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영원하지 않다. 시간이라는 덫에 지배받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힌다. 때로는 희석되거나 왜곡되기도 한다. 기록이 그래서 중요하다. 기록은 기억에 쌓인 세월이라는 먼지를 걷어낸다.
김진열 감독이 영화 (가제·6월 개봉 예정)을 촬영한 것도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다. “4·16 세월호 참사의 진상, 행동, 다짐들이 희석되거나 변질될 수 있기에 이를 잡아줄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10년, 20년, 100년이 지났을 때도 다시 4월16일, 그리고 그 이후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며 그는 카메라를 들었다.
카메라를 들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그는 기록자였다. 잊힌 기억이나 잊혀지는 기억들을 카메라에 차곡차곡 기록하며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비장애인 남편과 결혼한 여성 장애인의 에피소드를 그린 , 농촌에서 살아가는 부모와 도시로 나가는 자녀의 갈등을 담은 등을 찍었다. 2005년엔 여성 공작원의 삶을 다룬 로 주목받기도 했다. 참사 직후인 지난해 4월 말 김종천 416기억저장소 사무국장은 그에게 세월호 참사 기록을 제안했다. 기록자로 살아온 김 감독도 처음엔 제안을 거절했다. 세월호 참사의 무게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수장된 엄청난 사건을 자신이 기록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5월까지 작업자가 나타나지 않자 결국 김 감독이 나섰다. 를 찍은 정일건 감독, 를 연출한 이수정 감독과 함께 지난해 5월3일 전남 진도로 내려갔다.
결심을 굳혔지만 작업은 쉽지 않았다. 팽목항으로 내려온 수많은 언론의 카메라를 실종자 가족들은 힘겨워했다. 많은 카메라들 중 자신의 카메라도 가족들에게 힘겨운 존재가 될까 두려웠다.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내려갔다가 저도 2박3일 동안 앓아누웠어요. 침묵을 견디기가 힘들었거든요. 숨소리도 내기 힘들어하는 유가족들을 기록하는 게 정말 맞는 건지…. 괴로웠습니다.”
그는 잠시 카메라를 껐다. 유가족들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생각했다. 잠시도 카메라를 꺼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김 감독은 유가족과의 관계에 우선 신경 썼다. 함께 체육관에서 잠을 자고 밤새도록 장례식장을 지켰다. 가족과의 벽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유가족들은 아이의 사진을 감독에게 보여주거나 고생이 많다며 격려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진도에 내려간 초기 상황을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대신 유가족의 신뢰를 얻었다.
그때 김 감독은 스스로에게 3가지를 약속했다. 죽은 아이들을 절대 잊지 않고, 끝까지 유가족과 함께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카메라를 놓지 않겠다.
카메라의 빨간 불이 국회에서 다시 켜졌다. 그는 국회, 광화문, 청와대 그리고 경기도 안산으로 향하는 유가족의 발걸음을 그대로 쫓았다. 공간을 이동하면서 바뀌는 유가족의 표정과 몸짓을 기록했다. 특별법 제정을 위해 평생 처음 국회 농성을 시작한 유가족의 하루부터, 유민 아빠 김영오씨의 46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 박근혜 대통령과 담판을 짓기 위한 76일간의 청와대 앞(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 농성, 그리고 안산에서 다시 시작된 촛불문화제 등을 영상에 담았다.
그들은 어떻게 투사가 되었나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는 가족들의 심경에 주목했다. 평범했던 유가족이 어떻게 목소리를 내는 시민이 되고 권력에 맞선 투사가 되는지를 관찰했다. 참사 초기 유가족들은 정부와 정치권의 역할을 믿었다. 눈물을 흘리는 대통령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는 해양수산부 장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진실이 밝혀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은 유가족의 기대를 배반하며 흘러갔다. 기대에서 실망으로, 실망에서 분노로, 하루가 다르게 출렁이는 유가족의 심경이 김 감독의 눈에 들어왔다. 국가의 민낯이 유가족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안전사회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모들은 안간힘을 짜냈다. 김 감독은 유가족의 ‘슬픔’보다 ‘변화’에 주목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슬플 수밖에 없죠. 제대로 슬퍼하고 이별하기 위해선 자식이 어떻게 죽었는지부터 제대로 밝혀져야 하잖아요. 그런데 세월호 부모들은 제대로 슬퍼할 수도 없었어요. 왜 죽었는지 이유를 모르니까 슬퍼할 여력도 없는 거죠. 마음껏 슬퍼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족들의 변화를 담아야 했던 이유입니다.”
작업이 순탄치는 않았다. 매일 기록 작업의 방향을 두고 연출자들끼리 회의를 했다. 지금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제작 기간이 긴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바로바로 현장을 알릴 수 있는 속보 영상이 아닐까. “사실 저희 작업이 지난해 7월 국회 농성 때만 해도 가족들에게 별 도움이 되진 못했어요. 수많은 카메라가 와서 가족들을 찍는데 현장 모습이 외부에 많이 알려지지 않는 거예요. 카메라는 많은데 고립돼 있는 상황이 계속되니까 힘들어하셨어요.”
그렇지만 촬영팀은 기존 촬영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카메라가 가족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친구이자, 질문을 던지는 사람, 유가족을 지지해주는 버팀목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빠르진 않지만 오랫동안 지켜보는 카메라가 되기로 했어요. 함께 걸어주는 존재랄까.” 촬영 막바지 날까지 김 감독이 유가족들 곁에서 카메라 불을 끄지 않은 이유다.
지난 4월1일 광화문에서 가족들의 싸움이 다시 시작됐다.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때문이다. 김 감독은 편집 작업을 하다 말고 광화문으로 달려갔다. 편집 작업으로 하루 종일 함께 있지는 못하지만 유가족들 곁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시작된 거리농성. 1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현실에 김 감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영화가 끝이었으면 했는데…. 이 작품이 프롤로그에 해당될지도 모르겠네요. 시즌2, 시즌3까지 가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족들도, 시민들도, 그리고 저희도요. 그게 언제까지든.”
지구가 365바퀴 자전했지만 세월호의 시계는 여전히 2014년 4월16일에 머물러 있다. 한 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기록 작업이, 1년이 지났고, 다시 끝이 안 보이는 곳에 서 있다. 언제쯤 그는 카메라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강예슬*2014년 하반기 인턴으로 활동했던 강예슬씨가 인터뷰 뒤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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