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사회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잇따른 사건·사고로 인해 수십 명의 생명이 꺼져가면서 세월호 참사가 ‘현재진행형’임을 거듭 증명한다. 그래서 더 두렵다. 재난이 ‘사고’가 아니라 ‘일상’이 돼버린 한국 사회가 말이다. 지난 5월26일 경기도 고양종합터미널 화재, 5월28일 전남 장성군 효실천사랑나눔요양병원(효사랑병원) 화재가 세월호 참사와 만나는 4가지 공통점을 이 꼽아봤다.
방화벽은 단 한 대도 작동하지 않아
첫째, 안전 설비가 작동하지 않았다. 5월26일 오전 9시께 고양시외버스종합터미널 지하 1층에서 발생한 불은 28분 만에 진화됐다. 하지만 8명이 숨지고 53명이 중경상을 입는 큰 인명 피해를 낳았다. 세월호의 구명정처럼 방화·제연 설비가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불이 난 곳은 지하 1층으로, CJ푸드빌이 발주한 푸드코트 내부 리모델링 공사장이었다. 한 인부가 가스 배관 용접을 하던 중에 불꽃이 튀었다. 약하게 새어나오던 도시가스와 인화물질에 불이 옮겨붙었다. 검은 연기는 지상 1층과 2층을 거쳐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차올랐다. 유독가스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확산됐다.
이 건물에는 화재 연기를 막기 위한 방화벽이 각 에스컬레이터 앞에 설치돼 있었다. 그러나 불이 처음 시작된 지하 1층의 방화벽은 단 한 대도 작동하지 않았다. 지상 1·2층에 설치된 층간 방화벽도 마찬가지였다. 소방관들이 진입했을 때 건물 1층의 스프링클러(화재시 자동 방수 설비)는 꺼져 있었다. 제연 설비가 제대로 설치돼 화재 당시 작동했는지도 의문이다. 한 소방관은 “제연 설비가 제대로 설치돼 있다면 터미널 안에 연기가 그렇게 빨리 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8분 만에 진화됐지만 장성 효사랑병원에선 21명이 목숨을 잃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 환자가 모여 있는 곳이지만, 법의 허점 때문에 스프링클러나 방화벽은 아예 설치하지 않아서다. 현행 법률에는 의료시설의 경우 바닥 면적 1천m² 이상, 4층 이상 건물만 방재 장치를 설치하도록 규정돼 있다. 오는 7월부터는 스프링클러 설비를 모든 요양병원으로 확대하지만 이 규정은 신규 시설에만 적용된다. 기존 요양병원은 예외다. 따라서 2층 건물에 바닥 면적 500m², 연면적 1600m²인 효사랑병원은 ‘합법적으로’ 방화 장비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연기를 빼주는 제연 설비는 수용 인원이 100명 이상인 영화관이나 무대의 바닥 면적이 200m² 이상인 공연장·체육관에는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그러나 역시 병원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5월28일 0시25분께 별관 2층 남쪽 끝방인 다용도실 3006호실(지상 2층이지만 병원에서는 지하층을 포함해 3층으로 번호를 매김)에서 불이 나자 효사랑병원은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였다. 불은 다른 병실로 옮겨붙지 않고 발화 장소 33m²만 태우고 꺼졌지만 사망자가 속출했다. 불이 난 다용도실에 있던 침대 매트리스와 플라스틱으로 된 의료기기 등이 타면서 유독가스가 별관 2층으로 빠르게 덮쳤기 때문이다. 상당수 노인 환자들은 유독가스를 내뿜는 시커먼 연기를 피할 수 없었다. 소방방재청 관계자는 “화재 사망자 10명 중 7~8명은 가스와 연기에 의한 질식사”라고 말했다.
31개 항목에 ‘이상 없음’둘째, 안점점검은 건성건성이었다. 효사랑병원은 불이 나기 일주일 전인 5월21일 장성군 보건소에서 안전점검을 받았다. 세월호 참사가 난 뒤 주요 시설에 대해 이뤄진 집중 점검의 하나였다. 2시간가량 점검하고 ‘화재 등 사고 관련 안전교육 실시 여부’ ‘모의 소방훈련 실시 여부’ 등 31개 항목에 모두 ‘O’(이상 없음) 표시를 했다. 하지만 정작 불이 나자 효사랑병원 직원들은 우왕좌왕했다. 장성군 보건소 쪽은 “직원들이 (훈련 같은 것을) 했다고 하길래 믿고 동그라미를 쳤다”고 말했다.
고양버스터미널의 방화시설도 소방 당국이 올해 초 점검했다. 당시 지하 1층 방화벽은 제대로 움직였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화재가 나자 허수아비가 됐다. 리모델링 공사의 편의를 위해 방화벽을 꺼놓은 건지, 아니면 장비에 이상이 생긴 건지 조사해야 한다.
화재 원인인 CJ푸드빌의 리모델링 공사는 소방 당국의 허가도 받지 않았다. 공사에는 방화벽 위치를 바꾸는 것까지 포함돼 소방설비법에 따라 관할 소방서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시공업체는 허가 없이 공사를 시작해 2주간 진행하다가 5월22일 뒤늦게 일산소방서에 허가 신청을 냈다. 최종 허가 여부를 결론짓지 않은 상태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셋째, 사람보다 돈이 중심이었다. 최근 인구 고령화로 노인 환자가 급증하면서 요양병원은 ‘유망 사업’으로 떠올랐다. 요양병원 입원 환자들은 일당정액제(요양병원 원형수가제)로 입원진료비가 책정된다. 환자 상태에 따라 하루당 1만3600~5만6100원이다. 환자가 20%를 부담하고 나머지 80%는 건강보험 재정에서 나온다. 환자만 많이 유치하면 수익이 보장되는 구조다. 국내 요양병원 수는 2004년 113개에서 올해 1262개로 10배 이상 늘어났다.
요양병원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지자 환자 부담금을 깎아주는 호객 행위가 등장했고 의료진을 줄여 인건비를 삭감했다. 특히 당직근무자를 줄이는 게 단골 메뉴였다. 효사랑병원도 그랬다. 불이 났을 때 전 병동에는 의사 1명, 간호사 2명, 간호조무사 9명이 당직근무를 했다고 병원 쪽은 밝혔다. 의료법에 따르면 당직의사는 2명이어야 한다.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국장은 “요양병원 화재는 국가가 수익이 최적화된 민간병원에 노인 의료를 방치하면서 나타난 일이다. 적어도 요양병원 10곳 중 3곳은 공공병원으로 바꿔 노인 의료에 대한 적정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담당자가 밥을 먹으러 갔다”넷째, 컨트롤타워가 없었다. 고양종합터미널 화재 희생자 가족 20여 명은 5월27일 아침 7시께 경기도 고양시 백석동 일산병원에 모였다. 고양시 사고대책본부가 수습 상황을 설명해주기로 약속했다고 해서다. 하지만 1시간을 기다려도 관계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가족들이 대책본부에 확인 전화를 했다. 시청 공무원이 이렇게 말했다. “담당자가 밥을 먹으러 가 통화가 안 된다. 그런 내용을 보고받은 적이 없다.” 분노한 가족 10여 명은 대책본부를 찾아가 항의했다. 대책본부 쪽은 “설명회를 열기로 약속한 공무원이 정확히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최봉순 부시장이 손에 들고 있던 보고서에는 ‘유가족들이 오전 10시까지 책임자의 설명 요구’라고 쓰여 있었다.
가족들이 사고 원인을 따져묻거나 사고 조사보고서 사본을 요구하자 최 부시장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사고 신고·구조 상황은 소방이 파악하는 거라 대답할 수 없다.” 가족들이 소리쳤다. “여기가 컨트롤타워냐. 가족들에게 일일이 알아보라 하면 도대체 어떡하란 말이냐.” 앞서 대책본부가 만든 사고 당일 보고서에는 희생자 가족 명단이 없었다. 다만 이날 사고 현장을 방문한 정치인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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