19일 담화문 이후 참사와 유가족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 변화를 감지했다.

“대통령이 눈물까지 흘렸고, 가족들의 뜻을 다 들어주겠다고 호언장담했기 때문에 그걸 믿고 있었던 게 잘못이었죠. 6·4 지방선거가 끝나면서 정부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고, 7·30 재·보궐 선거가 끝나고 완전히 바뀌었죠. 유가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국면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는 걸 보면서 분통이 터졌죠.”

불온한 정치화? 정치권이 시작한 것

‘6~7월’을 통과하며 유가족들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한다고 느낀 그 시점은, 세월호 참사와 유가족에게 다른 이미지가 덧칠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유가족에겐 특혜 이미지가 씌워졌고, 세월호 참사는 정쟁 이슈로 변질돼갔다.

A: “4월 말인가 5월 초쯤에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 때문에 난 거다’란 말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 나오면서 ‘사람들이 이번 사고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러다 6월 지방선거 전후로 ‘(단원고 학생) 대학 특례입학, 희생자 의사자 지정’ 등의 얘기가 나오면서 ‘특혜가 과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나중엔 유가족이 요구한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지만, 당시엔 ‘의원들과 유가족 일부가 조율했을 것’이라고 여겼죠.”
B: “6월 지방선거에서 야당은 세월호 심판을, 여당은 (세월호 애도 정국에 맞서) 실물경제 회복을 들고나오면서 세월호를 둘러싼 진영 논리가 고착화되기 시작한 것 같아요.”
C: “세월호 특위 구성과 수사·기소권을 놓고 여야가 다투면서 세월호가 더 정치적으로 변하고 있구나 느꼈죠.”

김영오씨도 이 시기에 유가족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고 있음을 조금씩 인지했다.

“정부가 진상 규명의 중요성보다 언론을 통해 배·보상을 많이 언급하고, (유가족이 요구하지 않은) 의사자 지정, 특례입학 얘기가 나오면서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을 오해하게 됐어요. 가족들이 특별법을 만들자고 할 때부터 돈을 받으려는 특별법으로 잘못 알기도 했죠. 보상금을 이미 엄청나게 받은 걸로 착각하기도 했고, ‘저놈들 돈을 더 달라고 생떼 쓰고 있다’는 말도 들었죠.”

세월호를 둘러싼 갈등은 생명을 건 그의 단식이 7월14일부터 8월28일까지 46일간 진행되면서 더 분출됐다. 그의 단식 기간이 길어지며 박근혜 정부에 대한 압박이 강해질수록 그를 향한 여권과 보수단체의 비난도 강도가 세졌다. 세월호 특위에 수사·기소권을 주는 문제로 보수와 진보 진영이 갈렸다. 야당은 유가족과 조율하지 않은 채 여당과 특별법 합의를 발표하고 유가족이 이를 거부하는 모양새를 만들어 유가족을 압박하는 공범이 됐다.

그리고 보수언론과 일부 네티즌은 김씨의 개인사까지 왜곡해 들춰내면서 ‘유민 아빠=선동꾼’ ‘유가족=종북좌파’란 인상을 풍기게 만들었다. 그가 정규직이 되면서 자연스레 가입된 ‘금속노조원’이란 자격은 ‘종북좌파의 선동꾼’ 혐의를 씌우는 자료가 됐다. 월 3만원의 회비로 활동하는 취미생활 국궁은 호화 활쏘기로 둔갑해 명확한 논리 없이 단식의 진정성을 공격하는 소재가 됐고, 딸들에게 양육비를 보내지 않았다는 왜곡된 내용으로 아빠의 자격을 묻기도 했다. 일부 신문과 종합편성채널, SNS가 합작해 한 개인을 ‘거짓 선동꾼’으로 몰아간 언론의 악의적 선동이었다.

악마의 얼굴을 한 언론들

“‘유민 아빠는 나쁜 사람이다, 정치적 의도가 있다, 선동꾼이다’라고 해야, 잊지 않고 함께하겠다고 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정권과 여당이 세월호 참사의 성격을 진보 쪽으로 몰아넣어, 보수세력과 싸움을 붙여요. 그래야 보수세력까지 세월호 참사를 안타까워하고 힘을 실어주는 걸 차단할 수 있다는 거였겠죠. 우릴 종북좌파, 선동꾼, 강성파라고 계속 비추는 거죠.”

세월호 유가족들은 이후 9월 발생한 일부 유가족의 대리기사 폭행 사건을 통해 여론 악화의 위기를 맞았다. 11월엔 세월호 특위가 아닌 특검에 수사·기소권을 주는 내용의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유가족의 기대에 못 미치는 특별법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정부가 시행령을 통해 세월호 특위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 김영오씨는 3월30일부터 또 거리로 나왔다. 이미 지난 1월 회사에 사표도 냈다. “한 사람이 굶어 죽어나가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정부란 걸 알게 됐다”는 그는 이 싸움이 길어질 것을 예감하고 있다. 물론 그는 차가운 길바닥보다 더 시린 언론의 외면과 다음과 같은 냉담과 다시 마주해야 하는 것도 안다.

A: “시행령이 뭐가 잘못됐는지 잘 몰라요. 그냥 정부가 뭘 내놓으면 반대한다는 느낌을 받아요.”
B: “세월호가 국정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호 이슈가 다른 국정 과제에 집중하는 데 (안 좋은)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C: “본인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이나 보상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삭발하고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처럼 비쳐요.”

김영오씨는 “1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 아무것도 변한 게 없고, 유가족들이 농성하고 경찰과 계속 싸우니 피로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당부했다.

“제일 먼저 그만하고 싶은 게 우리 유가족이에요. 자식 죽은 것도 원통한데 목숨까지 내던지면서 싸우고 싶겠어요? 그런데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왜 세월호가 급변침을 했는지, 왜 구조하라는 명령이 제대로 내려오지 못했는지, 컨트롤타워가 제대로 움직인 건지. 1년간 해준 게 없어 유민이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그 모습 떠올리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그는 진짜 힘들 때 한 장면을 떠올린다고 했다. 배가 뒤집히고 물이 차오르면서 유민이가 엄마·아빠를 찾는 모습. 그리고 이 정부가 남의 일처럼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장면.

“엄마·아빠 살려줘, 살려줘…. 그 순간만 생각하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유민이가 마지막에 고통스럽게 죽어간 모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글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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