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였다. 순천에 ‘이정현’은 없었다.
7·30 재·보궐 선거 뒷날인 지난 7월31일, 전남 순천 중앙시장에서 만난 옛 민주당 당원인 박아무개(52)씨는 오십 평생 처음으로 이번 선거에서 ‘1번’을 뽑았다고 했다.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1988년 이후 광주·전남에서 새누리당 계열 후보로는 처음 당선된 이정현 의원(곡성 출생)이 그 ‘1번’ 표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뒤따르는 그의 설명엔 이 의원의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18대에 당선된 민주당) 서갑원이는 뇌물 처먹어서 (금배지) 떨어져불고, (그 여파로 재보선에서 당선된 통합진보당) 김선동이는 국회에서 수류탄이나 던져불고요. 그런 서갑원이한테 다시 공천 주고서는 우리에게 무조건 뽑아라? 해도 해도 이건 너무해불잖소.”
<font size="3"><font color="#006699">“우리도 새누리당 국회의원 만들어줄 수 있다”</font></font>같은 시장의 분식점에서 일하는 홍희정(51·가명)씨도 ‘생애 첫 1번 투표’를 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서갑원 새정치민주연합 후보 이름부터 꺼냈다. 17·18대 순천에서 재선에 성공한 서 후보는 2011년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한 바 있다. 홍씨는 “여기가 어디라고 서갑원이가 다시 찍어달라고 나온 게 너무 미웠다”며 “한 번도 투표한 적 없는 아들과 직원들을 데리고 투표장에 가서 1번 찍게 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국 평균의 두 배에 육박하는 순천·곡성의 높은 투표율엔 ‘서갑원 심판’ 의지가 반영됐다는 것이다.
오만한 공천에 대한 폭발적인 원망은 공천 작업을 주도한 김한길·안철수 전 공동대표(7월31일 동반 사퇴)에게 집중됐다. 공무원 허아무개(51)씨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호남이라도 쓸 만한 사람을 내놔야 하는데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내놓다보니까 이런 사달이 난 것이다. 그래서 지도부에 대한 이런 심리가 있었다. ‘니네 똑똑히 봐라. 우리는 얼마든지 새누리당 국회의원도 만들어줄 수 있다’고.” 새정치연합 지도부는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정권 심판론을 내세웠지만, 정작 순천 유권자는 그런 지도부를 심판하고자 했다는 뜻이다.
갈 곳 잃은 표심을 이정현 후보는 영리하게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호남에서 최대 약점이 될 수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이라는 점을 강점으로 과감하게 부각시켰다. 인근 여수·광양 등에 비해 제철소·공단 같은 산업 기반이 취약한 순천과 곡성의 상대적 박탈감을 파고든 것이다. ‘미치도록 일하고 싶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순천대 의대 유치와 순천만공원의 국가공원화 같은 지역 숙원사업을 약속했다. 여당과 싸우느라 민생을 등한시한 야당에 실망한 민심은 빠르게 기울었다. 결과는 9.1%포인트 차이의 승리였다. 순천역 앞에서 만난 택시기사 강하원(62)씨는 “먹고사는 데 당이 무슨 소용이냐”고 잘라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민주당’이라면 (후보자) 이름을 몰라도 찍어줬는데, 순천에는 결국 아무것도 안 생겼다”며 박근혜 대통령 측근에 대한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버스 운전기사 강호식(69·가명)씨의 생각도 비슷하다. “순천 경기가 바닥이여. 힘있는 이정현이는 머 한 가지라도 똑 부러지게 할 거 같응게 눈 딱 감고 찍은 거제.” ‘26년 만의 호남 지역 구도 타파’라는 외지인들의 호들갑과 달리, 순천 주민들이 이 의원의 승리를 “뜻밖의 결과가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결과”(공무원 허아무개씨)로 받아들이는 건 이 때문이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어차피 중요한 선거는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font></font>물론 이정현 의원의 당선으로 뿌리 깊은 영호남 지역주의 구도에 균열이 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선거 결과가 발표된 지난 7월30일 서울 영등포구 당사에 나와 “이 후보가 당선된 것은 우리나라 정치사에 큰 획을 긋는 일이다. 호남이 우리 새누리당에 마음의 문을 열어주신 것에 대해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감격해했다. 그러나 현지의 상당수 사람들은 과도한 의미 부여에 손사래를 쳤다. 이번 선거가 ‘임기 1년8개월’짜리 의원을 뽑는 재보선이라는 점을 ‘활용한’ 유권자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자영업을 하는 기철수(50·가명)씨는 “처음으로 여당에 표를 줬다”면서도 “재·보궐 선거라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의 말은 이렇다. “어차피 중요한 선거는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이다. 야당이 호남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 그 전에 경각심을 주려 한 거지 완전히 새누리당으로 갈아탄 건 아니다.” 버스 운전기사 강씨의 생각도 크지 다르지 않았다. “재·보궐 선거니까 부담 없이 여당을 뽑아준 거여. 예산 좀 빼앗아오니라 하고. 아니면 20개월 뒤 낙방시키면 되는 거 아녀.” 이 의원의 힘과 진정성을 20개월 동안 테스트해보겠다는 뜻이다.
야당에 대한 애정도 남아 있었다. 역전시장에서 과일가게를 하는 정아무개(65)씨는 선거 결과에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이정현이가 하도 머 해준다고 하도, 울고불고 하고 댕기니까 딴 사람들이 혹해분 거지. 여기 시장엔 ‘이정현 뽑은 놈들 벼락 맞다 뒤져불라’고 욕하는 사람도 많어.” 슈퍼마켓을 하는 박희자(46·가명)씨도 “(선거 당일인) 어젯밤에 잠을 한숨도 못 잤다”고 했다. “나야 미워도 무조건 ‘2번이지’. 박근혜 대통령이 너무 마음에 안 드니까.”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하는 이 의원은 당선 첫날부터 지역구 다지기에 공을 들였다. 그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7월31일 각 지역 당선자를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최고위원회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선거운동을 할 때처럼 새벽 3시부터 대중목욕탕, 순천역, 전통시장 등을 훑으며 주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기자들과 만나 “내일부터는 각종 단체를 찾아가고 공약도 구체적으로 정리하겠다. 서울에는 다음주에나 올라가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진짜 심판’은 시작도 안 됐다</font></font>이정현 의원에게 표를 던진 새정치연합 당원 박홍철(56·가명)씨는 “아직 순천은 야당을 버리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에게 지쳤다”고 했다. 하지만 야당에 시간은 많지 않아 보인다. “만약 이정현이가 공약을 하나라도 지켜서 재선에 성공한다면 그때는 민주당이 순천에서 버림받고 지역 구도는 깨질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는 다음 총선에서도 민주당이라고 무조건 안 뽑아줄 것이다. (그사이) 당이 안 변하면 우리 마음도 안 변할 것이다.” 새정치연합에 대한 ‘호남의 진짜 심판’은 아직 시작도 안 됐다는 얘기다.
순천=서보미 정치부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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