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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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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고 전성시대

자사고 지고 혁신학교 뜨고, 친일 역사교과서에 교육감협의회

차원에서 의견 개진하고… 13명의 진보 교육감이 해낼 수 있는 일
등록 2014-06-10 16:55 수정 2020-05-03 04:27

압도적 다수다. 6월4일 치러진 17개 시·도교육감 선거에서 진보 교육감이 13명 탄생했다. 이 가운데 8명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지부장·지회장 출신이고, 나머지 5명이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출신이다. 이들은 전국 716만2천여 명의 유치원·초·중·고생 중 84.5%인 605만4500여 명에 대한 교육정책을 이끌게 된다. 지난해 17개 시·도교육청 전체 예산 55조원 가운데 45조9천억원을 집행하고 교원 30만 명의 인사권도 갖는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교육은 ‘진보 교육감 시대’에 들어섰다. 앞으로 4년간 어떤 변화의 바람이 일 것인가?

홀로 용기 낼 수 없었던 엄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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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입시와 경쟁 위주의 교육문화가 달라질 여지가 커졌다. 진보 교육감 후보들은 지난 5월19일 공동 기자회견문을 내어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차별이 아니라 배려를, 탐욕이 아니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교육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매년 수많은 학생이 성적을 비관해 생을 마감하고 있다. 학부모는 막대한 사교육비 부담에 허리띠를 졸라맨다. 이제 더 이상 이러한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공동 공약을 보고, 초등학교 5학년생 아들을 둔 문은정(45·서울 강동구 명일동)씨는 진보 교육감을 선택했다고 했다. “공부라는 획일적 목표를 놓고 모든 아이들이 경쟁하는 게 싫었다. 아이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학교를 바랐다. 공부하라고 아이를 다그치며 엄마들도 괴로웠다. 하지만 홀로 다른 길을 선택할 용기가 없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며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광호 함께여는교육연구소장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가 대부분 고교생이어서, 아이들을 지키고 올바른 교육을 세우길 열망하는 부모의 마음이 작동했다”고 진단했다.

진보 교육감들은 입시·경쟁의 고통을 해소할 방안으로 일반고 강화와 혁신학교 확대, 특수목적고·자율형사립고 폐지 등을 제시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당선인은 “일반고가 2류 학교가 되고 슬럼화되는 현상은 심각한 문제”라며 ‘일반고 전성시대’를 내걸었다. 특목고·자사고의 비중이 17%를 웃돌면서 고교 서열화가 심화돼 일반고 중심의 교육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목고·자사고를 준비하라고 학원에서 무조건 부추긴다. 일반고에 가면 서울의 주요 대학도 가지 못한다고 겁주면서 말이다. 불안해서 사교육비를 늘리고 아이들도 불행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중학생 딸을 둔 40대 엄마(서울 송파구 문정동)의 말이다. 2012년 서울시교육감 보궐선거에서 문용린 후보를 지지했던 그는 이번에는 조희연 후보를 찍었다.

혁신학교의 성취감을 일반고로

과거에는 일부 학생만 외국어고나 과학고를 가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명박 정부 때 자사고가 늘어나면서 중위권 성적의 학생들까지 고교 입시 경쟁에 시달리고 있다. 게다가 학교에 학사 운영의 자율권을 부여한다는 당초 설립 취지를 왜곡해, 자사고는 입시 부정까지 저지르며 부유층을 위한 특권학교로 전락했다.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당선자는 “엄정한 평가를 통해 설립 목적과 건학이념에서 벗어난 특목고와 자사고를 일반학교로 전환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2월에 지정 기간 5년이 만료되는 자사고 25개를 현재 시·도교육청별로 평가하고 있다. 자사고 지정 기간을 5년 더 연장할지, 일반고로 전환할지를 오는 7월 취임하는 교육감이 결정하게 된다. 진보 교육감들은 평가 잣대를 엄격히 들이대겠다고 공언한다. “교육 불평등 효과는 얼마나 있는지, 지역사회와 공동체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평가 항목에 넣는 등 공공적인 기준을 강화하겠다.”(조희연 당선인) 다만 자사고 지정을 취소할 때는 교육감이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없고, 교육부 장관과 협의해야 한다.


내년 2월에 지정 기간 5년이 만료되는 자사고 25개를 현재 시·도교육청별로 평가하고 있다. 자사고 지정 기간을 5년 더 연장할지, 일반고로 전환할지를 오는 7월 취임하는 교육감이 결정하게 된다.


자사고가 ‘지는 해’라면, 혁신학교는 ‘뜨는 해’다. 1기 진보 교육감들의 대표적 성과인 혁신학교가 6개 시·도에서 13개 시·도로 확대될 전망이다. 2014년 3월 현재 혁신학교는 경기도에 282곳으로 가장 많고, 전북 100곳, 서울 67곳, 전남 65곳, 강원 41곳, 광주 23곳 등 모두 578곳이다. 학급 인원이 25명 이하인 혁신학교는 창의 인성·감성 교육을 지향한다. 토론을 통한 창의적 수업, 학생이 참여하는 민주적 학교 운영 등이 특징이다. 혁신학교가 호평을 받으면서, 경기도에선 주변 집값을 올리는 효과를 낼 만큼 인기가 높다. 경기 지역의 15년차 교사 박수지(40·가명)씨는 “보수 교육감으로 바뀌면 혁신학교 예산이 깎일까봐 걱정했다. 성공이라고 확언할 수 없지만 아이들이 창의적이고 자발적으로 변해가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새로운 실험을 더 이어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숭희 서울대 교수(교육학)는 “1기 혁신학교에서 교사들은 ‘해냈다, 해내고 있다’는 성취감을 얻었다. 이러한 경험을 일반고로 확대하는 게 2기 진보 교육감의 과제다”라고 말했다.

시·도교육감들의 협의기구이자 대정부 협상기구인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 진보 교육감들은 중앙정부의 교육정책에도 공동 대응하며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됐다. 그동안은 교육감협의회에 보수 교육감이 많아서 진보 교육감이 설 자리가 없었다. 앞으로는 교육감협의회에서 진보 교육감들이 교육 현안과 정책 연대를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시·도교육청이 주관하는 ‘국민 대토론회’를 열어 사회적 합의도 만들어갈 계획이다.

눈앞에 닥친 공동 대응 과제는 ‘친일 역사교과서’ 문제다. 지난해 보수 성향 학자들이 작성한 교학사 한국사 고교 교과서가 정부 검증을 통과하면서 교과서 논쟁이 불붙었다. 교학사 교과서가 친일·독재를 미화한데다 수백 건의 오류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학계와 시민단체는 거세게 반발했고 각 학교는 교학사 교과서를 외면했다. 그러자 교육부는 ‘국정 역사교과서 도입’이라는 초강력 카드를 들고나왔다. 교육부는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인 학생들이 고1이 될 때 사용하는 교과서를 국정으로 할지, 검인정으로 할지를 결정해 오는 7월 발표할 예정이다.

대안 교과서 발행할 경우 갈등 예상돼

진보 교육감들은 선거 기간에 “교학사 교과서 같은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로 우리 아이들을 공부시킬 수 없다”고 밝혔다. 또 “국정 역사교과서는 역사교육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20년 전으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라고 반대했다. 교육감협의회에서 반대 의견을 모아 교육부에 개진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교육부가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할 경우 13개 진보 교육감이 공동으로 대안적 역사교과서를 발행해 대응할 방침이라고 밝힌 바 있어 갈등이 예상된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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