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화장 고치지 말고 제대로 바라보라”

날 선 비판 쏟아낸 후나바시 요이치 일본재건이니셔티브(RJIF) 이사장…
“원인을 처절하게 따져보는 ‘패전 의식’ 있어야”
등록 2014-06-04 14:32 수정 2020-05-03 04:27

“재건을 시작하려면 우선 패배부터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 그저 얼굴 화장만 고치고 있다.”
후나바시 요이치(69·사진) 일본재건이니셔티브(RJIF) 이사장은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을 향해 날 선 비판을 쏟아냈다. 주필 출신인 그는 일본의 대표적 언론인으로 알려졌다. 2007년 한반도 핵 위기를 심층 취재한 (원제: 더 페닌슐라 퀘스천)을 내놓는 등 세계 정세와 한반도 문제 등에 예리한 관점을 제시해온 그는 2011년 3월11일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회의 재건 활동에 뛰어든 바 있다. 그는 재계·언론계·법조계 등의 인사들과 함께 민간 싱크탱크 ‘일본재건이니셔티브’(RJIF)를 세운 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제기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장기적 해법을 고민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RJIF는 ‘1호 프로젝트’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원인을 분석하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독립검증위원회’(이하 검증위)를 출범시켰으며, 사고 뒤 1년 만인 2012년 2월8일 검증위는 정부·핵산업계의 영향에서 벗어난 시각에서 만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조사 보고서’를 내놓았다. 지난 5월16일 오후 도쿄 미나토구 아카사카에 위치한 RJIF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한국의 세월호 보도가 너무 빨리 사고 결론을 향해 가고 있다”며 “사고 원인 등에 대한 진실 추구보다 책임 추궁 과정이 앞서면서 결과적으로 인과관계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을 것 같아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진상 조사 뒤 정부 향한 ‘책임론’ 제기

-세월호 참사에서도 RJIF의 검증위 같은 민간 영역이 주도하는 조사가 필요하다고 보는가.


“재난 뒤에는 늘 개혁을 논의 대상에 올린다. 그보다는 다양한 제도가 왜 사용되지 못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중요하다. 훈련은 기본적으로 리더가 재난 상황을 훈련하는 과정이 전부다. 오히려 리더를 훈련하는 게 더 중요한 이유다.”


1

1

=그렇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처음부터 정부를 향한 ‘책임론’이 등장하진 않았다. 민간 영역에서 진상 조사를 하면서 제기한 문제다. 안전 제도 문제와 ‘관피아’ 등 낙하산 인사 문제를 분리해 분석해야 한다. 우리는 총리와 정부 관계자 등 300명 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사고·조사 보고서를 내놨다. 맨 처음 사고의 인과관계에 대한 검증에 집중했기 때문에 조사 당사자들이 핵발전소에 대한 찬반 여부는 논외로 하고, 진실 규명에 영향받을 수 있는 ‘결론을 이렇게 하자’ ‘누구를 제외하자’ 식의 제안을 배제한 채 철저하게 사실 검증과 인과관계 규명에 집중했다.

한국도 싱크탱크와 대학, 시민, 언론 그리고 법조인 등이 모여 시민사회가 진상 조사를 해야 한다. 앞으로 한국 사회가 세월호 사고를 어떻게 풀어갈지 솔직히 궁금하다. 누군가를 악인으로 만들거나 (사회적으로) 죽이는 과정이 앞서면 참사의 교훈을 살리기 어려운 구조가 될 것이다. 우선 참사에서 활약한 의인을 찾아내고 반성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야 한다. 조사 과정에서 형사처벌 문제 등에 너무 집중하다보면 정치적 문제로 비화할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광고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이후 해법으로 재난안전 전담 기관인 ‘국가안전처’를 새롭게 만들겠다고 밝혔다.

=재난 뒤에는 늘 개혁을 논의 대상에 올린다. 그보다는 다양한 제도가 왜 사용되지 못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중요하다. 일본에서 평소 하는 관제 훈련을 들여다봐도 사실 문제점이 많다. 시나리오 없이 갑자기 실시하는 훈련은 거의 없고, 전체적인 훈련의 개요를 준비하고 심지어 참석자 발언까지 준비한다. 결국 체통을 중요시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벌어지는 것이다. 훈련은 기본적으로 리더가 재난 상황을 훈련하는 과정이 전부다. 오히려 리더를 훈련하는 게 더 중요한 이유다. 책임을 진 리더의 의식이 희박했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게 뼈아프다.


“도시의 거대화와 기술 진보로 이른바 ‘악마가 따라붙는 상황’이 생기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한국의 문제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다. 사고 원인 분석도 세계와 공유하는 가치관에 접목하는 게 중요하다.”


광고

제도가 아닌 내용 면으로 보면 조직문화와 연결지을 수 있는 ‘거버넌스’(민관 협치)가 있다. 안전기술 문제와 별도로 안전문화가 사회 안에서 어떻게 공유·확산되는지가 그 사회의 체제이고 거버넌스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재난을 겪으면서 어떤 조직을 새로 만들기보다는 지금 있는 조직을 어떻게 조합하느냐를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동기부여를 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정부의 명령체계다. 군대와 경찰, 소방 등 계통을 어떻게 제어하느냐다. 세월호 같은 사고는 기존 체제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통령 중심제인 한국에서는 대통령에게 권한을 집중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지 모른다. 일본의 ‘국가위기관리센터’는 기능을 융합해 한곳에 모으는 게 핵심 역할이다.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라 종합 조정 기관으로서 업무의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RJIF는 지난해 3월 라는 책을 통해 앞으로 일본이 마주할 가능성이 있는 재난의 유형을 제시했다(센카쿠열도의 군사적 충돌, 국채 폭락, 수도직하지진, 사이버테러, 전염병 대유행, 에너지 위기, 북한 붕괴, 핵테러, 인구 감소 등 9가지). 한국 사회가 대비해야 할 재난 시나리오에는 뭐가 있을까.

=재난의 범주를 두고 한국과 일본을 구분짓는 건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다. 비군사적 위협은 지정학적 요소와 맞물리면서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도시의 거대화와 기술 진보로 이른바 ‘악마가 따라붙는 상황’이 생기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한국의 문제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다.

일본 국회의 사고조사위원회는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사고 원인을 ‘일본 문화가 만든 이른바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형 재해’라고 결론 내렸다. 결과적으로 책임을 회피한 현명하지 못한 대처 방안이었다. 사고 원인 분석도 세계와 공유하는 가치관에 접목하는 게 중요하다. 이제는 비군사적 위협과 재해에 우선순위를 두고 위기관리를 해야 한다. 외교·안보의 상위 개념으로 ‘위기관리’를 확립해야 한다.

광고

악마적 상황, 최악의 시나리오 생각해야

-그렇다면 일본은 1995년 한신·아와이 대지진과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겪으면서 어떤 차이를 경험했나.

=모든 국가는 애초에 상정하지 않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해야 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두고 대응하는 게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 미리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 경찰·군대 등도 대응이 불가능한 상황이 오면 미리 생각한 매뉴얼도 안 통한다. 평상시 대비책이 없으면 안 된다.

재난 시나리오를 만들 때 중요한 것은 ‘재간’(재난과 재난 사이의 기간)에 어떤 체제를 꾸리느냐다. 한신·아와이 대지진이 일어나고 두 달 뒤, 도쿄에서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 테러가 벌어졌다. 두 사건은 ‘과연 이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일본이지만 재해나 컬트집단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일본이 흔들리는 과정에서 나타난 다양한 모습 가운데 하나가 한신·아와이 대지진의 피해 현장에서 정부가 아닌 야마구치구미의 야쿠자가 가장 먼저 피해자들에게 삼각김밥을 전달한 일이었다. 그 일로 영향받은 일본 민주당의 리더 절반 이상이 그 뒤 민간 비영리단체(NPO)에서 활동 경험을 쌓았다. 정부 차원에서는 과거 냉전시대에 세워둔 군사적 영역 중심의 위기관리 기능을 지정학적 문제와 테러, 도시화 등 비군사적 영역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이 교훈은 1999년 일본 도카이무라의 JOC 핵연료 가공시설에서 발생한 직원들의 방사능 피폭 사고를 거쳐 후쿠시마 사고까지 반영됐다. 대표적인 변화가 자위대의 적극적인 재난 복구 활동이다. 1995년에는 평화 의식 속에서 자위대가 나타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있었지만, 동일본 대지진 때는 자위대가 자체적으로 재해 지역에 들어가 활동할 수 있었다.

결국은 사회가 얼마나 강한가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재건’이 아닌 ‘국가 개조’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재난 이후를 고민하는데 눈여겨봐야 할 부분으로 뭐가 있을까.

=재난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강한 사회인가’를 보는 것이다. 청와대·지방자치단체의 위기관리 능력은 어떤지, 현장 리더는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가 중요하다. 세월호 선장, 그리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소장의 ‘직업의식’도 중요하다. 그럼에도 가장 마지막에는 사회가 얼마나 강한지가 중요하다. 후쿠시마 사고 등을 경험한 일본 사회는 결과적으로 강했다. 2005년 미국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 당시 정부 인력은 인명 구조에 절반, 치안 유지와 폭동 진압에 나머지 절반 인력을 투입했다. 일본 경찰·자위대가 인명 구조에 100% 집중한 것과 대비된다. 후쿠시마 사고 처리 등에 여러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일본은 강한 사회였다는 점을 증명했다고 본다. 다만 그다음으로 구국 내각 구성이 필요했는데, 간 나오토 내각이 연립정권 수립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부분은 아쉽다.

사실 일본은 패전 과정에서 상당히 위험한 거버넌스가 존재했다. 그런 점에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도 일종의 패전이다.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 패한 것인지를 처절하게 따져보는 이른바 ‘패전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사회가 재건을 하려면 우선 패배부터 인정해야 한다. 규제 관리나 행정 관료 등 전문가들은 문제가 없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이런 패전 의식이 없어 그저 얼굴 화장을 고치는 상태로 보인다. 어떤 제품, 어떤 기술에도 위험은 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리스크 제로’를 상상하면 안 된다. 이러한 위험을 안고 가는 구성원을 대우해주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사회가 자연스러운 안전사회 구축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도쿄(일본)=글·사진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